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술김에 말실수
2016년 9월. 병신년 초반부터 허위매출 조사한답시고 별도의 사무실에 분리되어 있다가 / '회사 매각 실패' 크리티컬을 맞아버렸고 / 매각위로금 약 2천만원은 없던 일이 되었으며 / 설명회랍시고 직원들 모아 놓은 자리에서 '위로금은 모르겠고 그냥 열심히 일해서 인센티브 받으면 되지 않겠어요? 허허허.' 따위 잡소리를 들었는데 이 때 이미 빅 배스(Big Bath)를 실행할 것으로 예측되었고 이에 따라 해당 년도 적자사태를 예상할 수 있었던 상황.
이직해야 했습니다. 2015년에 회사매각 사전위로금 형식으로 받은 성과급으로 '확 높아진 근로소득 원천징수영수증'을 기반으로 연봉을 높여 이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반드시 활용해야 했습니다.
침몰하는 배에서 선장이 문을 걸어잠그기 전에 후다닥 뛰쳐나가 바다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회사 안은 전쟁이요 밖은 지옥이라지만, 이미 한 곳의 전쟁에 패배해서 생매장 당할 게 확실한 이상 그나마 그 지옥 같은 차디찬 바닷물로 뛰어들어 또 다른 전쟁터로 헤엄쳐 가는 것만이 살 길이었습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이직 자리를 알아봤습니다. 제 기억에 아마 3군데에 이력서를 넣었을 거예요. 건설회사, 시행사, IT기업, 유통회사 등등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때쯤에 '말실수'를 해 버렸습니다. 프로이직러로서 절대 하면 안 되는 짓을 술김에 저질러 버렸습니다.
[이직 준비한다]는 얘기를 전(前) 팀장님께 해 버렸습니다.
앞에서 '긴 얘기를 짧게 한다'고 했었는데, 제가 CJ헬로비전에 있는 동안 팀장님이 3번 바뀌었었습니다. 저를 뽑아 주신 팀장님은 영업팀으로 나가신 후 담당(준임원 급)으로 승진하셨고, 두 번째 팀장님은 1년 만에 원래 계셨던 회사로 되돌아가셨으며, 회사 기습매각과 실패 당시 팀장님은 오신 지 얼마 안 된 분이셨습니다.
현재 팀장님께도 충성해야 하지만... 처음 뽑아 주셨고 저를 조기진급 시켜 주신 팀장님(2016년에는 준임원 담당님)께도 충성해야죠. 직장생활 다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회사 매각이 실패하고 모두가 어수선한 때. 전 팀장님, 저, 법무 출신인데 기획팀으로 옮겼고 이제 곧 CJ지주사 기획팀으로 발탁되어 옮겨 갈 동료 분, 이렇게 3명이 술자리에 모였습니다. 다들 기분이 꿀꿀하고 미래가 암울하니 술을 많이 먹게 되었죠.
돌이켜보면 그때 저는 스트레스가 꽤 심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직장생활 시작한 이래로 가장 심한 스트레스를 겪었던 시기인 것 같아요. '시간에 쫓긴다'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경험하고 있었죠.
스트레스가 심한 상태에서 술을 많이 먹으면 '술주정'을 하게 됩니다. 그때 제가 딱 그런 상태였어요.
'이직 알아보고 있다.'는 말이 나왔습니다.
이 또한 앞에서 썼었는데, 당시 CJ그룹 감사 라인은 [이직 준비하는 인간은 CJ그룹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고 CJ의 3대 정신적 가치인 정직.열정.창의 정신이 결여된 인간이므로 전원 색출해서 징계 먹인다!] 라는 요상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노동청 신고가 활성화된 2020년대에 보면 제대로 미친 짓이지만 당시에는 그랬어요. 요즘도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2016년까지는 그랬었습니다.
물론 제 술주정을 들은 담당님이 저를 감사팀에 신고할 리 없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회향녀 헬로비전'을 만들어 놓은 게 CJ그룹 지주사 쪽인데 이 상황에서 'CJ그룹의 정신적 가치인 정직열정창의 숭배하라구욧 빼애애액!'을 시전할 수도 없습니다. 헬로비전 사람들 모르게 비밀리에 기습매각 진행한 지주사 쪽이 '정직'하지 않잖아요. 니들이 우리 엿먹였는데 무슨 정직이야 C발롬들아. 정직열정창의 따질 거면 니들부터 징계 먹고 시작해.
2. 난감한 상황
CJ그룹에 대한 분노(!)는 그렇다 치고. 담당님께서는 제 걱정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헬로비전 내부에서 부서 이동을 하는 방안'을 제안해 주셨죠.
