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병신년인 2016년 겨울~봄 기간 동안 허위매출 조사에 대응한다는 이유로 본사 사무실을 떠나 근처에 작은 사무실을 얻고 법무담당자 몇 명이 따로 격리되어 있었을 때. 불안감이 연탄까스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습니다. '회사 매각이 너무 지연된다'는 불안감이었습니다.
유선방송 1위 사업자인 CJ헬로비전을 무선통신 1위 사업자인 SK텔레콤에 매각한다고 하면, 당연히 다른 M&A 건에 비해서는 신중하게 심사해야 하긴 합니다. 일단 무선통신 시장을 나눠먹는 KT와 LG측이 '시장지배력을 강화해서 공정경쟁을 해친다구욧 빼애애액!'을 외치고 있었고, 공정위 자체적으로도 시장지배력이 전이되는 M&A는 좀 더 철저하게 심사하고 있었습니다. 3~4개월 정도 걸릴 거라는 예상은 다들 하고 있었죠.
그런데... 너무 늦어졌습니다. 11월에 신청한 게 해를 넘기고 봄을 지나 여름으로 갈 때에는 '너무 오래 걸린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매각 불허(不許)'를 예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선방송 분야 M&A의 선례에 비추어 봐도 '조건부 승인'이 나와야 했고, 무엇보다도 당시에는 [대통령 최순실의 파워]에 대해 알 수가 없었거든요.
그래서 '늦어지긴 하지만 결국에는 승인 날 거야. 이 지긋지긋한 허위매출 대응 건도 대충 마무리되고 SK로 넘어가서 SK맨이 될 거야.'는 기대감을 갖고 살았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헛된 기대였지만... 당시에는 그러했습니다.
서론은 이만 줄이고 바로 본론 넘어가겠습니다.
2. 본론
(1) 유선방송 M&A는 원래 독점이었는데 다 조건부 승인 나왔다
행정법에는 '신뢰보호의 원칙'이라는 게 있습니다. 민법상 신의성실-금반언(禁反言) 원칙과 이어지는데요. 대충 행정행위에 대한 국민의 정당하고 합리적인 신뢰는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고, 이는 '선례(先例)에 대한 신뢰'로 이어집니다.
CJ헬로비전 매각 건은 당연히 '유선방송 M&A'입니다. IPTV가 유선방송을 인수하는 건 처음이지만 대략 유료방송 컨셉은 비슷하므로, 기존 유선방송 M&A의 선례를 따라야 하죠. 헬로비전 임직원을 비롯한 관계자 전원은 '아 공정위가 기존 유선방송 M&A 선례와 유사한 결정을 하겠구나.'라고 기대할 수 있고 또 이러한 기대는 행정기본법 및 절차법상 충분히 합리적이고 정당한 신뢰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럼 기존 유선방송 M&A 선례는 어떨까요?
여기서 잠시 기억을 되살려 봅시다. [유선방송은 조폭 땅따먹기 식으로 전국을 76개인가 77개 권역으로 나누면서 안정되었다]는 팩트(Fact)를 떠올려 보죠.
이 권역 대부분은 '권역 당 유선방송사 1개'였습니다. 가아끔 2개 이상의 유선방송사가 있는 권역도 있었지만 대다수 권역은 1개 유선방송사 독점이었다는 겁니다.
즉, 유선방송은 원래 독점이었습니다. 각 권역 당 1개의 유선방송만 있는 경우에는 당연히 독점이고, 2개 이상의 유선방송사가 서로 싸우다가 M&A로 흡수합병되면 과점에서 독점으로 바뀌는 구조였습니다. 권역이 다른 유선방송사끼리 인수합병 일어나면 '권역 별 독점이 광역화되는 정도의 변화'만 있을 뿐 여전히 독점이었구요.
공정위에서 기업결합심사를 할 때 시장지배율 변화를 측정하는 기준으로 HHI(허쉬만-하핀달 인덱스)가 있는데요. 처음부터 독점이고 합병 후에도 독점이라면 HHI에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처음에 과점 상태였다가 합병 이후에 독점이 된다면 HHI가 폭증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무조건 불허결정을 하는 것도 아니에요. 제반 사정을 고려해서 적절히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면 '조건부 승인'을 합니다.
또한, 유선방송 시장은 '방통위가 허락해 준 독과점'이라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방송통신시장을 쥐락펴락하는 별도의 유관부서가 허락해 준 제도를 공정위가 함부로 비틀 수는 없죠. 대충 방통위에서 OK하면 공정위도 그에 따라 M&A를 승인해 주는 게 일반적입니다.
이러한 논리에 따라, 기존의 유선방송 M&A는 단 한 번도 불허결정이 난 적이 없었습니다. 한 권역 내에서 2개 이상의 유선방송사가 경쟁하다가 M&A 일어나서 독점이 되는 경우에 '5년 간 가격인상 금지' 등의 조건을 붙여 조건부 승인을 한 적은 있었지만, M&A 자체를 무산시켜 버리는 불허결정은 단 한 건도 없었어요.
