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4용기 한 장에 빼곡하게 엄마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쓰고 병원을 빠져나오며 그간 있었던 일이 곱씹어졌습니다.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거슬러 거슬러 과거로 더 어린 시절로 가기도 했습니다.
눈이 많이 내렸던 겨울, 일주일 간격으로 엄마는 오른손, 나는 왼손 손목이 골절되어 깁스를 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이 끝날 무렵 다쳤던 터라 곧 개학을 했고 엄마는 나를 친구 집으로 보냈습니다.
거실에 가방을 내려놓는 나를 친구 아버지는 빤히 쳐다보셨습니다. 어쩌다 다쳤냐는 표정으로요. 그러더니 이리 와보라며 나를 부르셨습니다. 석고 깁스엔 낙서를 해야 빨리 낫는다면서요. 시키는 대로 팔을 앞으로 내밀었고 목사님이셨던 친구 아버지는 굵은 사인펜을 들어 깁스에 글을 쓰셨습니다. 첫 번째 낙서였죠. 내심 기대를 했습니다. 축복의 메시지를 써주실게 분명하니까요.
“라 져 러 부 나 리 머 질 성 된 못”
“못된 성질 머리나 뚝 부러져라.”
“목사님, 아~~ 뭐예요.”
순간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내가 못돼 보이나?’ 생각했습니다. 한 번도 내가 못됐다고 생각해보지 않았으니까요
팔이 부러진 엄마는 매일 아침 오렌지 주스를 마셨습니다. 오렌지 주스는 왜 자꾸 마시냐고 물으니 누군가 팔 부러진데 오렌지 주스가 좋다고 했다는군요. 매일 아침 주스 뚜껑을 열어달라는 엄마의 부탁을 귀찮아했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냥 안고 돌려서 열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던 게 문득 생각났습니다. 못된 성질 머리가 속에 알 박혀 있었던 게 분명하네요.
어디 그뿐일까요. 거짓말도 가끔 했고 사춘기 소녀일 때는 말대답 꼬박꼬박 했고 우기기 선수였습니다. 고분고분한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한 성질 머리했고요. 게다가 엄마의 관심 어린 시선도 싫어했습니다.
이상 증세를 보이는 낯선 엄마를 모시고 교회에 갔던 날도 그랬습니다. 목사님께 기도를 받으러 교회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어쩐 일인지 예배당에 들어가는 걸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억지로 설득하진 않았습니다. 엄마는 먼 데 떠나는 사람 같았고 소통은 이어졌다 끊어졌다를 반복했거든요. 빈껍데기 같은 사람을 주장하는 일은 자꾸 난관에 부딪혀서 힘들었습니다.
마침 마당에 나오신 목사님을 만났을 때 기분이 생생합니다. 엄마를 돕겠다는 마음과 존경하는 사람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드려야 하는 수치심이 뒤섞여 기분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잘 보이고 싶고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은 대상이었거든요. 그동안 예배 참석 잘하고 봉사를 하면서 그럴듯하게 나를 포장해 왔는데 지금 상황은 꾸미지 않은 민낯 그대로라 당황스러웠습니다.
과거는 없는 사람처럼 살고 싶었거든요. 가난하고 힘없는 부모, 치매와 더불어 정신 이상 증상을 보이는 부모는 숨겨놓고 잘 사는 척, 문제없는 척하고 싶었거든요. 목사님뿐 아니라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행여 이런 모습을 누가 볼까 두려워 평일인데도 주변을 살폈습니다.
내면 깊은 곳에 깔린 마음을 뚫고 용기 낸 건 가상한 일이었지만, 더 나아갈 만큼 용기 있는 건 아니었나 봅니다. 안 들어가려 버티는 엄마를 억지로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고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말씀드린 후 황급히 교회를 빠져나왔습니다. 다른 좋은 날이 있을 거라 생각하면서요. 그러나 그런 날은 영영 오지 않았습니다. 나를 자책했습니다.
부모 속 끓이는 사춘기를 보낸 딸이었다고, 부모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아이가 이었다고 해서 엄마에게 일어난 일이 내 잘못은 아니지만 내가 잘못한 것 같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선하고 바른 생각만 한 건 아니라고 해서, 용기가 부족하고 더 많이 돕지 못했다고 해서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내 탓은 아니지만, 내 탓을 했습니다. 몰라서였고 나도 아팠지만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내 안에 결핍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