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작가 본인의 소설 '극악 연쇄간살마로 회귀했다'를 연재하면서 쓴 글입니다. 해당 소설 설정에도 동일한 글을 올렸는데, 이후에도 비슷한 장르의 혐오소설을 몇 개 더 쓸 것 같아 조아라 '웹소설 쓰는 법'에도 올렸고 브런치스토리에도 올립니다.)
평소 제 소설과 달리 약간 유식한 척 코스프레 하면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물론 비속어도 많이 씁니다.
장 폴 사르트르가 '지식인을 위한 변명'을 세상에 투척한 이래, '~변명' 류의 글이 꽤 유행했었습니다. 이 유교탈레반 뷔페미 씹선비 환장코스프레의 나라에서도 그런 유행이 있었습니다.
예전 정운영 교수님이 '마르크스경제학을 위한 변명'을 쓰셨었고, 그 외 많은 지식인들이 자기합리화(?)를 위해 '~변명'을 붙이곤 했었죠. 진중권인지 유시민인지 모르겠지만 소위 '논객'이라는 사람 중 누군가도 그런 글을 썼던 것 같습니다.
(* 정확히 번역한다면 '변명'보다는 '반론' 내지 '반박'으로 번역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의 원제목은 'Plaidoyer pour les intellectuels'(쁠레도이예 뿌르 레 젱뗄렉뛰엘)이고, 여기서 plaidoyer는 주로 법원에서의 변론/반론을 지칭하는 단어거든요. 국내 번역될 때 '변명'이라고 해서 뭔가 잘못한 게 많은 사람들이 주저리주저리 읊어대는 듯한 느낌이 되었지만, 원래는 꽤 당당하게 반론 펴는 내용입니다.)
오늘 제가 변명하려는 것은 '혐오소설'입니다. 말 그대로 혐오스러운 주제를 다루는 소설이죠.
근친, 수간, 강간살인, 미성년물, 인종차별물, '확X찢' 등등... 현실의 더러운 것들을 늘어놓고 전개 방식도 가급적 현실에 가깝게 전개하는 소설. 이걸 '혐오소설'이라 하겠습니다.
당연한 얘긴데, 혐오소설은 잘 안 팔립니다. 특히 사이다패스가 넘쳐나는 21세기 헬조선 웹소설계에서는 더더욱 안 팔립니다. (물론 근친 주제로 야스 쓰면 좀 팔립니다만 그건 혐오테마 아닌 다른 이유로 팔리는 거니 논외로 하고) '사이다'가 대세인 웹소설에서 '혐오감 일으키는 현실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으면 바로 선삭비 내립니다.
(사이다물도 주제만 놓고 보면 위 혐오소설 주제를 상당 부분 커버합니다만, 이야기 전개 방식에서는 현실의 혐오를 씹어버립니다. 혐오감정, 좌절, 내적 갈등을 최소화하고 '주인공의 최대 정복'을 목표로 하는 이상 현실을 적당히 편집해 둬야겠죠.)
(* 며칠 전 발생한 싸이코패스 살인사건 때문에 혐오소설 장르에 대한 또다른 문제제기가 있습니다만, 이 부분은 아래에서 따로 다루겠습니다.)
혐오주제를 상세히 다루기 시작하면 '고구마'가 됩니다. 현실의 답답한 문제들을 늘어놓고 거기에 짓눌린 사람들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반격하다가 무기력하게 찌그러지는 모습. 그 모습들을 현실에 가까운 방식으로 다루는 혐오소설은 곧장 고구마 급행열차를 타게 됩니다.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웹소설은 가볍게 시간 때우는 스낵컬처 문화이고, 그 짧은 시간 동안 독자에게 작은 즐거움을 선사해야 하며, 그로 인해 '사이다'가 필수요소로 자리잡았죠. 답답한 현실을 상세히 늘어놓게 되면 그 자체로 '고구마'입니다.
굳이 소설로 강조하지 않아도 이 현실에 혐오가 넘쳐나고, 좌절이 넘쳐납니다. 힘겨운 삶이 겹겹이 쌓여 있습니다. 굳이 소설로 읽지 않아도 다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현실이 고구마라고 해서, 웹소설이 스낵컬처라고 해서, 독자님들 대다수가 '현실과 동떨어진 사이다'를 원한다고 해서.
