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안락사 동행기
지금 쓰고 있는 스위스 안락사 동행기를 마치고 나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으려고 했는데 마음을 바꿔 엊그제부터 그 책을 펼쳤습니다. 오래전에 읽었을 때와 그 느낌이 확연히 다르네요. 그럴 수밖에 없겠지요. '죽어가는 사람'과 대화를 나눈 글이라는 점에서 저도 같은 경험을 한 후 다시 접하고 있으니까요.
저자는 열 네번의 화요일마다, 저는 3개월 간을 죽어가는 사람과 이야기했습니다. 의식의 방해없이 오롯하게 제 경험을 반추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책 읽기를 미뤄왔던 것인데, 원고를 반쯤 쓴 상태에서 글이 잘 나가지 않아 같은 일을 겪은 저자에게 슬쩍 다가가게 된 것입니다. 죽어가는 사람과 함께 했던 동지적 감정으로.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저자미치 앨봄출판살림발매2017.06.16.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과 지금 제가 쓰고 있는 글('마이클과 함께 한 3개월'이라고 해 두죠, 돌아가신 분의 영어이름이 마이클이니)은 너무나 닮았습니다. 제가 표절하는 중이란 뜻이 아니라 죽어가는 사람의 가르침은 동일하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도 여전히 살아가는 사람, 살아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러나 죽음의 경계에 아주 바싹 마주 서 있다는 점에서 우리와는 다릅니다. 전쟁으로 치면 그들은 최전방에 배치된 병사이고 우리는 후방에, 일반 사회에 속해 있달까요. 하늘 아래 있다는 점에서는 같아도 존재가 서 있는 지점은, 실존적 상황은 사뭇 다릅니다.
김보선 / speculation 2008
가장 깨어있는 삶, 가장 높은 수준의 삶을 살고자 한다면 죽음만큼 효과적이며 충격적인 자극은 없습니다. 삶의 가장 훌륭한 스승은 죽음이니까요. 지금 내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소소하고 하찮고 자잘한 것인지 죽음만이 확실히 깨우쳐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깨우쳐 주는 게 아니라 순식간에 앗아가 버리지요.
그래서 죽음은 완전한 무(無)이자 두려운 것이란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스승이 아니라 원수일테죠.
죽음이란 최고의 스승이 가르치는 과목은 단 하나, '사랑'입니다. 사랑만이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죽음이 곧 사랑을 일깨운다는 뜻입니다.
죽음은 죽음보다 더 깊었던 무지에서 우리를 깨어나게 합니다. 그 무지란 사랑하는 능력을 그냥 묻어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스위스를 다녀오기 전까지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도, 사랑받아 본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건 그저 서로의 필요와 욕구에 따른 거래였고 타협이었고 불순한 이기심이었고, 그나마 순수하다고 해봤자 본능이자 호기심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사랑이란 '전 존재를 거는 일'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관심사나 이기적 욕구와는 아무 상관 없이 그저 나를 내어주는 일이라는 걸 깨달아 갑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냐구요? 죽음을 통해서! 아, 이 말은 틀렸습니다. 저도 아직 죽어본 적은 없으니까요. '죽어가는 사람을 통해서'로 정정할게요.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에서 모리 교수가 미치에게 사랑의 의미를 깨우쳐 주듯이 마이클과 함께한 3개월에서 마이클도 저에게 사랑이 이긴다고, 언제나 사랑이 이긴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마음을 나눌 사랑이 있는가? 지역사회를 위해 뭔가를 하고 있나? 내면은 평화로운가? 최대한 인간답게 살려고 애쓰고 있나?
이것이 죽어 간 모리와 마이클이 제게, 우리들에게 묻는 말입니다.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묻고 있다는 점에서 죽음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핵심이 바로 이건 거죠.
말씀드렸듯이 마이클은 제 글의 오랜 독자였고, 호주 시드니의 같은 이방인이었으며, 문학과 철학을 사랑한 외로운 영혼이었습니다.
언감생심 저는 O. 헨리의 단편소설 『마지막 잎새』의 늙은 화가처럼, 제가 그의 곁에 있음으로써 그의 시한부 삶을 붙드는 가녀린 끈이 될 수 있을까 했지만 그건 단지 저의 착각이자 희망사항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스스로 생의 마지막 잎새가 되어 유유히 떨어졌고 세상이란 무대의 이면으로 표표히 사라졌습니다.
돌이켜 보면 누가 누구에게 위안이 되었는지 부끄러운 생각마저 듭니다. 죽음이 삶에게 말을 걸고 가르침을 주듯이 그는 제게 그런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저는 별다른 존재가 아니었을 겁니다. 삶 쪽에서 죽음 쪽으로 줄 수 있는 건 별로 없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