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2015년 10월 30일 창립기념일에 도둑처럼 찾아온 회사 매각. 창립기념일인데 쉬지 못하고 회사 출근해서 뻔한 논리 만든답시고 야근하다가 기습적으로 한 방 두들겨맞은 소식이었습니다. 그 때도 처음에는 '충격과 공포'였죠.
하지만 8개월 후에 찾아올 사건에 비하면 이 충격은 애교 수준이었습니다. 2016년 7월 4일에 번개처럼 내려꽂힌 '매각 불허 결정'은 진정한 충격과 공포가 뭔지 제대로 보여 줬습니다(충격과 공포다 그지 깽깽이들아!).
아시다시피 7월 4일은 미국의 독립기념일입니다. 독립 당시에는 돈도 없고 가오도 없는 시골 촌뜨기에 불과했지만 200여 년 뒤에는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는 천조국 엄웨리커, 그 나라가 독립군 사령관 워싱턴을 초대 대통령으로 임명하며 첫 발을 내딛은 날입니다. 헬조선에는 별 의미 없지만 아무튼 그러합니다.
이 역사적인 날. 헬조선 공정위는 영웅적이고 용맹과감하게 (당시 정부 권력자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한) 결정을 발표합니다. "CJ헬로비전을 SK텔레콤에 팔아먹으려는 매각 신청에 대해 불허(不許)한다"는 결정을 뽷!
'멘탈이 붕괴된다.'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느꼈습니다. 온갖 부정적인 시나리오가 짧은 시간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더군요. 그 부정적인 시나리오 중 몇몇은 현실화되기도 했구요.
당시 감정을 읊기 시작하면 말이 길어질 테니 적절히 자르고 넘어가겠습니다. 바로 본론 진행하죠.
2. 본론
(1) 매각 불허 결정은 합리적이었을까? 그럴 리 없겠죠?
앞 챕터에서 언급했듯이, 기존 유선방송 M&A는 이미 독점이거나 / 과점 상태에서 독점으로 가는 형태의 계약이었습니다. 허쉬만-하핀달 지수 계산법에 따르면 독점지수 1만(100%의 제곱)을 가뿐히 찍어 주는 최강 독점 그 잡채였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공정위는 이 독점지수 1만(정확히 1만은 아니지만 얼추 8천~9천 나올 것 같은 인수 건 포함) 계약을 몇 건 승인해 준 바 있습니다. 현대차-기아차 인수 건, 에이스침대-시몬스침대-대진썰타침대 3개사의 M&A건,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인수 건까지. '사실상 독점'이 되는 사안에서도 조건부 승인을 한 사례는 많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유선방송 M&A'는 그 특수성을 인정하여 전부 승인을 해 줬습니다. 처음 시작 단계부터 조폭식 땅따먹기로 전국을 76개 권역으로 나눠 권역별 독점사업으로 시작했으니, 이후 자기들끼리 인수합병을 하든 말든 여전히 독점이고 / 일부 경쟁권역이 인수합병으로 독점이 된다 해도 어차피 인근 권역이 이미 다 독점 상태니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독점지수 1만 사안도 모두 다 승인해 줬었습니다.
(5년 간 가격인상 금지 등 조건이 붙긴 했지만 어차피 유선방송 시청료는 방통위 인가를 받아야 하니 별 의미 없는 조건이었습니다.)
위성방송과 IPTV가 도입되면서 '전체 유료방송시장'에는 경쟁이 생겨났지만, 역으로 이 경쟁 때문에 유료방송 사이의 M&A에서는 독점이 되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SK 측 IPTV 점유율과 CJ헬로비전 측 유선방송 점유율이 합쳐진다 하더라도 전체 대한민국의 유료방송시장에서는 여전히 유효경쟁이 성립한다] 는 얘깁니다.
구체적인 수치는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당시 전체 대한민국 유료방송시장 2900만을 기준으로 할 때 SK의 IPTV + 헬로비전 유선방송 가입자 합치더라도 전체 점유율은 20% 조금 넘었을 겁니다. 위성방송과 IPTV를 함께 보유한 KT보다는 커지고 1위 사업자가 변경되긴 하지만 시장 전체적으로 보면 KT, LG, 각 지역별 유선방송사업자가 여전히 존재했고 1위 사업자의 시장점유율도 독점을 우려할 수준에는 한참 못 미쳤습니다.
허쉬만-하핀달 지수(HHI)로 계산해도 인수 전 상태보다 독과점 가능성이 '약간' 높아져서 우려할 정도 범위였습니다. 전면 불허할 정도는 아니었고 일부 독과점이 심화되는 현상에 대해 예방적 조치(조건부 허가 결정)만 내리면 충분했어요. 통상적으로 HHI 상승 폭이 900 미만이면 우려 없는 것으로 보고 900~1600 사이면 경쟁제한성이 약간 우려되어 좀 더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수준인데, 제 기억에 이 건의 HHI 지수는 1000 조금 넘게 오르는 정도였습니다. '새발의 피' 급 위험성이었죠.