모든 작가가 사이다물을 써야 하나요?
당연히 아닙니다. 그런 법칙 따윈 없습니다. 고구마 100개 먹어서 금방 숨 막혀 죽을 것 같은 소설, 1주일 동안 응가 참았다가 팔뚝만큼 두꺼워진 변비 같은 소설, 그런 소설들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 글 쓰는 사람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경제적 성공'만 내려놓으면 고구마 100개짜리 소설 마음대로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모든 소설이 다 깨끗하게맑게자신있게 좋은 주제만 다뤄야 하나요?
이것도 당연히 아닙니다. 순수문학에서도 그딴 '좋은 글로 세상을 잘 이끌어야 한다구욧 웅앵웅'은 이미 19세기 말 계몽문학 이후로 순삭당한 헛소리고, 21세기 웹소설에서는 '다 썰어버리고 다 따묵따묵하고 아무튼 내가 킹왕짱이야!'라는 콘텐츠가 상업적으로 유효합니다. 좋은 주제만 다룰 이유 전혀 없죠.
경제적 성공 내려놓고. 계몽문학 시절의 좋은 주제 웅앵웅 헛소리도 내려놓고. '현실 그대로의 혐오'를 다룬다는 것. 그 혐오에 뒤따르는 현실의 분노, 짓눌린 자의 좌절까지 가급적 상세하게 다룬다는 것.
이건 웹소설 작가의 권리입니다. 고구마 100개 먹은 것 같은 답답한 현실, 그 현실에서 폭발하는 인간 내면의 거칠고 어둡고 흉폭한 욕망. 그 날것 그대로의 혐오를 상상력으로 부풀려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서브컬쳐 창작자의 특권'입니다.
웹소설 작가들은 '건전한 사회상식' 따위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19금 마크 달고 시작한 이상 표현의 범위에 제한을 둘 필요도 없으며, 이미 하꼬작가인 이상 딱히 각각의 작품에 경제적 성과를 기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인간 본성 그 자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날것의 욕망을 글자로 표현하면 그만입니다.
PC주의? 조까세요. 흑돔공주 눈 사이에 강펀치 들어가는 수가 있습니다.
유교탈레반 효도? 효도르 이단옆차기나 처맞으세요.
페미니즘? 조까세요. ㅈㅈ가 없어서 조까지 못하면 다른 걸 까세요. 아니, 확 찢어버리세요.
지식인 코스프레 하는 지식권력집단? 니들 창자색깔 확인시켜 드릴게. 자기 눈으로 창자 모양 확인하는 게 니 인생 마지막 지식이 될 거야.
가능합니다. '혐오문학',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낮에는 정상생활 멀쩡히 잘 한 뒤 밤에 혼자 컴터 앞에 앉아 극한의 폭력을 상상하고 표현하는 것, 그 또한 헌법이 보장하는 '표현의 자유'입니다.
물론, 누군가는 이렇게 말씀하시겠죠. "혐오표현 가능하긴 한데 난 안 봐. 난 깨끗하게맑게자신있게 살고 싶어."
네, 좋습니다. 그 또한 정상입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말씀하시겠죠. "사이다도 혐오표현의 왜곡된 형태라고 하지만 좀 다르잖아. 상상 속에서 마음대로 하고 그걸로 스트레스 푸는 게 사이다물의 본질이야. 현실 배경으로 사람 창자 뽑아서 줄넘기 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아."
네, 그것도 좋습니다. 당연히 정상입니다.
다만, 누군가 "혐오소설이라니 끔찍해욧! 상상 속에서라도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욧! 누가 그거 보고 따라할까봐 무서워욧!" 이라고 떠든다면...
이건 정신병입니다. 현실과 소설을 구분 못할 정도로 저렴한 본인의 능지수준으로 온 세상의 멀쩡한 사람들을 옭아묶으려는 병림픽입니다.
