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엄마를 돌보다_5

마음의 각도

by eunho

아침에 아이를 등교시킨 뒤 집으로 향하는 길에 차도 옆 인도에서 어떤 아주머니 손에 이끌려 걸어가는 네댓 살의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하늘색 점퍼에 모자를 쓰고 있었고, 모자에는 하얗고 복슬복슬한 털이 둘러 있었다. 같이 걷는 모습에 시선이 갔던 이유는 아이의 걸음걸이 때문. 아이의 팔을(손이 아닌) 잡은 아주머니는 허리를 꼿꼿이 편 채 걸어가지만, 아이는 좁은 시야와 좁은 보폭 때문에 거의 끌려가다시피 가파르게 뛰는 모습 이어 나는 어느새 ‘끌끌’, 혀를 차고 있었다.


아이의 나이에 비해 아주머니는 연세가 있어 보였다. ‘그렇다면 할머니일까, 아니면 아이의 등하교에 도움을 주는 분일까’를 추측했다.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가까이 가서 ‘아주머니 왜 아이를 이렇게 끌다시피 가시냐?’고 묻기엔 애매모호한 지점이 있었다.

두 사람의 합이 그런대로 잘 맞고 있다는 것. 둘만의 리듬이 있어 위태위태해 보이는 것은 나만의 시각이고 둘은 내가 지켜본 4-50여 미터 동안에도 넘어지지 않고 잘만 가더라는 것.

나는 입맛을 쩝 다시며(동네 맘카페에 한 번 올려볼까도 생각했지만 확실하지도 않은 상황에 확실할 후폭풍을 생각하며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차했던 차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100여 미터 이동해 건널목을 지나가는데 이번에도 자연스레 행인에게 시선이 향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의 미소 띤 재잘거림에, 옆에 있던 남자가 허리를 한껏 숙여 귀를 대었기 때문에. ‘저이는 아빠겠지?’라고 자연스럽게 생각이 드는 것은 그이의 ‘한껏 숙임’ 때문이었으리라.


뻣뻣함. 굽히지 않음. 귀를 기울이지 않음. 헤아리지 않음.


일전에 탐라에서 본 어느 모녀의 에피소드 하나.

자신이 아기의 기저귀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으며 배변 여부를 확인하자, 이를 본 자신의 엄마가 ‘나도 늙으면 그렇게 해 줄 수 있어?’라고 웃으며 물었다고. 글쓴이는 뭔가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지만.


아이를 키우며 내가 느끼게 된 것은

‘아이고 어머님, 그런 것은 인생에 물으셔야죠….’라는 생각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정말 옆구리를 푹푹 찔러야 나오는 것이지, 그렇게 몸과 마음이 합일하여 무의식적으로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이제, 복잡미묘한 감정법을 구사하지 못하신다.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의 결을 표현하지 못하신다. 대화나 글의 행간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행동의 이면을 잘 읽지 못하신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엄마의 체내에는 약물의 농도가 일정 정도 머물러야 하고, 그것은 엄마의 지력과 관찰력을 쇠퇴시키고 흐르는 세월과 함께 점점 사라지게 만든다. 어린아이와 같은 엄마의 모습에 우리는 허리를 숙여 귀를 기울이고,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어디를 가든 함께 간다. 엄마의 모습은 아이와 같을 때가 있고, 우리는 그런 모습이 귀엽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동시에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안다. 그렇게 되어버린 엄마의 모습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엄마에게로 한껏 숙이게 만든다.


아픈 저를 위해 병원에서 한 시간 대기를 하고, 진료 후 차에서 쉬고 있으라고 한 뒤, 이 식당 저 식당 들러 먹고 싶다는 음식을 바리바리 싸 들고 온 엄마의 드라이브 스루 커피 한 잔도 마땅치 않아 하는 아이를 보며(자신은 배가 몹시 고픈 상태) 나는 화가 나지만, 사춘기 아이의 그런 뻣뻣함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어금니를 지그시 물며 ‘사랑은 노력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고 보면 나는 아직 먼 것이다. 미간도 찌푸리지 말고 심드렁하게 콧노래를 부르며 아이가 그러거나 말거나 내 라떼를 챙겼어야 했는데.


어쨌든 언젠가는 아이도 볼 수 있게 되겠지. 삶을 살아가며 보게 되는 그런 기울기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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