[* 일부 보완 : 글 쓰고 나서 HHI 계산법을 다시 살펴봤는데, 기존 산업에서 HHI가 1200 ~ 2500 사이였을 때 신규 합병으로 인한 HHI 증가 폭이 250 이상이면 일단 독과점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본다고 합니다. 아마 CJ헬로비전과 SK브로드밴드의 유료방송 시장점유율이 10% 초반 수준이었을 것이고(각 11.5%로 잡고 11.5의 제곱 합계 = 264.5.) 이게 합병 이후 20% 초중반 선으로 증가했을 테니(대략 23%라 치면 23의 제곱 = 529), HHI 증가 폭은(529-264.5로 계산하여) 250을 간신히 넘겼을 거예요. '약간 위험하다'고 판단되는 수준이었습니다.
HHI 계산도 9년째 안 하다 보니 구체적인 기준 같은 건 헷갈리네요. 역시 직장생활에서 배운 지식들은 그 일을 안 하면 금새 소멸됩니다;;]
기존 유선방송 시장의 조건부 승인 사례로 보나, 전통적인 HHI 기준의 위험성으로 보나, 이 건 매각 결정이 '전면불허'로 나올 가능성은 없었습니다. 행정법상 신뢰보호의 원칙을 들이대지 않더라도 그냥 전면불허 결정 자체가 재량권 일탈.남용이었어요. 이 M&A로 인해 50% 이상의 지분을 가진 독점적 사업자가 출현하는 것도 아니었구요.
게다가, 당시 불허결정 보고서를 직접 봤던 당사자의 입장에서 얘기하면....
불허결정 보고서의 앞부분 전개가 기존 유선방송 M&A의 전개와 거의 똑같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최초에 보고서 초안을 쓸 때에는 기존 유선방송 인수합병 사례를 준용하여 조건부 승인으로 끝내려다가 중간에 겐세이(!)가 들어오면서 급히 후반부를 수정해 전면불허 결정으로 바꿨다는 게 보고서 전개 과정에서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선진국 문턱에 선 대한민국? 조까.
국민에게 신뢰를 주는 적법 행정? 이것도 조까.
신뢰보호의 원칙 ? 그건 뭐하는 거임? 먹는거임? 같이 까세요.
공정위의 '전면적인 매각 불허 결정'은 명백하게 권한남용이었습니다. 공정거래 분야 분쟁을 다뤄 온 로펌에 맡기면 아주 좋은 사건이라면서 군침을 흘릴 것 같은 사안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보따리장사 뜨내기 경력직이고 말단 실무자 과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속한 회사는 이 매각 건의 객체일 뿐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2) 헬로비전은 당사자적격이 없고, 정작 당사자는 불복할 생각이 없다
공정위의 처분에 대해서는 30일 내에 서울고등법원을 1심으로 하여 불복할 수 있습니다. 공정위 처분에 사실상 지방법원 1심 판결의 효력을 주고 법원에서는 2심제로 운영하는 건데, 뭐 꼬우면 법 바꿔야죠. 법이 그렇다는데 뭐 어쩔티비.
즉, 이 헬로비전 매각 건의 당사자들은 그 정식 결정문을 송달받은 날로부터 30일 내에 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하면 됩니다. 대략 정식 결정문 송달일이 7월 18일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럼 8월 17일까지 소송 넣어야죠.
으음, 그런데...
송달받은 당사자들이 뜨뜻미지근합니다. 매도자인 CJ오쇼핑(실제 권한을 보유한 건 CJ지주사 쪽이지만 일단 형식적으로는 오쇼핑이 매도자), 매수자인 SK텔레콤 모두 뜨뜻미지근합니다.
앞 챕터에서 썼듯이, SK텔레콤 쪽이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건 나름 이유가 있었습니다. 헬로비전을 실사하고 나니 부실 규모가 너무 커서 가급적이면 '불허결정 당하는 게 이익'인 상황이었으니까요. 6월까지 별도 사무실에 분리되어 있을 때에는 꼼꼼히 따져 보지 않았습니다만 매각불허 이후 하나씩 살펴보니 그럴 만 하더군요.
그럼 역으로 CJ측은 왜 뜨뜻미지근했는가? 그 전부터 이미 그룹감사를 통해 헬로비전의 부실을 알고 있었고 이걸 한 방에 털어내는 방법으로 '기습매각'을 선택했으며 그 과정에서 '삼성그룹의 적통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노조'까지 생긴 회사에 대해 매각불허 결정을 받아들었는데 왜 불복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가?
CJ측 입장은 아주 심플했습니다. [회장님 사면]이 걸려 있었거든요.
CJ오너 분은 박근혜 정권 시작 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구속되었고, (슬기롭지 않은) 가혹한 감방생활(!)을 견디지 못해 형집행정지 상태로 3년 넘게 나와 있었습니다. 형량이 거의 진행되지 않았죠.
이 상태로 징역 4년형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었습니다. 이게 하필 헬로비전 매각 불허 시점과 겹쳐 버렸죠.
