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시리즈 9 (9)
익숙한 것들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자연스럽게 오가던 이웃의 인사, 골목을 채우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버스 안에서 아무 의식 없이 섞이던 억양들. 그 모든 소리들은 내가 속해 있던 세계의 배경음악이었다. 그 배경음이 멈춘 뒤에야, 나는 그것들이 얼마나 깊숙이 내 일상에 스며들어 있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처음 낯선 땅에 발을 내디뎠을 때, 세상은 지나치게 또렷해서 오히려 멀게 느껴졌다. 토론토의 거리에는 다양한 언어가 섞여 있었고, 사람들의 말투는 친절했지만 쉽게 가까워지지 않았다. 풍경은 분명 현실인데도 사진처럼 평면적으로 다가왔다. 문 하나만 열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 것 같았지만, 그 안에서 나는 오히려 작아지고 조심스러워졌다. 익숙함이 무너진 자리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 다시 묻게 되었다.
이민 초기의 나는 늘 연습 중인 사람이었다. 특히 아이들 학교에서 담임교사와 상담이 있는 날이면 마음이 더 분주해졌다. 교실 문 앞에 서기 전, 나는 머릿속에서 문장을 수십 번 고쳐 썼다.
“이 표현이 정확할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오해 없이 전할 수 있을까.”
영어를 아주 못했던 것은 아니지만, 내 아이의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받아야 하는 자리에서는 작은 뉘앙스 하나까지도 신경이 쓰였다. 마음은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만큼 더 굳어지고 위축되는 순간도 많았다. 상담을 마치고 나오면 온몸의 힘이 빠졌고, 집에 돌아와 한동안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매번 그 문 앞에 섰다. 부모로서, 엄마로서, 그리고 이곳에서 살아가야 하는 한 사람으로서 물러설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의 나는 불안했고, 그 불안 속에서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상실은 늘 예고 없이 찾아왔다. 감히 비교가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수십 년 살아오다 사고로 삶의 제약을 겪는 것처럼, 나는 익숙한 언어를 잃고, 익숙한 표정을 잃고, 익숙한 관계를 잃었다. 어느 순간에는 익숙했던 ‘나’마저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서의 나는 자연스러웠고,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나는 매번 나를 설명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때로는 그 설명조차 제대로 닿지 않았다. 나는 다시 처음이 되었고, 다시 배워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상실의 시간은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분명히 말할 수 없던 시기였다. 말이 느려진 내가 싫었고, 설명해야만 이해받는 상황들이 지쳤다. 그렇게 스스로를 한 발 물러서게 되던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나를 다시 세워보기 시작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으로 한 문장을 꺼내보고, 틀려도 끝까지 말을 마쳐보고, 이해받지 못해도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는 연습을 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변화도 없는 하루들이었지만, 그 안에서 나는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다루고 있었다.
그 작은 연습들이 쌓이면서, 무너진 자리는 다시 설 수 있는 공간이 되었고, 나는 그 위에 천천히 나를 올려놓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는 아무 일도 아닐 순간들이었지만, 그때의 나에게는 알에서 새로 깨어난 것처럼 분명한 성취였다. 그 작은 성공들이, 무너진 자리 위에 다시 설 수 있는 발판이 되어주었다.
시간이 흐르며 이 도시의 계절이 몸에 익기 시작했다. 긴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이 오듯, 내 안에도 변화가 생겼다. 익숙함을 잃은 자리에 공백이 생겼고, 그 공백은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움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그 감정들 사이로 아주 미세한 희망이 스며들었다. 나는 깨달았다. 익숙함이 사라진 자리는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를 들일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한국에서의 나는 안정된 울타리 안에서 안심을 찾던 사람이었다. 반면 캐나다에서의 나는 불안 속에서도 중심을 잡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 누군가의 시선에 덜 흔들리고, 낯설고 더디 가는 내 속도를 인정하는 법을 익혔다.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해도, 완벽하지 않은 나로 서 있어도 괜찮다는 감각이 조금씩 생겨났다. 익숙함이 무너진 자리에서, 나는 나를 다시 세우는 연습을 해왔다.
그 과정에서 문장과 언어만이 아니라, 내 마음과 관계까지도 다시 배우게 되었다. 상실은 분명 나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 흔들림 덕분에 나는 새로운 균형을 찾을 수 있었다. 여전히 서툰 순간은 있다. 가끔은 말이 막히고, 설명이 길어지고, 마음이 먼저 움츠러들 때도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그 순간이 나를 무너뜨리지는 않는다. 나는 다시 일어서 본 사람이고, 다시 세워 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안다. 익숙함을 잃는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나를 다시 만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조용히 속삭인다.
“잃은 만큼, 나는 더 많은 것을 얻었다.”
그 문장은 여전히 내 마음 한편에 남아, 다음 날을 살아갈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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