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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미 May 01. 2022

조용한 절간에 자판기가 들어왔다.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싱그러운 5월. 잔디밭은 소풍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딸아이의 손을 잡고 머그잔에 그림 그리기 체험부스에 쭈뼛거리며 자리를 잡았다. 잠시 망설여졌다. 주변만 두리번거렸고, 이게 뭐라고~ 미세하게 감정이 떨려왔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미술관이 된 폐교는 온통 푸른 나무와 선명한 빛깔의 꽃들, 건물을 휘감은 담쟁이, 사람들로 어우러져 눈이 부시다.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아무것도 떠올려지지 않아 작아져만 갔다.  

    

한참을 망설이다. 용기를 내어 붓을 들었다. 파란색 점을 찍기로 했다. 파란색 도트가 질서 있게 그려진 하얀 컵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어린 딸도 가만히 나를 따라 도트를 그리기 시작했다. 

     

붓이란 녀석은 내 말은 안 듣고 제 멋대로다. 줄이 삐뚤어지고 있는데, 이미 그리기 시작한 그림을 중간에 그만둘 수도 없다. 끈기 있게 점을 그렸고, 마음에 안 들어 중간중간 꽃무늬를 그려 넣었다. 이런~ 사고를 쳤네! 이건 아니다.       


조악한 솜씨를 속상해하며 뚱한 표정으로 그림을 완성해갈 때쯤 어디선가 나이가 가늠이 안 되는 안경을 코에 걸친 화가가 나타났다.   


딸아이의 머그잔을 좌우로 빙글빙글 돌리던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음~ 아주 잘했어. 색감도 좋은데, 어디서 배웠나? 파란색 도트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옅어지네. 일부러 이렇게 한 거야? 아주 좋아! 손잡이도 독특하게 잘했어요.”   

   

딸아이가 칭찬을 받으니 뿌듯했다. 어떤 말을 내게 해주실까? 내심 기대하는 마음으로 서있는데 지나치듯 무심히 한마디 하시는 것이었다.  

   

“엄마 컵은 조용한 절간에 자판기가 들어왔구먼!”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미소를 띠며 살짝 웃었지만, 당장이라도 자리를 피해 도망가고 싶었다. 어떤 의도도 없는 정직한 비평이라는 걸 알면서도 부끄러웠다. 그 부끄러움을 꾸욱 눌러 마음 한편으로 밀어내고 딸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참을 딸아이가 그린 컵을 바라보았다.  

    

“감사하네. 좋다! 엄마보다 좋은 평가를 들어서”      


유약을 발라 잘 구워져 나온 컵은 딸아이 것과는 다르게 색감이 탁했다. 더러워진 물에 빤 붓과 팔레트에 남아있던 누군가 쓰던 물감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사용해서 인듯했다. 그때 알았다. 적은 물을 사용하더라도 깨끗한 물을 써야 한다는 것과 색이 바뀔 때는 붓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물감은 아끼지 말고 충분히 짜서 내 것은 내 것에만 써야 한다는 것을....

  

아끼는 버릇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습관을 가진 것은 좋은 것이다. 그런 습관 때문에 내 것이 아닌 것을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것도 또한,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에는 아낌없이 낭비할 줄도 알아야 더 좋은 작품이 나온다. 때로는 맘껏 이기적이어야 하고, 좀 더 수고로워야 한다는 걸 진작에 알았더라면 더러운 물에 붓을 찍어, 남은 물감을 사용하진 않았을 테니까   


배우지 않은 것을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다. 처음의 결과물은 진짜 실력이 아니다. 글로 치면 초고, 미술 작품으로 치면 선긋기 정도일 뿐이다. 실력은 수없는 반복을 통해 쌓이고 오랜 시간을 지나 빚어져 나오는 것이다. 천재가 아니어서 속상한 게 아니라면 굳이 아무것에도 풀 죽어 있을 필요는 없다. 중요한 사실을 배운 기회가 되었을 뿐이다.


모든 이야기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도 없다. 그 분야에 깊이 들어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더욱 그렇다. 내 전공도 아닌 분야에 대한 비평은 살짝 무시해도 된다.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불과할 뿐이다.     

작은 흥분, 작은 실수, 작은 실패는 우리의 근본적인 신념을 위태롭게 하지도,
우리 삶을 변화시키지도 않습니다.
그것들은 단지 이따금씩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들에 불과합니다.

'시도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없다'-지그 지글러 -


여러 날이 지나도 잿빛 머릿결의 예술가의 말이 자꾸만 마음속을 헤집었다. 순수했던 그분의 비평이 기분 나빠서가 아니었다.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는데 속상했다.


머그잔을 볼 때마다 마음 한쪽이 저릿하게 아파왔지만 한동안 억지를 부리듯 그 컵을 사용했다. 비평에 초연 해지는 연습을 하자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잘해도, 못해도 누군가의 말에 흔들리는 날이 있으리라. 그런 날들을 위한 연습이다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점점 더 불편하고 힘들었다. 일주일이 채 안되어 컵을 버렸다. 아픈 나를 마주 하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

매 순간 거기 서서 확인 사살을 할 필요는 없다.

  

우리 집 선반엔 딸아이가 그림을 그린 머그잔만 깨끗하게 씻어져 엎어져 있고, 나는 늘 그 컵을 사용한다. 제일 좋아하는 컵이다. 도트를 보면서 딸아이의 눈망울을 떠올리고, 도트를 그려 넣던 그 맑고 천진한 모습을 떠올린다. 좋았던 기억을 더 깊이 새기고, 기쁜 마음으로 미소 짓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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