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막 <큰 바위 얼굴>을 읽었는데, 그때 형님이 스위스 호텔방에서 그 소설을 빗대어 하셨던 말씀이 기억나질 않네요. 혹시 기억하시나요?"
새벽에 일어나보니 간밤에 이런 카톡 메시지가 들어와 있네요. 지난 8월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동행했던 분이 보낸 것입니다. 형님이란 그때 돌아가신 분을 말하며, 메시지 보낸 분은 고인과 20년 지기(知己)입니다. 두 분은 사회에서 만났고 나이는 고인보다 몇 년 아래입니다. 아마도 고인을 생각하며 <큰 바위 얼굴>을 읽으셨겠지요.
아래는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인용했습니다.
미국의 소설가 너새니얼 호손(1804∼1864)이 만년에 쓴 단편소설로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재를 통해 여러 가지 인간상을 보여주면서 이상적인 인간상을 추구하는 작품이다.
남북전쟁 직후, 어니스트란 소년은 어머니로부터 바위 언덕에 새겨진 큰 바위 얼굴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라는 전설을 듣는다. 어니스트는 커서 그런 사람을 만나보았으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자신도 어떻게 살아야 큰 바위 얼굴처럼 될까 생각하면서 진실하고 겸손하게 살아간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돈 많은 부자, 싸움 잘하는 장군, 말 잘하는 정치인, 글 잘 쓰는 작가들을 만났으나 큰 바위 얼굴처럼 훌륭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니스트의 설교를 듣던 한 시인이 어니스트가 바로 ‘큰 바위 얼굴’이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할 말을 다 마친 어니스트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자기보다 더 현명하고 나은 사람이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모를 가지고 나타나기를 마음속으로 바란다.
돌아가시기 이틀 전에 우리는 스위스에 집결했고 한 방에 모여 대화를 나눴습니다. 고인은 와인 잔을 기울이며 인생에 대한 성찰과 삶의 의미를 들려주셨지요. 아마도 그때 큰 바위 얼굴을 언급하셨나 본데, 긴장과 슬픔 탓에 우리 모두 오롯이 집중을 못했나 봐요.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저도 기억이 나질 않네요.
제가 이 이야기는 안 하려고 했는데 그냥 할게요. 웃음거리가 될 각오를 하고.
돌아가시기 하루 전날, 고인은 당신의 방에서 우리를 한 명씩 개별적으로 만났습니다. 약 10분 정도,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아니, 가장 짧은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한 사람과의 지상 마지막 독대라는 점에서 그 소중함의 의미를 헤아린다면.
저는 그때 고인에게 준비해 간 작별의 글을 드렸고 고인도 제게 덕담을 주셨습니다. '큰 바위 얼굴'을 빗대어. 그러니까 제가 기억하는 큰 바위 얼굴은 저와 둘이 있을 때의 것이지요. 고인은 제게 지금처럼 글을 쓴다면 장차 큰 바위 얼굴이 될 거라고 격려하셨습니다. 나를 위한 글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한 글을 쓰라고 당부하시며. 글이 갖는 위대함은 결국 독자들을 위로하는 데 있다며.
이 대목에서 여러분들이 웃으실까봐 이 이야기는 끝까지 안 하려고 했던 거지요. "신아연이 몸에 비해 큰 얼굴인지는 몰라도 큰 바위 얼굴 씩이나!" 하고 말이죠. 백 번 맞는 말씀입니다. 저 따위가 큰 바위 얼굴을 소망하다니요, 당치도 않은 소리지요.
그런데 지금 가만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분은 동행했던 모두에게 큰 바위 얼굴이 되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 독대의 순간에 무슨 대화를 나눴냐고 서로 물어보질 않았으니 모를 일입니다.
큰 바위 얼굴이란 어떤 얼굴입니까. 네, 바로 성찰의 얼굴이지요. 참된 영혼의 얼굴이지요. 가장 인간다운 얼굴이지요. 우리 모두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 얼굴이지요.
죽음을 앞 둔 사람의 가장 큰 특징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간 쓰고 다녔던 모든 가면을 벗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분이 제게 '립 서비스'를 할 이유는 더더구나 없겠지요. 그렇다면 저와 제 글이 여지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큰 바위 얼굴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의 여지 말입니다.
무엇보다 뒤늦게 깨닫습니다. 내가 이미 큰 바위 얼굴을 만났다는 걸. 스위스에서 안락사 하신 그 분이 바로 큰 바위 얼굴이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