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글에 이어서 씁니다.)
(4) SK측이 헬로비전 인수에 대해 소극적으로 변한 이유
모든 거래가 그렇듯이, 파는 사람은 비싸게 팔려 하고 / 사는 사람은 싸게 사려고 합니다. 이건 거래의 기본이죠. 자본주의 아니라 어떤 경제체제에서도 마찬가집니다.
헬로비전은 어땠을까요? 이건 사는 사람이 싸게 산 걸까요? 아니면 파는 사람이 비싸게 판 걸까요?
처음에는 '매수자인 SK텔레콤이 싸게 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습니다. 헬로비전의 지분 53%를 1조 원에 사는데, 대외적으로 드러난 헬로비전의 가치는 그보다 훨씬 더 좋아 보였거든요.
기습적인 매각 발표 직전 시점 기준으로 헬로비전이 발표하고 있던 대외적인 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자산 2조. 그 중 부채를 제외한 회사 자본(순자산)은 약 9천억.
- 연간 매출 1.1조. 연간 영업이익 1000억.
- 유선방송 가입자 410만. 알뜰폰 가입자 89만. 그 외 태양광사업 등 부수적인 매출 존재
자본과 연간 영업이익만 봐도 53% 지분에 1조 원이면 싸게 사는 것 같습니다.
DCF법으로 평가할 때 미래 가치는 대략 감가상각전이익(ARPU)*10(보수적으로 하면 ARPU 배수를 *5로 잡기도 합니다만 방송통신업의 특성을 생각하면 *10 인정해 줘도 되겠죠) 정도로 하고 현재 보유한 순자산을 그대로 인정해 주는데, 대충 영업이익이 감가상각전이익과 비슷하다고 치면
헬로비전의 총 가치는 [9천억+1조] 이고 이 총 가치의 53%에 해당하는 지분을 사는 것이므로 단순계산으로는 1조 약간 넘습니다. 즉, 경영권프리미엄을 고려하지 않고 회사의 현재 자산 및 미래 현금창출력보다 더 싼 금액으로 인수했다는 결론이 나오죠. 대외적으로 발표된 장부만 보면 그러합니다.
그리고, 유선방송 M&A에서는 이 전통적인 DCF평가법이 통하지 않고 '가입자 수'를 기준으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기습매각 발표 2년 전까지 헬로비전이 지역 유선방송사를 인수할 때에도 모두 가입자 수 기준으로 매수 진행했었어요. 자본잠식 상태로 현재 자산 및 미래 현급창출력이 전혀 없는 유선방송사도 가입자 기준으로 인수했었습니다.
가입자가 410만이면 단순 계산으로 [가입자*50만원] 적용하면 총 2.1조 원이 나오죠. 여기에 53%면 1조2천억원은 줘야 합니다. 경영권프리미엄을 더하면 아무리 적어도 1조5천억원은 받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당시 유선방송 매물로 나와 있던 C&M(이후 '딜라이브'로 사명 변경)의 경우, 가입자 수가 200만 조금 넘는데 2조 원 이상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어요. C&M의 방송권역이 서울~경기도 지역이어서 가입자 당 수익이 높고 홈쇼핑도 잘 팔려서 가입자 당 100만원 가치가 있다고는 했습니다만, 전체 규모로 볼 때에는 헬로비전이 거의 2배 가량 컸었습니다.
C&M이 2조 원이라면 헬로비전은 최소 3조 원 이상의 가치가 있고, 그런 헬로비전의 지분 53%를 1조 원에 산다면 완전 개꿀 혜자 땡큐베리감사. 이게 기습매각 발표 직후의 시장 평가였습니다. 당시에는 그러했습니다.
뭐, 늘 그렇듯이...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앞에서 계속 강조했죠. [유선방송사에는 허위가입자 / 0원 가입자 / 기타등등 가입자 수 뻥튀기 문제가 있었다. 홈쇼핑수수료로 꿀 빨면서 이 가입자 뻥튀기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는 점.
앞에서 쓸 때에는 2014년 기준으로 전국 가구 수 2100만인데 유료방송 방송가입자는 2600만이라고 썼었는데, 이번 글 쓰면서 당시에 메모한 걸 찾아보니 방송가입자가 2900만이었다고 써 놨네요. 전국 가구 수보다 유료방송 가입자 수가 +40% 이상 많은 기형적인 상황. 이거 다 유선방송에서 뻥튀기 시킨 겁니다.
