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위에 피어난 이민자의 인연

<우리 부부의 캐나다 일상> 시리즈 7(8)

by 이민자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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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의 밥상에는 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는 마음, 멀리 떨어진 땅에서 서로를 챙기며 살아가는 정성, 그리고 그 밥상 위에서 조용히 피어나는 인연들. 한국에서는 너무도 당연했던 음식과 사람의 온기가, 이곳 캐나다에서는 한 끼의 식사만으로도 더 귀하고 깊게 다가온다. 밥상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자리가 아니라, 이민자의 삶을 버티게 하는 작은 중심이 된다.


남편에게는 캐나다에서 알게 된 골프 멤버들이 있다. 그중 한 형님은 매년 한 번씩 멤버들을 집으로 초대해 바비큐 파티를 연다. 각자의 삶에 바쁜 이민자들에게, 이렇게 정해진 약속으로 만나는 식사는 더욱 특별하다. 멀리서 가족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함께 먹는 한 끼는 안부를 대신하고 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 된다. 올해도 우리 부부는 그 초대를 받았다.


남편이 무심히 말했다. “형수가 중국분이니, 한국 반찬은 따로 없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심을 끝내고 있었다. 이민자의 밥상에 한국의 맛을 더하는 일. 그것은 내가 가장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손맛으로 담아낸 작은 한국


텃밭에서 딴 깻잎으로 담근 장아찌, 아삭한 고추와 양파, 손이 많이 가는 김치들. 하나하나 용기에 담으며 나는 생각했다. 이 반찬들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오래 몸에 밴 시간과 마음의 조각이라는 것을. 누군가의 식탁에 한국의 맛을 얹는다는 건, 잠시나마 그들을 고향의 기억에 데려다주는 일과도 닮아 있었다.


우리가 가장 먼저 도착했을 때, 형님 댁은 분주하면서도 어딘가 비어 있었다. 갈비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지만, 밥은 아직 지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형님 부인은 회사 일정으로 밴쿠버에 다녀오는 길이었고, 비행기 연착으로 도착이 늦어진다는 연락이 왔다. 이민자의 삶에서 이런 어긋남은 낯설지 않다. 늘 누군가는 늦고, 늘 어떤 자리는 비어 있다.


나는 자연스럽게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으로 향했다. 낯선 집의 찬장을 열어 쌀을 찾고, 밥솥을 꺼내 쌀을 씻었다. 물에 잠긴 쌀알을 바라보며 문득 마음이 가라앉았다. 이민자의 삶에서 ‘밥을 짓는 일’은 요리가 아니라, 마음을 놓는 행위라는 걸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밥 짓는 손길, 마음이 놓이는 순간


고소한 밥 냄새가 부엌에 퍼질 즈음, 손님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형님은 마당에서 갈비를 굽기 시작했고, 나는 준비해온 반찬들을 접시에 정갈하게 담아 테이블 위에 올렸다. 갓 지은 따뜻한 밥 한 공기와 함께.


“이 반찬은 어디서 사셨어요?” “와, 정말 맛있네요.”


반찬을 맛보며 건네는 말들 속에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여 있었다. 그때 남편의 어깨가 슬쩍 올라가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그 모습이 괜히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작은 정성이 누군가의 하루를 환하게 만드는 순간, 밥상 위에는 설명할 수 없는 온기가 피어난다.


다른 문화 속에서 반평생 가까이 살아왔어도, 음식 앞에서는 모두 같은 표정을 짓는다. 익숙한 맛 하나가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고, 서로를 조금 더 가깝게 만든다. 형님의 정성 어린 갈비와 내가 준비한 반찬들은 그렇게 하나의 밥상이 되어, 그날의 시간을 천천히 채워갔다.


밥상 위에서 피어난 인연의 온도


고기를 구워 먹으며 우리는 이민 생활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캐나다에 왔을 때의 서툰 영어, 길을 헤매던 기억, 가족과의 거리, 그리고 그 속에서 새로 만들어진 인연들. 웃음이 오가고, 공감이 이어졌다. 한동안 모두가 아이처럼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각자의 고단함이 잠시 내려앉아 있었다.


식사가 끝났을 때도 형님 부인은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나는 조용히 설거지를 시작했다. 손님으로 초대받은 자리였지만, 그날의 설거지는 부담이 아니라 마음을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다. 접시는 대부분 비워졌고, 김치만 조금 남아 있었다.


설거지를 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민자의 삶은 어쩌면 늘 ‘누군가의 빈자리’를 채워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멀리 있는 가족의 자리, 고향의 자리, 익숙했던 문화의 자리. 우리는 그 빈자리를 음식과 정성, 그리고 말없이 건네는 손길로 채워가며 살아간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부부의 대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이 말했다. “오늘 네가 반찬 안 가져왔으면 어쩔 뻔했어.”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야. 김치가 없었으면 밥이 안 넘어갔을걸.”


남편은 말없이 내 손을 잡았다. 그 손길 속에는 고마움과 신뢰, 그리고 함께 살아온 시간의 온도가 담겨 있었다. 이민자의 삶이 아무리 낯설고 고단해도, 이렇게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느껴졌다.


음식, 마음, 그리고 사랑


음식은 배를 채우지만, 사람의 손길과 마음은 서로의 삶을 채운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음식과 정성으로 사람들을 잇는 순간이 있기에 우리는 고향을 완전히 잃지 않는다. 장바구니 속, 부엌 안, 식탁 위에서 오가는 작은 손길들이 우리의 삶을 조금 더 단단하고 따뜻하게 만든다.


이민자의 밥상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다리이며, 말없이 마음을 건네는 통로다. 밥상 위에 피어난 정성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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