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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조작하는 민족에게는 현재도 없다 (상)

독립군과 광복군에 대한 개인적 의견

by 테서스

<이 글은 대략 8개월 전에 써 놨었다가 지금 올립니다. 제가 올리는 글 중 상당수가 작성시점과 등록시점에 차이가 있다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1. 서론


한 때 이 나라에 유행하던 말이 있었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뭐 대다수 격언들이 그러하듯 저 문장 자체에는 참/거짓을 판단할 기준이 없고 그저 특정 사고방식을 강조하는 표현일 뿐입니다. 맞냐 틀리냐를 떠나 그냥 설득할 수 있느냐 / 없느냐 여부를 따질 뿐이죠.


그리고 앞의 다른 글에서 썼듯이, 모든 설득은 문장 자체만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솔선수범하지 않는 인간이 말로만 그럴싸하게 떠들어 봐야 쥐뿔 설득력 없어요. 조두순이 아동보호 외치거나 고유정이 생명존중 외치는 꼴일 뿐입니다.


역사를 잊은 민족 어쩌고 떠들면서 사실은 '선동'만 하고 있을 때. 역사를 잊지 말자고 하면서 환단고기 급 헛소리를 늘어놓을 때. 좌/우를 가리지 않고 역사를 자기 마음대로 왜곡하며 정당한 반박에 귀를 닫는 잡것들이 목소리를 높일 때.


그런 잡것들한테는 따끔하게 한 마디 해 줘야 합니다. "역사를 조작하는 민족에게는 현재도 없다."고 일갈해 줘야 합니다.


역사는 일단 사실 그대로 정리해야 하고 또한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설픈 국뽕에 취해 사소한 사실을 부풀려서도 안 되고, 또 특정 의도를 가지고서 실제 있었던 사실을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역사를 조작하는 인간이 있다면 그런 인간은 현재를 삭제시켜 줘야 합니다.


역사조작질을 시도하는 인간들은 언제나/어디에나 있어 왔고 또 조작 시도는 과거 여러 시점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한국사를 안 배웠다면 이런 조작질 하든 말든 안물안궁으로 넘어갈 수 있겠지만, 전 국민이 한국사를 의무적으로 배우고 공무원 시험에 반영되면서 더더욱 팩트(Fact)가 강조되는 나라에서는 역사조작질을 용납하기 어렵겠죠?


다양하게 할 말이 많습니다만, 오늘은 '독립군과 광복군'에 대해서만 정리할까 합니다. 뭐 제가 한국사를 전공한 사람은 아니므로 진짜 제대로 된 전공자들보다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헛소리 지껄이는 역사조작러들에게 휘둘리지 않고 좌/우 놀이 따위에 정신 팔리지 않는 수준까지는 정리해 보려 합니다.


서론이 길었네요. 본론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1) 독립군의 시작과 전성기

(2) 독립군을 위한 변명 : `20년대 후반과 `30년대의 대혼란

(3) 공산주의 아래에서 '독립'은 의미 없다

(4) 그러나 반일(反日) 무장투쟁은 그 자체로 중요하다

(5) 광복군도 중요하지만... 숫자가 부족한 건 인정하자

(6) 어설픈 국뽕질은 넣어둬 넣어둬

(7) 각자의 판단


순서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2. 본론


(1) 독립군의 시작과 전성기


1909년 고좆 황제가 나라를 팔아치웠습니다. 매국노 이완용이 강압적으로 윽박질렀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고좆 본인이 문제의 원인이었죠.


군인들한테 1년 넘게 녹봉을 지급하지 않다가 나중에 썩은 쌀과 모래를 주면서 임오군란 터지게 만들었고 그 와중에 임금이라는 작자는 모르쇠로 일관하며 아들 결혼식에 국가재정의 1/5인가 되는 돈을 낭비한 것에 더해 썩어빠진 탐관오리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전혀 안 했던 것,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대 끌어들이고 동학농민운동 때에도 청나라 끌어들였으며 그 와중에 고좆 나름대로는 견제와 균형 맞춘답시고 일본군 끌어들인 게 청일전쟁을 거치며 일본세력의 확장을 유도했다는 것,

너무 커진 일본세력이 고좆의 아내였던 중전 민씨를 살해하고 다니는데도 찍 소리 못 하다가 이완용을 앞세운 일본에게 결국 나라를 통째로 넘겼다는 것.

