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엄마를 돌보다_4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것

by eunho

새해 들어 결심한 것이 하나 있다면(둘도 있고, 셋도 있지만)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일본 영화를 좋아하고 가끔 여행을 가기 때문에 그 나라의 언어에 호기심이 일었다. 재미 위주로 이어가 보자 생각해 이번엔 유튜브에서 회화 위주의 강의를 찾아 듣고 있다. '해커스'의 '요오기 센세'가 재미있어 여행 가서의 상황을 떠올려 보며 언어를 배우고 있다. 강의를 보다 보면 쇼츠 같은 것에서 그 나라 일상생활에서는 사용해서는 안 되는 말들도 알려주고는 한다. 애인이라든가 헬스라든가. 남자, 여자라고 읽는 우리의 한자어는 일본어로는 단시, 조시라고 각각 읽는다. 남자 여자라고 읽히는 한자어에 추가되는 발음을 새로 외워야 하는 기분이랄까.

부모님이 지근거리에 살게 되면서 나는 친정식구들의 언어 사용법을 배우고 있다.

아버지의 옷이 낡아 보여 새 옷을 사다 드리면, 왜 새 옷을 사 왔느냐고 아버지는 나를 타박하신다. 중학생 아들 아이의 옷이 작아져 체구가 작은 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리면 왜 헌 옷을 주느냐고 타박을 하신다. 거개의 많은 일들은 그렇게 타박을 맞는다.


얼마 전 새해맞이 온 가족이 고깃집에 고기를 구워 먹고 우리 집으로 와 차를 마셨다. 아버지는 난생 처음으로 식구들이 다 둘러앉은 저녁상에서 소주 한 병을 비우셨다. 목소리가 높아지고 모든 일에 토를 다셨다. 우리는 술이라고는 마실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 아버지의 그런 흥에 동화가 되지 않았다. 큰언니는 미간을 찡그렸다. 집으로 와서도 아버지의 흥은 끊이지 않았는데, 사위가 노래 한 곡 하시라며 건넨 뒤집개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우리 세 자매는 1차 충격. 작은 눈들이 홉떠졌다.

사위는 패드에서 유튜브 노래방 곡을 찾아내 아버지가 일러준 ‘가는 세월 그 누구가~’와 ‘사랑은 아무나 하나’를 틀어 드렸다. 그 티브이 드라마에서나 보던, ‘한 박자 쉬고, 또 한 박자 쉬고’의 주인공이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가사를 보기 위한 버릇 때문인지 너무도 자연스럽게 한 박자씩 쉬면서 노래를 부르셨다.

내 어릴 적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집에 들어와 어머니와 다투시거나 전화기를 붙잡고 누군가와 싸우고는 하셨다. 한 번도 저렇게 기분 좋게 노래를 부르시거나 농담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날 그런 아버지를 보는 엄마의 표정은 싫으시다는 건지, 좋으시다는 건지 속내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 뒤로 아직 못 뵈었으니 나중에 가서 넌지시 물어볼 예정이다.)


남편은 아버지가 얼마나 고향을 떠나 친구가 그리웠겠냐며 저렇게 술 드시고 기분 좋게 있으시니 보기 좋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진심은 술을 드셔야 나오는 걸까? 예전에 고향집에서 아버지는 술을 드셔야 속엣말을 하고는 했다. 보통은 좋지 않은 말이었다. 술을 드시고는 큰언니에게 내가 면세로 사다 드린 담배보루들을 두고 ‘나보고 일찍 죽으라는 말이냐’고 하셨다고 했다. 선물이든 물건이든 보내드리면 그렇게 부정적인 말을 덧씌우셨다. 술을 드시면 나오는 진심엔 자식에 대한 사랑도, 아버지로서의 무책임했던 모습에 대한 자책도, 아직은 자식에게 기대고 싶지 않은 복합적인 마음들도 있으실 테지만 아직은 아버지의 언어를 잘 모르겠다. 아직은.


엄마는 돈 좀 그만 쓰라고, 뭘 좀 그만 사라고 급기야는 화를 내고 난리를 치고 해서 신발 가게에서 그냥 쫓기듯 나온 적도, 옷 가게 문 앞에서 몸싸움(?)을 벌인 적도 많았는데, 몇 년 사이, 특히 이곳으로 오시고 나서는 사다 드린 옷도 턱턱 걸치시고, 좋아하시는 추어탕도 이 집은 어떻다, 저 집은 어떻다 평가도 하시고, 병원에 갔다가 함께 먹을 점심 메뉴도 먼저 생각해 말씀하신다. 엄마의 언어는 확실히 ‘싫다’는 기표에 ‘좋다’는 기의가 깔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던 큰언니는?

12월 30일은 언니의 생일.

이틀 전부터 자기 생일날 매제랑 조카까지 오는 건 싫다, 그런 파티는 질색이다고 난리 난리 치더니 영어로 본인의 이름을 축하메시지와 함께 새긴 케이크에, 엄마 아버지 나 동생까지 네 식구 모여 노래 부르고 손뼉 쳐 주며 축하해 주자

“나 이런 거 생전 처음이야”라고 한다. 엄마, 아버지께 용돈도 받고 우리에게 선물도 받더니 일상의 반은 늘 어두운 그 얼굴에 아이 같은 웃음이 핀다.

남편은 우리 식구들의 말을(가끔은 나마저도) 도통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한다. 나는 남편 마음을 잘 알겠다.

다음 날, 언니의 카카오톡 프로필 배경 화면은 아무것도 없던 기본 페이지에서, 토끼(언니는 토끼띠다)가 살포시 수면 위로 올라오며 ‘SPRING’이라는 글자가 반짝이는 바탕 화면으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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