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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박수도 갈채도 없이 홀가분하게 떠나다

by 테서스

이직 확정이 되고 하루이틀 지났을 때.


저랑 같이 법무팀에 근무하던 과장님께서 매우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저한테 할 말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저 정말 죄송한데 다른 회사로 이직하게 될 것 같아요. 한 달 뒤에 이직할 겁니다." 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제가 먼저 이직하는데요." 라고.


그 때 동료 과장님의 표정은 (실로 죄송스럽지만) 상당히 당황스러워 보였습니다. 저한테 대놓고 말하진 않으셨지만 속으로는 [와 놔 이쉥키 완전 막장이네. 주위 사람들 아무도 모르게 이직준비하고 먼저 튄다고? 이거 앞으로 상종하지 말아야겠다.] 라고 생각하셨겠죠. 9년 지난 일이지만 새삼 죄송합니다^^.


뭐, 떠나게 되었습니다. 박수쳐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런 건 애당초 필요없었어요. 욕만 안 하면 그만인데 그나마 기획팀 발령 거부하면서 욕할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이직하기 전에 2주 정도만이라도 허위매출 건 도와 줬으면 한다'는 부탁이 있었지만... 사뿐히 거절했습니다. 이미 프로이직러 반열(!)에 오른 사람으로서, 이직 전에 충분히 쉬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거든요.


제가 헬로비전으로 이직해 올 때에는 금요일 하루 쉬고 넘어왔었습니다. 이전 직장에서 미칠 듯 야근하면서 피로가 잔뜩 쌓여 있었는데도 나름 성실하게 마지막까지 일한다는 각오(!)로 출근하다가 딱 하루 쉬고 다음 회사로 출근했었죠.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퇴사하는 곳과 이직하는 곳에 적절히 둘러대고 3주 가까운 시간을 비워 뒀습니다. 오롯이 저와 제 가족을 위한 시간을 만들어 놨습니다.



병신년인 2016년 10월 말. 아직 초등학교 들어가지 않은 두 딸과 오랫동안 고생한 아내를 데리고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저는 운전면허가 없어서(;;) 택시로 이동해야 했고 그나마 아내가 다 계획 짜고 주도하는 여행이었지만 아무튼 남들 다 일하는 평일에 제주도로 놀러 갔습니다.


프로이직러 분들은 잘 아실 텐데, 평일에 놀아야 진짜 마음편히 잘 놀 수 있습니다. 남들 다 쉬는 주말에 놀려면 사람많고 비싸고 힘들죠. 평일에 노는 게 진짜 개꿀입니다.


가을날의 제주 바다. 아름다웠습니다. 지난 4년 간 찌들었던 게 싹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습니다.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흐뭇해질 정도네요. 그 때 휴식은 실로 달콤했고 홀가분했습니다.



아, 하나 덧붙여야겠네요. [최순실 아줌마 사건]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제주도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엄청 피곤해서 낮잠을 몇 시간 잤었습니다. 그러다 깨어나서 잠시 인터넷 뉴스를 찾아봤는데...


어어, 난리가 났더군요. 대한민국 대통령이 한낱 강남 뚱땡이 아줌마에게 휘둘려 그 아줌마 말대로 다 하고 있었다, 뚱땡이 아줌마가 실질적인 대통령이다 등등. 맷돌 손잡이 '어처구니'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는 수준의 언론 보도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많은 국민들께서 큰 충격을 받으셨겠지만, '공정위의 매각 불허 결정'을 받아들었던 헬로비전 직원 입장에서는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아니 C발 헬로비전 매각 불허 결정도 이 뚱땡이 아줌마 영향이었던 거야? 신뢰보호원칙 따위 조까라 그러고 기존 조건부승인 사례 다 뒤집어 엎은 게 뚱땡이 아줌마 때문이었어? C발 이게 나라냐?] 라는 생각이 쓰나미처럼 밀려왔습니다.


헬로비전 매각 불허 결정문의 앞부분은 과거 유선방송 M&의 조건부 승인 사례와 상당히 비슷했습니다. 분명 처음에는 '조건부 승인'을 전제로 결정문 초안을 작성했을 거예요. 공정위 내부적으로도 선행 사례를 따르려 했을 겁니다.


그걸 누군가 뒤집었습니다. HHI 지수가 고도위험 수준으로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약간 경쟁을 제한할 우려가 있음' 수준인데 전면불허결정 무리수를 둔 것 자체가 [조낸 잘 보이는 투실투실한 손이 개입했다!]는 정황증거였습니다.


뭐,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이미 이직했는데.



저에게는 '새로운 직장'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그레이트CJ, 정직 열정 창의, 온리원(OnlyOne) 정신, 반듯한 하고잡이 등등 CJ고유의 잡소리는 싹 다 집어치우고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는 게 1순위였습니다.


불복기간 30일을 넘겨버려서 더 이상 다툴 수도 없는 매각 불허 결정 따윈 아몰랑. 역사가 평가하든 말든 아몰랑. 알아서들 하세요.


그냥 잘 놀았습니다. 최순실 아줌마가 감옥 갈 때 꽤 뿌듯하긴 했습니다만 그건 몇 달 뒤 얘기구요.



또 하나 덧붙여야겠네요. 제가 이직해 간 회사 이야기입니다.


제가 앞에서 "vertium을 '베르띠엥'이라 읽지 않고 t를 d로 읽어야 하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지만 아몰랑 베르디움이라구욧 빼애애액!"을 시전하는 회사 얘기를 잠깐 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브런치북인지 다른 매거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디선가 그 얘기를 했었습니다.


제가 이직해 간 회사가 바로 이 vertium을 BI로 쓰는 회사였습니다. 당시에는 아직 새우 취급을 받고 있었지만 보유현금 수준으로는 이미 20대 기업 싸다구 날리는 고래 급이었던 회사였습니다.


뭐, 그 회사의 이야기는 또 몇 년 뒤로 미뤄야겠네요. 떠나온 회사에 대한 이야기들은 대략 10년 가까이 지난 후에 풀어내는 게 적절합니다. 이번에는 'LG헬로비전의 구조조정' 기사를 보고 9년 만에 풀어내긴 했습니다만 다음부터는 적절한 연재 주기(?)를 지켜야겠죠.



프로이직러의 직장생활 이야기. 35살까지 고시생을 가장한 게임중독 백수로 살다가 뒤늦게 블랙기업에 취직하고 매일 목 끝에 칼날을 들이댄 느낌으로 직장생활을 해 온 어느 회사원의 이야기.


이 이야기는 계속될 겁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듯이, 제 인생의 발자국 또한 계속 이어질 겁니다.


쇼가 계속되듯이 우리 인생도 계속됩니다. Show must go on. With our lives as endless voy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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