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세계, 있다 없다?

죽음 이야기 13

by 신아연


추석 연휴 잘 보내셨습니까. 잘 쉬고 나서 하필 죽음이야기로 만나게 되어 송구하네요.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늘 죽음이 있지요. 명절이라고 예외는 아니라서 추석 하루 전날 친구 형부의 부고를 들었고, 오늘은 2016년에 돌아가신 제 어머니의 기일이며, 26일은 스위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분의 한 달 째 되는 날이니 제 주변의 죽음 기억만 벌써 셋입니다. 하기야 추석 차례는 죽은 자를 위한 밥상 차리기니 우리 모두 죽음을 떠올린 날이기도 하지요.


제가 죽음 이야기를 쓰다보니 제가 있는 자리에서는 죽음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옵니다. 죽으면 끝이다, 아무것도 없다는 쪽과 사후에도 어떤 세계가 있다는 쪽으로 갈리지요. 영혼의 존재가 있다 없다는 말로 바꿔할 수 있겠지요. 아무것도 없다는 쪽은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거지요. 인간의 모든 의식은 뇌작용이며 육체의 소멸과 함께 멈추게 된다는 생각입니다.


반면 죽음 이후의 세계가 있다는 쪽은 나름 증명을 해야 합니다. 영혼이란 게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하는 거지요. 다시 말해 뇌와는 무관한 의식이 존재하며 그 의식이 존재의 참 본질이란 걸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몸은 죽어 없어졌지만 영혼은 불멸하며 어느 때 인연을 만나 또 다른 몸을 입고 이 세상으로 다시 오거나, 영혼들의 세상에서 그대로 쉼을 누린다는 것에 근거를 댈 수 있어야 하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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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선 / talking about soul 2007


제게는 8살 무렵 자녀를 희귀병으로 잃은 독자가 둘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같은 병명이었지요. 이 엄마들은 사후세계를 당연히 믿습니다. 자기의 아이가 죽음과 함께 소멸해 버렸다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담에 다시 만날 수 있다고 믿으며 하루하루 살아냅니다.


저는 이 젊은 두 엄마들과 깊은 대화를 나눕니다. 그야말로 영혼의 대화지요. 그 두 엄마와 저는 몸을 가진 존재임에도 그 몸에 의지하지 않고, 뇌작용에 의지하지 않고, 순수 의식, 다른 말로 영혼으로 만납니다. 깊은 우물에서 길어올린 물처럼 가장 맑고 순정한 마음 상태에서 교감합니다. 그 엄마들은 세상을 떠난 자녀들과도 그렇게 만나고 있는 걸 테지요.


우리는 물리적 세계에서만 살아봐서 죽음 이후의 세계도 그런 식으로 인식하려 듭니다. 한국, 호주, 미국 이렇게 다른 나라를 인식하듯이 공간적인 어떤 장소로. 하지만 사후세계는 의식의 세계입니다. 의식은 간절하고 집중된 상태의 어떤 작용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펼쳐집니다. 공간이나 장소적 개념이 아닌 것이죠.


추석 연휴에 저는 <객주>를 쓰신 김주영 작가의 소설을 읽었습니다. <잘 가요 엄마>를 읽고 있었지요.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작가의 말까지 딱 읽고 났는데, 바로 그 순간 김 작가님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일종의 텔레파시였던 거지요. 물론 제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었다고 해서 하루키가 제게 전화를 걸어올리는 만무하죠. 김 작가님과 제가 그 전에 어떤 인연이 있었다는 얘기지요. 제가 오래 기다렸던 전화이기도 하구요.


살면서 우리는 몸과는 무관한 의식의 연결성을 경험합니다. 거꾸로 의식이 먼저고 몸이 따라 올 때가 있지요.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거나, 막 너 얘기하는 중에 나타난 걸 보면 양반은 못 된다는 말들이 그런 거지요. 저는 그런 경험을 자주 합니다. 여러분도 그러실 거예요. 그러한 텔레파시의 무한 확장, 절대 경지에서는 죽은 자와의 교류도 가능해질 테지요. 사후세계의 존재란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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