이런 병림픽을 PC주의 / (뷔)페미니즘 / 유교탈레반 따위로 포장해서 정상인들을 괴롭히려 한다면,
그 정신병자들부터 먼저 죽여야겠죠. 정신병 걸린 사람도 창자 색깔은 일반인과 동일하다는 걸 인생 마지막으로 확인시켜 줘야 합니다. 물론 소설 속에서요.
그런 소설이 나왔는데도 정신병자들 창자가 여전히 멀쩡하다면, "소설을 비롯한 창작물이 정상인들 오염시켜서 성범죄 등이 증가한다구욧 빼애애액!' 주장이 개소리라는 걸 입증하게 되겠죠?
(물론 저들은 그 입증논리 자체를 이해 못하는 처참능지 보유자들이라 계속 똑같은 짓 하겠지만 그것까지 고쳐 줄 수 없겠네요.)
약간 과격한 표현으로 흘렀습니다만 다시 처음 컨셉(약간 유식한 척 코스프레하겠다는 컨셉)으로 돌아가서.
혐오소설. 현실의 가장 지저분하고 불쾌한 지점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그걸 읽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겠다는 소설. 고구마100개 먹고 변비 걸린 것처럼 괴롭게 만들겠다는 소설.
미국의 소설가 '필립 로스'는 자신의 소설을 불편해 하는 사람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역겨운 책을 쓰는 것은 역겨워지려는 것이 아니라 역겨운 것을 재현하려는 것이며, 자신의 모든 수완으로 역겨운 것을 드러내려는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보이는지 또 정확히 무엇인지 밝히려는 것이다.”
뭐, 저는 필립 로스가 아닙니다. 혐오를 혐오 그대로 담아낼 수는 있어도 그걸 문학적 표현으로 멋들어지게 재구성할 만한 능력은 없습니다. 노벨문학상 빼고 다 섭렵했던 미국 현대소설의 거장에 비하면 필력이 많이 딸립니다.
다만, '역겨운 것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고 그걸 드러내며 어떻게 보이는지 / 정확히 무엇인지 밝히려는 노력'은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혐오소설을 씁니다.
비겁한 지식인들, 내로남불 정치인들, 권리만 챙겨먹으려는 뷔페미들, 본인 배때지는 영원히 안전할 거라 착각하면서 범죄자 교화는 사회 전체가 책임지라고 악악대는 인권충들. 그들에 대한 증오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 합니다.
먼 옛날 '육식동물'이었고 그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우리 인간들, 그 본연의 욕망이 날것 그대로 폭발하는 순간을 가능한 한 정확히 밝히려 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고,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요. 필립 로스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헬조선에서 현실로 일어나는 일들을 재구성하는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요.
이상, [혐오소설을 위한 변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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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는 여기까지만 쓰려고 했었는데... 최근 현실에서 극악 살인사건이 발생하여 조금 덧붙입니다.
무슨 사건인지 대략 짐작하실 겁니다. 겉보기에는 그리 흉악하지 않은 20대 초반 여성이 자기 또래 여성을 살해하고 그 시체를 토막내 유기하려다 걸린 사건. '정유정 살인사건'입니다.
우선, 이 사건의 피해자 분과 그 유가족 분들에 대해 개인적으로 동정과 연민 느끼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구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흉악범죄가 발생하면 그 원인을 분석하고 재발방지대책을 마련하는 것 또한 당연한 일입니다. 특히 이번 사건처럼 '묻지마 살인'의 형태라면 더더욱 필요하죠.
그런데 말입니다.
이 원인분석 과정에서 항상 따라오는 헛소리가 있습니다. '문화콘텐츠도 주요 원인이에욧 빼애애액!'.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이번 사건에서도 연탄까스처럼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죠. 피의자 정유정이 평소 범죄물을 즐겨 시청했다는 발언 나오자마자 무슨 교수 간판 단 사람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문화콘텐츠 공격 시작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과거 조현병 환자 '안인득'의 묻지마 살인 때에는 '조현병 환자 중 살인까지 나가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조현병에 대한 차별의식 버리세요. 제 옆집에는 조현병 환자가 살지 않지만 님 옆집에 사는 조현병 환자는 너그러이 받아들이십시오. 허허허.' 라고 떠들던 지식인들이 만만한 문화콘텐츠에 대해서는 빼애액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인과 그 가족들이 안전하다는 전제 하에서 씹선비 코스프레 하는 것들이죠. 이건 뭐 이번 주제와는 큰 관련이 없으니 제 소설에서만 다루겠습니다.)
