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곳에서 피어난 나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시리즈 9 (10)

by 이민자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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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은 단순히 나라를 옮기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알던 세상을, 그리고 내가 알던 나 자신을 처음부터 다시 써 내려가는 긴 여정이었다.


처음 캐나다에 도착했을 때, 모든 것이 낯설었다. 언어와 문화, 사회와 제도, 교육과 의료 시스템까지. 거리의 풍경과 공기의 냄새, 사람들의 눈빛, 그리고 그 안에 서 있는 나 자신마저도. 익숙했던 세계에서 벗어난 나는, 마치 껍질을 잃은 씨앗처럼 어디에 뿌리내려야 할지 몰라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두려움이었고, 동시에 새로운 환경을 받아들이기 위한 몸의 반응이기도 했다.


나는 늘 조심스러웠다. 영어를 전혀 몰라서가 아니라, 알고 있던 언어를 이곳의 방식으로 다시 사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식당에서 주문을 할 때도, 이웃과 인사를 나눌 때도 나는 말의 정확성보다 톤과 속도, 그리고 보이지 않는 거리감을 먼저 가늠했다. 문법은 맞았지만 마음이 제대로 전해졌는지는 늘 확신할 수 없었다. 대화가 끝난 뒤면 혼자서 장면을 되짚으며 혹시 놓친 표정이나 숨결은 없었는지 곱씹곤 했다. 작은 차이 하나가 오해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벽이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다음 날이면 다시 말을 걸었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물러서지 않고. 그렇게 사람과 언어 사이의 간격을 몸으로 익히며 나는 이곳의 리듬에 조금씩 스며들었다. 확신보다는 용기로, 완벽함보다는 지속으로. 어쩌면 그 반복이 이민자의 하루였을지도 모른다.


이곳에서의 삶은 끝없는 적응의 연속이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로 배워야 할 규칙이 생겼고, 사람들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나만의 호흡을 조절해야 했다. 낯선 언어 속에서 내 마음을 설명하기 위해 말뿐 아니라 손짓과 눈빛, 침묵까지 동원해야 했다. 때로는 설명보다 기다림이 더 정확한 언어가 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전혀 다른 나를 만나고 있었다. 한국에서의 내가 안정된 울타리 안에서 안심을 찾던 사람이었다면, 이곳에서의 나는 불안 속에서도 중심을 잡는 법을 배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누군가의 시선에 쉽게 흔들리기보다, 내 안의 목소리를 먼저 듣는 사람이 되어 갔다. 이민은 나를 약하게 만들기보다, 내가 무엇으로 버틸 수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게 했다.


낯선 땅에서 살아간다는 건 매일 조금씩 다시 태어나는 일이었다. 기존의 나를 단번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필요 없는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며 새로운 나를 길러내는 과정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아팠고, 때로는 눈물이 났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내 안에는 아주 작지만 단단한 무언가가 남았다.


그 씨앗 같은 감각은 내가 이곳에서 버틴 시간의 증거였다. 어느 날 버스 창가에 앉아 가을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이제 이 풍경이 낯설지 않다.’ 그 순간, 이곳은 더 이상 내가 지나가는 장소가 아니라 머무는 삶의 자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는 정체성을 다시 그리는 일을 반복해 왔다. 한국에서의 나, 이민자로서의 나,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살아가는 나. 그 각각의 나는 충돌하고 겹치며 내 안에서 새로운 균형을 찾아갔다. 아이들을 키우며 부모로서의 역할을 배웠고, 중년의 나이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 칼리지와 대학을 졸업하며 배움의 의미를 새로 정의했다. 실패와 지연, 관계 속의 오해와 문화적 어긋남은 모두 나를 현실적이면서도 단단한 사람으로 만드는 조각이 되었다.


지금 나는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다양한 이민자들의 삶을 만난다. 그들의 불안과 망설임 속에서 과거의 나를 발견하고, 그들이 내딛는 작은 한 걸음에서 내가 걸어온 시간을 떠올린다. 나의 이민은 더 이상 개인적인 서사가 아니라, 타인의 삶을 이해하는 감각이 되었다. 이곳에서 길을 찾는 법을 배운 나는, 이제 누군가의 길을 함께 비춰주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시간이 흐르며 나는 알게 되었다. 익숙함을 잃는다는 것이 단순한 상실이 아니라, 내 안에 새로운 공간을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그 공간에는 두려움과 외로움, 그리움과 아주 작은 희망이 차곡차곡 쌓였다. 그 감정들이 서로 부딪히며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아이들을 위해 이곳에 왔고, 이제는 남편과 둘이 남아 둘만의 시간을 겹겹이 쌓아가고 있다. 아이들은 각자의 삶을 따라 영국으로, 미국으로, 그리고 토론토에서 살아간다. 더 이상 매일 돌볼 필요는 없지만, 여전히 마음 한편에는 우리 아이들이 남긴 흔적이 남아 있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는 비어 있지만, 그 빈자리는 실패가 아니라 잘 키워 보냈다는 안도로 채워져 있다.


해마다 American robin들이 우리 집 현관 옆에 둥지를 튼다. 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들이 자라고, 어느 순간 모두 날아가면 그들은 미련 없이 자리를 비운다. 그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이곳이 아이들의 출발점이었음을, 그리고 지금은 남편과 내가 조용히 남아 이 둥지를 지키고 있음을 실감한다. 떠남과 머묾이 동시에 가능한 자리, 그곳이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다.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 어딘가에서, 나는 이 땅에 뿌리내린 존재가 되었다.
오늘도 나는 조용히 속삭인다.


“이 낯선 땅에서 나는 나를 찾았고,
이제는 떠나보낼 줄 아는 사람으로,
지금도 천천히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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