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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아연 Jun 05. 2024

관계 맺기의 사각지대


어제는 뜻하지 않게 많은 전화통화를 했습니다. 저로선 1년 치 통화를 다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타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타자가 없이는 나 자신도 없습니다. 혼자 존재하는 인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타자 중에는 너무나 아픈 타자, 위험한 타자, 나쁜 타자, 악한 타자가 있습니다. 저거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악질도 있고요.  



전에는 나 따라 상대도 반응한다고 생각하면서 습관적으로 나를 먼저 살피고 성찰하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듣보잡' 경험을 해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성찰하는 인간이라고 해서 우연히 공사장 옆을 지나가다 머리 위로 떨어지는 망치를 피할 수는 없듯이요. 



그래서 또 글 한 편을 써보았습니다. 글에는 '로맨스 스캠'을 예로 들었습니다만, 하고 싶었던 제 마음 속 얘기는 달랐습니다. 



뭐냐면 씨알재단에 의해 갈갈이 찢긴 저의 상처의 깊이와 넓이가 너무 커서 '김, 이' 두 타자에 대한 완전한 절망을 쓰고자 했던 것이죠. 



비단 저뿐일까요. 아무 죄 없이 함정에 빠진 사람이. 평생 그 악연의 상흔을 안고 살아야하는 사람이. 타자에 대해 몸서리 치는 환멸에 넌더리할 사람이, 절규할 사람이! 









더피알=신아연 객원기자 | 타자(他者)에 대해 생각한다. 나에 대해 생각한다는 말과 다름없는 말이다. 나아가 사람에 대해 생각한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타자 속에는 이미 내가 반영되어 있고, 나와 그리고 모든 타자들이 곧 ‘사람’이기에.



나만 따로 똑 떼어 생각해 본다거나, 나는 쏙 빼고 타자들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은 진정한 인간 이해가 아니다. 나라는 존재는 언제나 타자 속에서 존재한다.



타자와의 상호작용 속에 내가 놓인다. ‘끼리끼리 다닌다’는 말이나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말이 그 뜻이다. 타자 중에서는 상호작용이 보다 빈번히 일어나는 타자가 있기에 그 타자들 위주로 내가 인간관계를 맺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관계가 곧 나를 증명한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던 그 ‘관계 속의 인간’이 지금 위태롭다.



*글은 아래 링크를 클릭하시면 이어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https://www.the-pr.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540






하재열 작가의 '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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