[문화콘텐츠가 흉악범죄의 원인이다. 그러니까 때려잡자. 아청법에 2D 소녀 인권보호 하듯이 문화콘텐츠 전반에 가상캐릭터 인권보호 걸어야 한다!] 는 주장.
늘 그렇듯이, 선동은 문장 몇 개로 가능하지만 그걸 반박하려면 몇십 장의 증거가 필요하고 또 그 증거를 모았을 때에는 이미 선동하는 쪽이 그 이익을 얻고 빤쓰런으로 사라집니다. 즉, 선동하는 쪽이 유리하죠.
우리 웹소설을 비롯한 각종 문화콘텐츠에 대한 공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공격하는 측은 '저질 영화 드라마 만화 소설 때문에 정신병자들이 늘어나 사람이 죽었어욧 빼애애액!' 이거 한 마디면 끝. 창작자들이 그거 반박한다고 머리 싸매는 동안 선동가들은 교수/시민운동가/정치인 등등 직함을 얻고 정부세금 기부금 쫙쫙 빨아먹으면서 눈누난나 잘 살아가다가 반박 끝나면 아몰랑. 그렇게 될 겁니다.
이번 살인사건에서도 문화콘텐츠 공격하려는 교수 및 자칭 지식인들(씹선비들)은 이걸 자기 이름 알리는 기회로 활용할 겁니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무슨 교수가 그럴려고 준비중인 것 같네요. 의도대로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뭐 반박해 봐야 큰 의미는 없지만, 굳이 반박한다면 다음 두 가지 정도는 지적하고 싶네요.
(1) 내 소설에서 씹선비 지식인들 창자 뽑아서 목도리 둘러 주고 있는데 니들 다 살아 있다. 문화콘텐츠 영향 없는 거 증명됐네?
(2) '폭력적 콘텐츠'가 문제라면 징집군인들은 어떨티비? 18개월 이상 갇힌 상태로 '견적필살' 외치면서 살인기술 연마하고 사회로 방사(?)된 징집군인들은 폭력콘텐츠에 오염되어서 한평생 싸이코패스로 살겠네? 이거 어쩔거임?
아몰랑 선동 들어오든 말든 저는 혐오소설 씁니다. 위 필립 로스의 말 다시 한 번 인용하면서요.
“어떤 사람이 역겨운 책을 쓰는 것은 역겨워지려는 것이 아니라 역겨운 것을 재현하려는 것이며, 자신의 모든 수완으로 역겨운 것을 드러내려는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보이는지 또 정확히 무엇인지 밝히려는 것이다.”
정말 오조오억분의1 정도 확률로 제 혐오소설을 본 사람 중 1인이 묻지마 살인 펼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도 씁니다. 어차피 제 소설이 살인마에게 미친 영향은 애널에 묻은 똥가루만큼도 안 되거든요. 그 살인마에게 정상생활의 기회를 차단하고 살인기회를 줬던 사회구조, 그 사회구조에서 혜택 쫙쫙 빨아먹으며 '범죄자도 인권이 있다구욧 빼애애액!'을 시전하던 자칭 지식인 씹선비들의 잘못에 비하면 오조오억분의1도 안 되거든요.
제 소설 영향이 적다는 건 누가 증명하냐구요? 아몰랑.
선동은 한 줄, 반박은 몇십 장. 내가 먼저 선동할 테니 니들 씹선비들이 잘 반박해 봐. 미러링 당하니까 기분 더럽냐? 그게 딱 우리 창작자들 기분이었어. 잘 해보슈.
혐오소설은 계속됩니다. 역겨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노력, 계속 할 겁니다.
왜 하냐구요? 할 수 있으니까요. 산이 있기에 올라간다는 말처럼, 저에게 글쓰기 본능이 있고 글 쓸 수 있으니까요.
그것뿐입니다.
긴 변명, 아니 반론(反論). 이상 끝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