이건 역사적 사실입니다. '내가 바로 조선의 국모다' 뭐 이딴 국뽕러쉬로 가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튼 고좆과 그 아들내미는 그렇게 앉은 채로 나라 팔아먹고 일본의 귀족 작위를 얻어서 잘 살아갔지만, 망국의 후예인 조선인들 중 상당수는 독립운동가로서 활동했고 또 무장투쟁을 전개했습니다. 1910년대에는 이러한 무장투쟁의 거점이 '만주'로 옮겨갔었겠죠.


이 만주의 무장투쟁운동이 '독립군'으로 재편되어 1920년대 초반까지 이어집니다. 우리가 배운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은 이 1920년대 초반에 기록된 승전(勝戰)이었습니다.



만주에서 10년 가량 잔뼈가 굵어졌고 주변 지리를 잘 알았으며 망국의 독립을 위해 젊은 날을 다 바친 베테랑 독립군 vs 만주의 지리를 잘 모르는 채 제국주의 정책에 따라 밀어붙이는 일제.

이 대결에서, 초창기에는 독립군 측이 우위를 점합니다. 백발백중의 사냥꾼 출신 대장 '홍범도 장군'이 봉오동에서 큰 승리를 거뒀고 / 독립군 세력 전체가 연합하며 총지휘를 맡았던 '김좌진 장군'은 청산리에서 대첩이라 불릴 만한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이 때가 독립군의 전성기였죠.


으음...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서론에서 썼듯이, 역사는 사실 그대로 정리해야 하고 또 그 사실을 제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이 그 자체로는 승리한 게 맞지만, 그렇다 해도 '숫자에 기반한 사실'을 체크하지 않고 넘어가서는 안 되겠죠.


숫자 체크.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우리 독립군들은 어느 정도의 일본군을 소탕했을까요?



제가 알기로 봉오동에서 사망한 일본군은 약 500명이었습니다. 청산리 대첩에서 사망한 일본군은 약 3300명인가 그랬을 겁니다.


그리고, 청산리 대첩 당시 '독립군 전체 연합'으로 모인 병력이 약 3500명이라고 합니다. 그 때 청산리 산골로 진격해 온 일본군은 약 5만명...


즉, 봉오동+청산리 전투 당시 만주에 있던 독립군은 약 3500명 전후였고 / 일본군은 최소 5만명 이상 동원되었습니다. 그 5만명의 일본군 중 4천명 조금 안 되는 인원이 사망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구요.


그럼 나머지 4만6천명의 일본군은 어디 갔을까요?



고대 냉병기 시대부터 근현대 시대까지 모두 마찬가진데, 패배한 군대라고 해서 군인이 다 죽는 게 아닙니다. 심지어 전멸(全滅)이라고 할 때에도 모두 다 죽는 게 아니에요. 냉병기 시절에는 전체 병력의 10%만 잃어도 대패(大敗)라고 했었고, 현대전에서도 병력의 30%가 죽거나 큰 부상을 당하면 해당 부대가 전멸된 것으로 간주합니다.


4천명 가까운 병력을 잃은 일본군이 큰 타격을 입은 건 사실입니다. 독립군 입장에서는 큰 승리였고 일본군 입장에서는 명백한 패배였어요. 봉오동~청산리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투에서는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만주 전체의 전략적 국면에서도 그러할까요?


