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진사 댁 셋째 딸

by eunho

네 명 중 세 번째. 그 넷 중 막내만 남자아이인 집안에서의 셋째 딸.

맏딸은 살림 밑천, 첫 정이라 이뻐하고, 둘째는 욕심 많고 자기 것 잘 챙길 줄 알아 이쁨 받고, 막내는 아들이 귀한 집에서 남자 아이라 엄마로부터 전폭적인 애정을 받고. 그런 집안에서 셋째의 삶은 어땠을까.

욕심 많은 둘째 언니한테 많은 것 빼앗기고, 심부름당하고(?), 군기 잡는 첫째 언니에게 걸핏하면 혼나고, 한 살 터울 남동생은 만만하다며 자꾸 기어오르고... 어릴 적 셋째인 내 동생의 신산스러운 삶(?)을 생각해보면 철이 든 나는 눈물이 앞서고는 했다.


어머님의 간암 확진 소식을 들은 날, 셋째인 내 동생의 수술 소식도 함께 들었는데 가까이 살고 있던 나는 별달리 해줄 게 없었다. 나쁜 소식은 자력이 있는 것인지 어머님의 간암시술만으로도 힘들 시기에 아이가 아프기 시작했다. 동생은 고향에 있던 큰 언니를 불렀고, 4박 5일 그리고 퇴원 후 큰 언니가 내려 간 3주여 동안 보살핌 없이 혼자 요양해야 했다.


그 시기, 동생을 잘 아는 사람들이 동생의 안부를 조심스레 물어 올 때면..

나는 자조적으로

“걔는 뭐 명함도 못 내밀죠... ”

동생 또한 심적으로 힘든 언니의 사정을 잘 안다는 듯

“나는 신경 쓰지 마, 조용히 찌그러져 있을게..”


스트레스가 많이 쌓일 수밖에 없는 직업 특성 탓인지, 동생의 동료들이 줄줄이 동생과 같은 질환이 있고, 줄 서서 수술을 받는 현실 이어 동생은 미루고 미룬 끝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점이 되어서야 이 날을 받았을 터인데. 언제나 셋째여서 설움 받던 그 마(?)는 나이가 들어서도 잦아들지 않는 것인지 동생은 가까이 사는 혈육인 나에게서조차 세 번째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


그럼에도 동생을 권 진사 댁 셋째 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렇게 손가락 새로 흐르는 사랑을 받고 커서도 효녀 노릇을 톡톡히 하기 때문. 첫째, 둘째 언니 제치고 엄마, 아빠에게 애틋하고, 하나뿐인 조카에게도 찐 친이기 때문.


어머님은 평소 사돈처녀를 무척 이뻐하셨고, 동생을 위해 주야로 기도하시고, 만날 때마다 덕담을 해주시며, 늘 자주 놀러 오라고, 언니를 힘들게 해 미안하다고, 고맙다는 말을 아끼지 않으셨다.


어머님의 간암 확진 소식을 듣고, 동생은 백오십만 원이 든 통장을 내놓았다. 원래는 어머님의 좋은 날 위해 따로 마련을 해 둔 돈이라고 했는데...


도대체 왜? 어떻게 이런 날이 올 줄을 알고?


그러고도 고가인 간암 시술인 방사선 색전술 비용을 위해 자진하여 무이자로 천만 원을 빌려 주었으니...

인간실격에 나온 류준열이 자신과 친했던 정우형의 장례비를 내라며 정우형의 친누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돈 있는 곳에 마음 있다”는 말.


딱 들어맞는 말은 아닐지언정 나는 동생이 그 돈을 어떻게 모았는지 알고 있다.

동생은 재테크하고는 인연이 멀어 동생이 집을 사면 집값은 오르지 않고, 동생이 집을 판 순간 집값이 오르는 기현상이 일어났었다. 동생은 주식 호황의 끝물 무렵에 시장에 뛰어들어 날마다 날마다 푸른 신호등(?)을 보고 있다고 했다.


이렇게 재테크에는 마이너스의 손인 동생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십 오분 거리를 걸어서 출퇴근 한 뒤 한 달의 여비를 따로 통장에 이름을 붙여 마련하여 두고, 마트에서는 십원 단위로 물건을 비교하여 구매하며, 내가 가져다주는 간식거리나 반찬들 외에는 소비를 아꼈고, 내가 입던 옷이나 가방, 내가 선물한 옷으로 계절을 났다. 지지리 궁상이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이런 아날로그적 저축왕인 동생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에게 선뜻 내어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권 진사 댁 셋째 딸, 어느 집의 첫째, 막내며느리가 되면 운명에서 벗어나려나 싶어 좋은 인연을 가끔 꿈꿔 보지만, 이제는 시간이 흘러 그 바람마저 요원해졌다.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런 동생에게 결혼이란, K-3녀의 구조적 억압과 수탈의 시스템이 결혼이라는 제도로 옮아가 반복될 뿐이라는 비관론을 내릴 수 밖에 없을 지 몰라도,-


어쨌든 어머님과 동생은 긴 시간 동안 서로에게 애정과 관심을 주고 받았다. 두 사람은 며느리인 내가 보기에도 다정했고, 좋았다. 사돈 어르신과 사돈 처녀가 아닌, 나와 함께 살기에 함께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억지 사이가 아닌, 세대를 넘어선 진심의 관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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