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d, 쉼을 찾아서 길을 떠난다는 논센스
4월 말, 그러니까 작품이 끝난 지 한 달쯤 될 무렵, 무슨 바람이 들긴 들었나 보다. 그냥 가고 싶었다. 어디로든. 아침 열 시 이십 분, 태안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이것저것 챙긴 가방은 무거웠고, 날은 흐렸다. 다만 오랜만에 나서보는 아침 공기가 좋았다. 가는 길엔 깬 상태로 뭔가를 보면서 갔던 것 같다. 기대감이 왠지 없었다. 꽤 긴 기간 쉬었지만 피곤한 나날들이었고, 그래서 왠지 고요할 것 같은 태안으로 행선지를 정했던 것 같다.
터미널에 도착했고, 담배를 한 대 태웠고, 차량 렌트 시간은 좀 남아 있던 터라 롯데리아에서 버거를 먹었다. 희한하게 지방 터미널 근처에는 항상 롯데리아가 있다. 무심히 차를 탔고, 무심히 길을 달렸다. 차가 많지 않아 한적했고, 비가 오기 시작했다.
방포 해수욕장이라는 작은 해변에 도착했다. 숙소를 지나치는 바람에 해변에 잠깐 차를 대고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새 비는 그쳤고, 아저씨 한 두 사람이 바닷가를 거닐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의 안내로 숙소에 짐을 풀었다. 1층의 방은 작았지만 침대가 없어 깔끔했고, 테이블과 벤치가 놓인 작은 포치에는 재떨이용 뚝배기가 놓여 있었다. 허리와 목에 디스크의 기억을 안고 있는 나는 바닥에서 잠을 청하기 힘들다. 숙소를 급하게 정하느라 침대의 부재를 확인하지 못해 처음 방에 들어갔을 때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매트가 있어, 4개의 1인용 매트(군대 훈련소 매트 사이즈였다.)를 두 개씩 쌓아 그나마 잘 만한 침대를 만들었다. 방 앞 해송 사이로 바람과 함께 파도소리가 불어왔다.
방에 잠깐 누워있는데, 국토대장정을 하는 것인지 청소년 수십 명이 줄지어 해변가를 지나갔다. 빛 보지 못한 나의 첫 영화에서 (감독이 편집을 포기해서 추억만 남았다.) 남녀 주인공들은 '노을 원정대'라는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데, 이들이 그 '노을 원정대' 이려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슬며시 들었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괜찮은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기분 전환은 필요했고 먹을 것도 살 겸 차를 끌고 나섰다. 그나마 숙소에서 가까운 꽃지 해수욕장에 가서 한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크로플을 먹으며 오늘은 생각은 좀 덜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두어 시간 앉아있었다. 해 지는 것을 가만히 기다리려니 좀이 쑤시던 중 “일박이일”에서 본 일몰 명소가 태안에 있었던 것이 생각나 그곳으로 향했다.
해가 기울며 날은 추웠고, 오들오들 떨면서 방송에서 본 일몰 스폿을 찾았다. 승언리 바닷가의 꽃지 할미 할아비 바위 앞에 조성된 산책로에는 사람보다 갈매기가 월등히 많았고, 사람을 위해 마련해 놓은 담수에 갈매기들은 몸을 씻고 있었다. 배들이 항구로 들어오는 모습이 꽤나 멋있었고, 다만 구름이 많아 일몰이 장려하지는 않겠다, 생각했다. 추위가 몸에 스며들었고, 결국은 차 안이 가장 편하겠거니 하며 마침 배도 고프겠다 칼국수를 먹으러 떠났다.
칼국수 집에는 단체로 온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두 테이블 정도 있었고, 칼국수에는 바지락이 많았다. 배불리 크게 기억에 남지 않을 식사를 끝냈다.
운전을 하며 숙소로 가던 중 N에게 전화가 왔다. 인생의 공백기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그에게 어느 정도의 공감과 연민을 느꼈고, 그리 감흥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기에, 내 여행에 1박 2일 정도 얹히고 싶다는 그를 거절하지 못했다. 다음날, 나의 여행은 조금 더 번잡해질 터였지만 N의 본성적인 활기가 색채를 더해주려나 싶기도 했다.
덧.
심신에 힘이 하나도 없을 때에도 여행은 떠나게 되는 게 신기하다. 기대도, 큰 감동도 없이 끝난 하루였지만 왜 왔을까 후회되지는 않았다. 어쨌든 만나게 된 고요와 한적함에 기분 좋게 하품 몇 번 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