아쉽게도 전혀 아닙니다. 산골짜기에 숨어들어 니가와 시전한 뒤 '전술적 측면에서의 승리'를 거둘 수는 있었겠지만, 광활한 만주벌판에서 일본군을 전면적으로 몰아내는 전략적 승리는 불가능했습니다. 독립군 개개인의 의지를 떠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어요.


일본이 만주에 괴뢰국가 만주국을 세운 게 1932년이라고 하는데, 1920년대에도 이미 만주 전체가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주 곳곳에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일본군에게 협조하는 현지인들도 많았겠죠. 3500명 규모의 조선독립군이 전략적인 승리를 거두고 거점을 확보한다는 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목표였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청산리 전투의 승리도 '대첩'이라고 부를 만한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독립군 역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술적 승리인 건 사실이지만 역으로 말하면 청산리 대첩보다 더 큰 규모의 전투도 없었고 그런 전투에서의 활약도 없었다는 겁니다. 연대~여단 규모의 승리 그 이상으로 보긴 어렵습니다.


일본 입장에서도 굳이 산 속을 헤매면서 게릴라 전술에 대응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전략적 거점을 확보하지 못하고 산으로 숨어들었다면... 그냥 고립시켜 버리면 끝입니다. 군인도 사람인 이상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산에만 숨어 있으면 식량이 떨어지거든요.


(일본소설 은하영웅전설 막판에는 굳이 이젤론 요새에 병력 꼬라박는 짓을 하지만, 실제로 한 나라의 군대를 움직이는 최고사령관이라면 이런 짓 안 합니다. 그나마 소설에서는 이젤론 요새 자체에 식량 및 군수물자를 보급하는 기능이라도 있지만 현실 지구의 산에는 그런 게 없어요. 산에서 못 나오게 막고 있기만 하면 알아서 무너집니다.)



그래도 1920년대 초반까지는 독립군의 군세가 나름 강하긴 했습니다. 이후 일본군이 봉쇄작전을 시전했을 것이고 버티다 못해 뿔뿔이 흩어지긴 했겠지만, 20년대 초반까지는 독립군이 몇 번 전술적 승리를 거두긴 했어요. 이 때가 전성기였습니다.


독립군의 짧은 전성기는 너무 짧게 끝나 버립니다. 시련의 시기가 시작되고... 각자 살 길을 찾아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2) 독립군을 위한 변명 : `20년대 후반과 `30년대의 대혼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이 끝나고 얼마 후. 3500명 규모의 독립군은 흩어졌던 것 같습니다. 나름 승리를 거뒀지만 결국 전체 대오를 유지하지 못하고 각 대장 별로 나뉘어졌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비전공자로서 정확한 내용은 모릅니다만, 대충 짐작하기에 결국 '보급'이 가장 큰 문제였을 겁니다. 식량 떨어지고 무기 조달 경로가 막히니 버틸 수가 없었겠죠.


당연한 얘기인데, 아무리 독립군이 사명감과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조직이라 해도 밥을 먹지 않으면 싸울 수가 없습니다. 아예 걸어다닐 수도 없어요. 밥 못 먹으면 다 굶어 죽습니다.


그리고, 군대는 무기를 계속 조달해야 합니다. 총알은 기본. 고장난 총기 부품과 대체품은 필수. 군복과 각종 비품은 거들 뿐. 여기에 '말'까지 운용한다고 하면 말이 먹을 건초까지 조달해야 합니다.


식량과 무기를 조달할 수 없는 군대는 더 이상 군대가 아닙니다. 이 물자들을 주변에서 직접 조달하기 시작하면... 그 군대는 '도적단'이 될 뿐이죠.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만주에서 고립된 독립군들은 결국 도적질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역사책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겠지만 당장 병사들이 며칠씩 굶고 있으면 약탈을 할 수 밖에 없어요. 고대 냉병기 시대에도 그랬고 현대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부 가상역사소설에서는 고좆이 따로 비자금 만들어 둔 걸로 독립군에게 지원했다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합니다만... 현실에서는 그딴거 없습니다. 일부 백성들이 열심히 돈 모아서 독립군에게 군자금 지원했다고는 하지만 그걸로도 병력을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 당시 독립군들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나라가 망하고 10년 넘게 천리타향 만주에서 야영하며 살아 온 독립군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 심정을 헤아려 봅시다.