이 때의 담당님은 제가 다른 부서로 가서 헬로비전에 남아 있는 게 장기적으로 더 나을 거라고 판단하셨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당연히 빠르게 이직하는 게 저 자신을 위해 낫다고 판단했었지만... 누가 옳다 그르다 따질 문제는 아닙니다. 그저 감사하고 죄송할 뿐입니다.
아무튼 (제 의도와 무관하게) 대외적으로 '부서 이동'이 추진되었습니다. (저는 전혀 갈 생각이 없는데) '기획팀'으로 발령이 나게 될 것 같았어요. 기획팀에 있던 유능한 인재 한 명이 CJ지주사로 발탁 전보되어 가니 그 자리를 제가 메꾼다, 뭐 그런 컨셉으로 회사 내부 부서 이동이 추진되게 되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난감했죠. 하루빨리 다른 회사로 빤스런 해야 하는데 난데없이 회사 내부 이동발령이라니. 난 그런 거 필요없고 조속히 이직에 성공했으면 좋겠는데 왜 자꾸 기획팀에 보내서 남기려고 하십니까 ㅠ.ㅠ
그렇다고 '저 이직할 거니까 건드리지 마세요.' 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CJ 감사 정책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그런 얘길 대놓고 할 수는 없죠. 일단은 가만히 있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진짜로 기획팀에 전환배치된 후에 '이직 성공했습니다 빠이욤 바이바이 두바이' 시전하면 더욱 더 욕 먹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죠. 내심의 의사를 숨긴 채 조용히 있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난처하고 또 난처한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저로서는 '나중에 뒤지게 욕 처먹더라도 이직 확정되기만 하면 무조건 나간다 헬로비전 기획팀 따윈 필요없어 욕을 하든 말든 내가 출근 안하겠다는데 알빠노.' 모드였지만 일단은 티를 안 내려 노력했습니다.
어어, 그런데 말입니다.
이 난관을 타개할 방법이 전혀 예상 못한 곳에서 후욱 날아왔습니다. 기획팀 발령을 추진해 주신 담당님도, 이걸 동의해 주신 기획팀장님도, 옆에서 지켜보시던 법무팀장님도 전혀 예상 못한 시나리오가 전개되었습니다.
[기획팀 발령 거부]라는 시나리오였습니다.
3. 알아서 기획팀 발령 거부해 주시면 땡큐베리감사
앞에서 (조카튼튼) 설명회 얘기를 했었습니다. 빅 배스 단행하면 인센티브 따윈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리고 직원들의 인사평가도 꼬라박게 되며 조기진급 또한 먼나라 이웃나라 얘기가 될 게 뻔한데, 한편으로는 빅 배스 시나리오 준비하면서 앞에서는 말빨로 젊은 직원들을 구워삶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윗선들이 참으로 가소로웠습니다.
그런데, 이 때 당시 한 가지 교훈을 얻었습니다. [소위 '윗선'에 앉은 사람들은 아래 직원들의 감정과 고충을 거의 이해하지 못하며, 이해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교훈이었습니다.
조카튼튼 설명회는 컴백한 매지션 대표이사님이 무슨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서 진행한 게 아니었습니다. 대표이사님 개인적으로는 정말 열정을 다해 젊은 직원들을 설득하려고 하셨을 거예요. 이미 미래가 흔들려 버린 젊은 사람들에게 하찮은 말빨 따위가 먹힐 리 없지만 대표님 나름대로는 과거 영광시대에 그러했듯이 리더쉽을 보여 주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의도가 좋다고 해서 결과가 좋은 건 아닙니다. 듣는 사람의 감정과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안 한 상태에서 '나는 과거 영광시대를 이끌었던 위대한 매지션이야. 그냥 나를 믿고 따라와. 잘 되면 다 좋고 안 되더라도 나는 최선을 다했어.' 따위로는 사람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대표님뿐만 아니라 다른 임원~준임원~팀장 급 분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직장생활을 걱정할 뿐, 과장급 이하 실무자들이 무슨 고민을 하는지 / 어떤 생존전략을 선택하는지에 대해서는 안물안궁 관심밖이었습니다.
제가 속한 법무라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앞에서 '허위매출 조사 대응'도 얘기했었죠. 오너 사건이 징역4년 확정으로 끝나고 오로지 '사면'밖에 없는데 사면 관련된 업무는 CJ법무실과 무관해서 법무라인 전체가 구조조정 당할 상황이었고, 헬로비전 기습매각 때에도 법무실이 배제되었었죠. 이럴 때에 계륵(鷄肋)이라도 뜯어 보려면 헬로비전 허위매출 건에 숟가락 얹어야 한다, 뭐 그랬었습니다.