CJ오너 입장에서는 '사면'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부터 4년 가까운 형량을 감옥에서 사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으니 유일하게 살아날 방법은 사면 뿐이었죠.
그냥 비하표현 쓰겠습니다. CJ는 당시 박근혜 정부를 향해 [눈물의 똥꼬 쇼]를 펼쳐야 했습니다. 나름 보수정권이라는 정부를 위해 온갖 국뽕범벅 영화를 만들고 정부 정책을 찬양해야 했습니다.
(그나마 이 국뽕영화 중에 '인천상륙작전'은 흥행에도 성공했습니다. IPTV에 나오는 걸 봤는데 나름 잘 만들었더군요. 맥아더 후장 빨아 주는 건 뭐... 대충 넘어갑시다. 회장님을 살려야 하는데 데미갓 맥아더를 찬양하는 게 뭐 대수겠습니까. 허허허.)
이 눈물의 똥꼬 쇼 와중에 공정위 매각 불허 결정이 나왔는데 이걸 불복한다? 마지막 남은 카드가 사면 뿐이고 그 사면을 위해 영화사업이 망하든 말든 다 꼬라박아서 국뽕영화로 밀어붙였는데 그깟 헬로비전 하나를 위해 정부 결정에 반발한다?
그럴 리 없죠. 납작 엎드려야 됩니다. [살!!!!!려 주세요 굽신굽신]을 시전해야 합니다.
당시에는 살짝 빡쳤지만... 9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CJ 지주사 입장도 이해됩니다. 오너를 위해 지주사를 만들었는데 당연히 오너의 사면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죠. 그러라고 지주사 인력 뽑은 건데 자기 역할을 해야 합니다.
결국 30일의 불복기간은 지나갔고 매도예정자-매수예정자 모두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헬로비전의 직원으로서 SK맨이 된다는 꿈은 '헛된 봄날의 달콤한 꿈'으로 사라졌고 '이룰 수 없는 꿈'으로 확정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꿈은 깨졌지만 현실은 어떻게든 살아가야 했습니다.
CJ헬로비전 직원들이 마주해야 하는 가혹한 현실은... [회향녀]였습니다.
(3) 회향녀가 된 헬로비전
앞에서 비하 표현을 썼는데 이번에는 더 강한 표현이 등장했습니다. 회향녀(回鄕女).
이 말의 의미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실 겁니다. 나름 조선시대 조상님들의 아픔과 설움이 담긴 말이기도 하죠. 만리타향으로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다가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들. 함부로 비하 표현 쓰기에는 죄송스럽긴 합니다.
다만, 2016년 8월의 헬로비전 직원들에게는 이 표현을 써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도로 CJ가 되었지만 결코 환영받지 못했다'라는 관점에서는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습니다.
헬로비전은 회향녀였습니다. CJ지주사 차원에서 '이렇게 부실하고 허술한 회사 따위 팔아치워!'라고 결정해 기습적으로 매각했는데 정부에서 매각불허 결정을 하는 바람에 터덜터덜 되돌아온 존재였고, 그 와중에 '노조'라는 어마무시한 짐덩어리를 붙이고 돌아온 존재였습니다. 삼성적통이라고 자부하는 CJ입장에서는 호환 마마 전쟁보다도 무서운 재앙덩어리였겠죠.
(둥당당 당당당 둥당당 당당당~ 옛날 어른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지만 현대의 어른이들은 무분별한 불량 불법 노조활동으로 인해 오너 말을 듣지 않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정도의 느낌적인 느낌?)
뭐, 천재지변 급의 재앙이 아닌 한 어지간한 문제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게 설립목적인 기업에서는 돈이 곧 진리죠. Show me the money만 시전해 주면 만사 오케이.
다만... 앞 허위매출 사건에서도 그러했듯이, CJ는 헬로비전에 돈을 투입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헬로비전 자체적으로 돈을 풀도록 할 생각도 없었어요. 그저 빛 좋은 개살구 모드로 말장난만 할 뿐.
물론 이 말장난도 아무나 하면 안 됩니다. 앞에서 얘기한 '넌 왜 그래?' 소리 나오는 양아치 인사팀장 따위를 이 아수라장에 투입했다가는 노조를 더 키우는 수준을 넘어 아예 칼부림 날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육식동물이라 자칫 눈 돌아가면 인사팀장이고 나발이고 모가지 따 버리는 수가 있거든요.
CJ지주사 측은 긴급하게 '소방수'를 투입했습니다. 말장난으로 헬로비전 직원들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돈은 투입 못하고 말장난으로 대충 넘겨야 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최선의 카드를 투입하긴 했습니다.
CJ지주사가 선택한 최선의 카드는 [헬로비전 성장기를 이끌었던 총괄부사장 급 대표의 복귀]였습니다.
(글이 길어졌으니, 대표님 복귀에 관한 썰은 다음 편에 풀어야겠네요. 챕터를 나눠서 다음 편에 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