1909년 경술국치 당시 20살이었던 신참이 어느새 30대 중년이 되었습니다(요즘은 30대가 청년이지만 20세기 초반에는 이미 중년 취급이었습니다). 40살이었던 대장은 50세가 넘어 노인 반열에 들어섰습니다. 불타는 애국심은 여전하겠지만 몸이 늙어버렸고,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찬바람을 맞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집니다.


개인의 영달을 버리고 나라를 되살리기 위해 한 몸 바치겠다고 맹세했건만... 10여 년의 시간 동안 나아지는 건 전혀 없고 일본의 기세만 더욱 더 강성해져 갑니다. 그나마 독립군이 활동할 여지가 있었던 만주에서도 일본의 세력권은 계속 넓어지고 독립군은 산악지방으로 쫓겨나고 있습니다.


이대로 있으면 당장 내일 먹을 식량을 구하기 위해 만주의 백성들을 약탈해야 합니다. 이미 약탈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나라를 구하겠다고 떨치고 일어선 사람들이 먹을 것조차 구하지 못해 도적떼가 되어야 하는 상황. 이것이 독립군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뭘 할 수 있을까요? 당신은 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독립군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3500명의 병력을 그대로 유지할 수도 없었고, 각자 대장을 따라 흩어진다고 해도 그들 모두가 하나의 길로 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조선 독립군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세력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나마 우호적인 세력이라면... (이후 소련이 되는) '공산주의 러시아' 뿐.



이 때 당시 세계는 대공황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1차대전의 승전국이었던 미국 영국 프랑스 모두 '제 코가 석 자'인 상황이었고, 당장 자기 나라의 실업자들을 구제하는 것도 버거웠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 (세계사와 한국사를 연결시키지 못하는 저능지 소유자가 아닌 한 다 생각해 낼 수 있는 사실인데) 당시 일본은 1차대전의 승전국이었습니다. 즉, 미국 영국 프랑스 등등이 모두 일본과 같은 편이었고 서로 친했습니다.


즉, 당시 조선 독립군이 미국 영국 프랑스의 도움을 얻는다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대공황을 거치면서 계속 군국주의 확장 노선을 취했던 일본이 나치독일과 친해지면서 추축국으로 넘어간 1930년대 중반경이라면 몰라도, 1920년대 중후반 시기에 '일본과 싸워 독립할 테니 1차대전 승전국 님들 도와 주세요! 승전국 님들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의 뒤통수를 뽜앟 후려갈겨 주세요!'를 시전하는 건 애당초 현실을 모르는 발상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조선 독립군들이 (포기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다음 셋 중 하나였습니다.


1) 공산국가가 된 지 얼마 안 되는 러시아로 갈 것인가

2) 아직 혼란스러운 중국으로 가서 당시 미약한 수준이었던 중국공산당과 함께 할 것인가

3) 역시 혼란스러운 중국으로 가되, 제 코가 석 자인 중국국민당과 함께 할 것인가


20년대 초중반의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조선 독립군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특히 장제스의 국민당은 30년대 후반 ~ 40년대 초반까지도 관심이 없었어요. 공산당의 세력이 커지고 그 와중에 일본과 맞서다 보니 조선 무장세력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 뿐입니다.


무장투쟁을 계속하고 싶었다면 1)번 러시아를 선택하는 게 가장 나았습니다. 당시의 조선 독립군들은 그렇게 판단할 수 밖에 없었어요. 매우 확실한 신념이 있다면 모를까 그런 게 없다면 당장 러시아 말고는 대안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러시아는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로서 거대한 목표를 내세우고 있었죠.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이었습니다.



(양이 길어졌으니 여기서 끊고 '중'편에서 이어 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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