이후에 위성방송(KT스카이라이프)이 생기고 IPTV(통신3사의 자회사 및 사업부문)도 생겨났지만, 이들 전체를 '유료방송'으로 묶어서 하나의 시장으로 판단하는 이상 기존 유선방송 사례를 준용하여 판단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기존에 유료방송이 유선방송 1개밖에 없을 때에는 100% 독점을 인정해 줬는데 위성방송 및 IPTV가 생겼다고 해서 갑자기 선례를 뒤엎을 이유가 없죠.
유료방송 시장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다 '조건부 승인'을 예상했습니다. 심지어 'SK의 지배력 강화를 용납할 수 없다구욧 빼애애액!'을 외치는 KT와 LG도 내부적으로는 조건부 승인을 예상하고서 별도의 유선방송 M&A를 준비하고 있었어요. 기존의 선례는 그만큼 많았고 강력했습니다.
법무담당자인 저도 당연히 조건부 승인이 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유선방송사 M&A 5건을 진행했고 공정위 심사도 봤었는데, 나름 세계 경제순위 11~12위 정도 되는 대한민국에서 손바닥 뒤집듯 선례를 뒤집는 미친 짓을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발언을 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헬로비전의 홍보팀장님이 좀 다른 얘기를 하시더군요.
(2) 홍보팀장님의 카더라 통신
홍보팀을 갖춘 회사는 다 그렇듯이, 홍보팀 분들은 언론사 기자들과 매우 친합니다. 원래 기자들과 친하게 지내라고 만든 부서니까 당연하겠죠.
공정위의 기업결합 심사가 엿가락 늘어지듯 축축 늘어지고 있을 때. 어느 날 저녁 회식자리에서 헬로비전 홍보팀장님이 '카더라 통신'을 전해 줬습니다. 뭐 저는 팀장 급은 아니었지만 나이빨(!)로 합석해서 같이 들었었죠.
"청와대 출입 기자들 얘긴데 분위기가 좀 이상하대요.
CJ 쪽은 정권 초기부터 딱 찍혀 있었고, SK 쪽은 경제살리기 하라고 사면해 줬는데 사면되자마자 첩밍아웃 하고 국내 경제에 아무 도움 안 되는 유료방송 M&A나 하고 있다고 VIP께서 매우 안 좋게 본다고 합니다."
뭐, 당시에는 홍보팀장님의 전언(傳言)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일단 공정위 쪽에는 강력한 선례가 있고 '조건부 승인'이라는 적절한 타협카드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법치주의'를 믿었었거든요.
[이 나라는 대통령 기분내키는 대로 선례를 뒤엎을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선진국 반열에 오를 예정인 국가가 그리 허술하게 행정처리를 할 수는 없다. 어디 동네 아줌마가 대통령 권한 행사하는 것도 아닌데 그룹 오너의 개인적인 상황에 대한 감정 문제로 직원 몇천명의 생계가 달린 일을 뒤엎을 수는 없는 거다.]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참 순진하게도 말이죠.
(불과 몇 달 뒤에 정말로 '동네 아줌마가 대통령 권한을 행사했다!'는 걸 알았을 때의 감정은 진짜... 대한민국 진짜 허접합니다. 아주 허접해요.)
아무튼, 공정위의 기업결합심사가 한없이 지연되면서 불안감이 커지긴 했지만 그래도 대다수 사람들은 '조건부 승인이 날 거다'라고 기대했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매수 당사자인 SK가 그리 적극적이지 않은 것 같다]는 현상이었습니다.
(3) 개인적인 아쉬움
개인적으로 2016년 2월 ~ 6월 기간 동안 헬로비전 본사 사무실을 떠나 있었던 게 약간 아쉽습니다. 공정위가 기업결합심사 결론을 계속 미루고 있는 동안 헬로비전 인수예정자인 SK측이 딱히 서두르지 않은 채 몇 달이고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 직접 상황을 못 본 게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뭐, 제가 직접 상황을 봤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겠죠. SK 직원 분들이 설렁설렁 대충대충 되든안되든 상관없어 모드로 대응하는 걸 제가 바꿀 수는 없습니다. 매도당사자도 아니고 매수당사자도 아닌 '매각 대상 회사의 직원'이 뭔가를 바꾸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렇긴 하지만... 직접 봤으면 그나마 충격이 덜했겠죠. 최순실 아줌마에 대해서까지는 몰랐겠지만 최소한 SK가 미적거리는 이유에 대해서는 나름 짐작하고 분석할 수 있었을 겁니다.
SK텔레콤 측이 미적거리는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헬로비전을 인수하는 게 별로니까] 미적거리는 것이었습니다.
헬로비전은 부실한 회사였습니다. 많이 부실한 회사였습니다. 외형은 화려했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속 빈 강정 그 잡채'였습니다.
다음 챕터에서 구체적인 수치로 얘기해 보겠습니다. 2016년 7월~8월 당시 크게 좌절했던 제가 그나마 기록이라도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정리했던 자료에 기반하여 숫자를 읊어 보겠습니다.
커밍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