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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쉼터에서 배우다

<이민자의 마음으로 봉사하다:작은 손길, 큰 울림> 시리즈 6 (4)

by 이민자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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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제작 도움: ChatGPT (AI 이미지 생성)


문이 잠기는 소리조차,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신호였다.


대학 2학년이던 어느 날, 나는 폭력 피해 여성과 젠더 다양성을 가진 사람들을 지원하는 전문 기관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그곳의 법률 상담과 통역, 주거 지원 업무는
누군가의 ‘안전한 삶’을 지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방패처럼 작동하고 있었다.


내 역할은 변호사를 보조하는 사무 업무였지만,
책상 위 서류와 컴퓨터 화면 너머로 전해지는 진실은
날마다 내 마음에 소리 없는 큰 파도로 밀려왔다.
센터를 찾는 여성들뿐 아니라,
함께 온 아이들의 조심스러운 눈빛도 깊은 상처를 말하고 있었다.
나 역시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기에
그 눈빛은 결코 가볍게 지나칠 수 없었다.




안전은 선택이 아니라 권리


이 기관의 출입 절차는 어느 곳보다 철저했다.
카드를 갖고 있어도 문은 바로 열리지 않았고,
반드시 리셉션 직원의 확인을 거쳐야만 출입이 허용됐다.
누군가의 남편, 부모, 혹은 가족이 갑자기 들이닥칠 위험까지 계산된 구조였다.


그 장면을 지켜보며 나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곳에서 안전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는 권리다.”


그 문장은 지금도 내 안에 묵직하게 남아
내가 어떤 공간을 ‘안전한 곳’이라 느껴왔는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눈물이 닿을 수 있는 자리


그곳에서 봉사하며 배운 것이 있다.
사회복지와 법률 지원은 단순히 제도를 연결하는 일만으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이 마련되어야
제도는 비로소 제 역할을 한다.


숨기지 않아도 되는 눈물,
그 눈물을 조용히 지켜봐 주는 누군가의 존재,
그리고 함께 흘려주는 작은 떨림.
그 연결이 한 사람의 삶을 끌어올리는 진짜 힘이었다.


캐나다의 복지 시스템은 잘 갖춰져 있었지만,
그 혜택이 실제 필요한 이들에게 닿기 위해서는
섬세한 관리와 진심 어린 관심이 반드시 필요했다.
결국 제도를 움직이는 것은 사람의 마음과 노력이었다.




작은 신호를 놓치지 않는 일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피해 여성들의 미세한 표정 변화,
떨리는 손끝,
말하지 못하고 삼키는 두려움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문서 한 장을 건네는 순간에도
그들의 눈빛과 목소리의 떨림을 확인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천천히 깨달았다.
“돕는다는 것은 무엇을 ‘주는’ 일이 아니라,
옆에서 함께 ‘서주는’ 일이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단순한 봉사 경험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삶에 조용히 닿아,
그 마음의 온도를 함께 느끼며 호흡하는 법을 배운 시간이었다.




주거 지원이 갖는 진짜 의미


특히 깊게 남은 것은 ‘주거 지원’이었다.
폭력 피해 여성은 집을 떠나는 순간
삶의 기반 대부분을 잃게 된다.
그 공백은 말 그대로 존재 자체의 위험으로 이어진다.


정부 아파트는 긴 대기가 필요했지만,
여성 쉼터와 저소득층 주택 프로그램은
그들의 몸과 마음을 지켜주는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었다.


한 번은 아기의 손을 꼭 잡고 있던 한 여성이
조용히 내게 물었다.
“오늘 밤은… 무섭지 않을까요?”


그 질문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안전한 공간이 없다는 것은, 삶 전체가 흔들린다는 뜻이었다.




조용히 귀 기울이는 용기


그곳에서 웃음이 가득했던 날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웃음이 있어도 웃어서는 안 되는 순간이 많았다.
그들의 고통과 두려움은 너무 현실적이었고,
내 손짓 하나, 표정 하나까지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나는 더 깊이 귀 기울이기로 했다.
더 섬세하게, 더 조용하게, 그러나 더 진심으로.


안전한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가장 조용한 형태의 용기였다.


그곳에서 만난 여성들과 아이들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오늘도 다시 다짐한다.


보이지 않는 상처에도 마음을 기울이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작은 신호 하나, 작은 연결 하나를 결코 놓치지 않겠다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 곁에 가만히 서주는 일.


그것이 내가 배운 가장 큰 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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