그런데 이 헬로비전 기습매각 자체가 공정위 불허결정으로 무산되어 버렸습니다. 당연히 헬로비전 허위매출 건의 중요성은 확 떨어졌죠. 범죄사실 자체는 남으니까 어떻게든 기소는 하겠지만, 'SK로 매각되는 데에 악영향을 준다!'라는 원래의 수사기획 의도는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닭갈비에 붙어 있던 살점 몇 개도 날아가 버린 거죠.
그렇지만 CJ법무실 입장에서는... 이 닭갈비라도 뜯어야 했나 봅니다. 허위매출 조사 대응에 6개월 이상 꼬라박은 것 때문이라도 뭔가 결과물을 만들고 싶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결과물을 만들려면, 이 조사 대응 실무자가 계속 남아 있어 주는 게 좋았나 봅니다. 어차피 그 실무자가 없어져도 별 차이 없고 사실관계가 명확해서 더 대응한다고 해도 딱히 달라지는 게 없을 텐데 그래도 필요하긴 했나 봅니다.
그래서 기획팀 발령이 거부되었습니다. 신임 경영지원실장님께서 저의 기획팀 발령을 반려하셨습니다.
겉으로는 CJ법무실의 개입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그냥 신임 경영지원실장님이 [허위매출 사안 대응하는 게 너무 중요하므로 지금 당장 법무팀 실무자를 기획팀으로 보낼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우셨을 뿐입니다.
으음, 그런데 말입니다.
잠시 곁가지 설명을 붙이면, 이 신임 경영지원실장님은 '순혈의 CJ맨'으로서 제일제당 등등에서 재무 라인 업무를 하시다가 '헬로비전 운영총괄'로 오셨던 분입니다. 유선방송사업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는 분이지만 퇴임 예정 임원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운영총괄 직책을 맡으셨고, 운영총괄 하시는 동안 딱히 사업부서에 개입하거나 지시를 하시는 일도 없었어요.
즉, 이 분은 허위매출 건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운영총괄 산하에 기업사업팀이 있고 그 기업사업팀이 허위매출의 근원지였는데 그 운영총괄 직책에 있을 때에도 '내가 오기 전에 있었던 일인데 알빠노.' 모드였고, 매각 발표 이후 허위매출 조사 대응 한다고 할 때에도 여전히 알빠노 모드였습니다.
그랬던 분이, 헬로비전 매각 자체가 실패로 돌아간 후에 잔여물 처리 수준으로 허위매출 건 처리하는 단계에서, 갑자기 툭 튀어나와 '이 건이 너무 중요하니 법무팀 실무자 못 뺀다!'라고 주장하신다? 님이 언제부터 이 건에 관심 가지셨다고 그러세요 닝겐?
의도가 뻔히 보였습니다. 누가 이 부탁을 했는지도 뻔히 보였습니다. 이 부탁 할 곳이 CJ지주사 법무실 말고는 없는데 당연히 바로 알죠. 범인은 바로 너!
뭐 상관없었습니다. 법무실이 뒤에서 뭘 하든 말든 상관없었습니다. 저는 이미 이직 확정되었거든요^^.
허위매출 건인지 다른 건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로펌회의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서류 통과. 면접 일정 통보드립니다.] 라는 문자를 받았었고, 대충 기획팀 발령 거부되는 시점에서는 면접까지 끝낸 상태였습니다. 연봉협상은 '인센티브 잔뜩 받아서 +30% 뻥튀기된 2015년 근로소득 원천징수영수증'을 기준으로 진행되었구요.
여기에 기획팀 발령 결재 반려라니. 어익후 땡큐베리감사. 회사에서 저를 엿먹여 주시니 저는 당당하게 이직 선언하겠습니다.
이직 선언을 했습니다. 아무도 저를 탓하지 않더군요.
아니, 탓할 수가 없었겠죠. 기획팀 발령 결재를 반려해 놓고 이직하는 걸 욕하면 제가 가만히 있을 리 없으니까요.
입만 열면 정직 열정 창의 부르짖던 CJ맨들 앞에서 '그 정직한 인간들이 기습매각 진행했냐? 그게 열정이고 창의야? 나도 니들 정직 열정 창의대로 이직 진행하던 거 숨겼는데 무슨 문제 있어? 문제 있으면 어쩔티비?'를 시전할 텐데 누가 저한테 태클을 걸겠습니까. 가만히 냅둬야죠.
사직서를 냈습니다. 아주 당당하게. 떳떳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