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잃고 나는 우네

스위스 안락사

by 신아연


저는 지난주부터 스위스 안락사 동행기를 쓰고 있습니다. 200자 원고지 400매 분량을 목표로 현재 150매 가량을 쓴 상태인데 오늘 아침 문서가 열리질 않네요. 'error' 표시가 뜨면서. 통보도 없이 밤새 사형이 집행된 상황입니다.


앉은 자리에서 원고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컴퓨터에 저장해 둔 다른 모든 문서도. 머리에서 징소리가 울리고 모골이 송연해 지네요. 날아 간 글이 제게는 마치 피가 빠져나간 것 같고 골수가 빈 것 같네요. 돈으로 치면 금고째 털린 거구요. 황망하고 허탈합니다.


한글 워드 프로세스 프로그램 자체가 열리질 않는 걸 보면 오래 된 컴퓨터가 드디어 고장을 일으킨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진즉 컴퓨터를 바꿨어야 했는데... 스위스에서 돌아가신 분이 7월에 컴퓨터를 사 준다 했을 때 샀어야 했어, 돌아가시기 전날 주신 1000불도 그냥 갖고 있을 게 아니라 돈을 보태서 새 컴퓨터를 장만했어야지 여지껏 뭐했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다더니.


"선생님, 제가 적금 타면 선생님 노트북 하나 사드리려고 해요. 이렇게 위로의 글을 쓰시는 분께 노트북을 사드리면 저도 같은 일에 동참하게 되는 거니까요."


이런 가슴 뭉클한 댓글을 받은 일이 있고, 친구는 적절한 모델까지 찾아주며 저보다 더 서둘렀는데 제가 너무 게으르고 안일했습니다. 돈이 없는 게 아니라 귀찮고 번거로워서 최대한 개겼던 거지요. 혼자 살면 이런 게 문제예요. 거부감과 망설임을 느끼는 부분에 더욱 취약해지는.


오늘은 죽음 이야기는 관두고 그냥 제 이야기나 좀 할게요. 글이 손에 잡히질 않으니.


저는 어제 오후, 그림을 그리는 도반과 긴 통화를 하면서 우리의 진로에 대해 진지한 모색을 했습니다. 오직 고독한 길을 가자, 죽을 때까지 지치지 말자, 나는 글로 너는 그림으로 남은 생을 완결하자, 이를 위해 각자 수행하며 서로를 독려하자, 창자 속까지 진실하게 자기 돌아보기를 하자, 너와 내가 함께 하는 한 우리는 더이상, 결단코 혼자가 아니다. 이렇게 도원결의에 버금가는 맹세를 했습니다. 어젯밤, 충만하게 차오르며 따스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더니 오늘 새벽 이 사달이 난 거죠. 죽은 원고를 장례지내는 심정이지만 주저앉아 운다고 별 수 있나요. 죽은 자식 뭐 만지기라고, 울어도 소용없는 일, 백지상태에서 다시 시작해야겠죠.


어느 날 문득, 내 인생 자체가 다 날아갔다는 자각이 든다면? 이거야말로 그대로 죽음인 거죠. 새 컴퓨터로, 새 글을 쓸 수 있는 따위의 일이 아니니까요. 돌이킬 수 없으니까요.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여생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걸 확연히 깨달아야 합니다. 시간을 아껴야 해요. 남은 시간을 의미있게 살아야 해요. 스위스에서 돌아가신 분이 제게 주신 가르침도 그거였어요.


그분은 돌아가시기 전날 꼬박 밤을 새우셨지요. 지상의 마지막 밤을 잠으로 보내고 싶지 않다면서. 우리에게도 마지막 밤이 곧 찾아올테죠. 저는 글을 쓰려고 해요. 그 밤에도, 그분처럼 꼬박 새우며.














[출처] [신아연의 영혼의 혼밥 536] 목요죽음이야기(29) 글을 잃고 나는 우네|작성자 자생한방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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