유선방송 쪽이 가입자 뻥튀기를 하고 있고 이걸 기반으로 홈쇼핑수수료를 과도하게 빨아먹고 있다는 추정(!)은 당시 업계 관련자들 모두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방통위는 당연히 알고 있고, 경쟁사업자인 IPTV와 위성방송 측도 어렴풋이 생각은 하고 있었어요. 전국 가구 숫자보다 유료방송 가입자 숫자가 +40% 많다는 통계자료 하나만 봐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각 유선방송사의 세부적인 수치는 자세히 알 수 없었죠. 어느 유선방송사가 얼마나 가입자 수를 뻥튀기하고 있는지, 허위가입자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또 빨아먹는 홈쇼핑수수료가 얼마나 되는지 등등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정보는 절대 비밀이었습니다.
이 절대비밀이 까발려졌죠. [SK 측이 CJ헬로비전을 실사하는 과정]에서 유선방송사의 비밀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저 위에 최초 대외적인 현황을 다시 한 번 쓰고, 그것과 실사 이후 밝혀진 현황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최초 대외적인 현황>
- 자산 2조. 그 중 부채를 제외한 회사 자본(순자산)은 약 9천억.
- 연간 매출 1.1조. 연간 영업이익 1000억.
- 유선방송 가입자 410만. 알뜰폰 가입자 89만. 그 외 태양광사업 등 부수적인 매출 존재
<실사 이후 밝혀진 현황>
- 자산 2조에 자본 9천억원은 맞음.
다만, 자본 9천억 중 6천억원은 과거 지역유선방송 인수 과정에서 발생한 영업권을 상각처리하지 않은 거라 장부상의 금액일 뿐 실제 자본금으로 유입될 가능성은 쥐뿔 없음.
또한, 각종 방송통신장비를 구매하면서 비용처리해서 상각해야 하는데 자산으로 잡고 있는 금액이 약 900억원. 여기에 나머지 총자산 중 상당 부분이 노후화된 아날로그 식 유선망과 장비.
이걸 다 반영하면 실제 순자산(자본)은 1천억~1500억 정도?
- 연간 매출 1.1조에 연간 영업이익 1000억인 것도 맞음.
하지만 홈쇼핑수수료 2300억원을 고려하면 유선방송업 자체로는 -1300억원 적자이며, 홈쇼핑 측이 '더 이상 못 살겠다!'고 악악대면서 홈쇼핑수수료를 -20% 감액하겠다고 통보한 상태. 홈쇼핑수수료가 이렇게 줄어들면 연간 영업이익은 500억원 이하로 추락할 것으로 예상됨.
- 유선방송 가입자 410만인데... 이 중 정상적으로 요금 내는 가입자는 230만 수준. 나머지는 자기가 유선방송 가입자라는 사실도 모르는 공시청가입자 / 해지 후 미처리 가입자 / 0원 가입자 등등. 뭐 이 중 상당수는 무리하게 인수한 소규모 유선방송사의 권역에서 발생한 문제지만 어쨌든 해결되지 않았잖아?
- 알뜰폰가입자 89만 중 10만 명은 가입계약서가 없음. 계약 후 3개월 내에 해지하는 비율이 엄청 높음.
- 태양광? 유지보수도 안 됨. 태양광사업이 속한 기업사업부는 허위매출 때문에 몇 명 감옥 가게 생겼음.
다시 정리하고 보니까 기가 막히네요. 이 회사의 지분 53%를 1조 원에 인수해야 할까요? 님 돈이면 사시겠습니까?
SK텔레콤 측에서 매각협상을 주도했던 사람들은 적잖이 당황했을 겁니다. 처음에 인수할 때에는 '유선방송 1위 사업자를 인수하면서 통합 유료방송 시장에서 단숨에 압도적인 1위를 확보하고 만년 경쟁자인 (쩌리2등) KT를 즈려밟아 버린다!'는 자신감이 넘쳐났을 텐데, 막상 실사 시작하고 현황을 까 보니 회사의 40% 가량이 부실로 드러났다면 뭐... 이럴려고 헬로비전 인수했나 자괴감이 들 겁니다.
그리고, 이미 유료방송시장의 대세는 IPTV로 넘어가 있었습니다. 통신3사 모두 몰랐지만 뻥튀기 허수가입자를 제외한 '실제 요금 내는 유료방송가입자' 기준으로는 IPTV가 더 많았어요. 핸드폰 결합할인에 상품권 뿌리기 신공 발동하면 가입자 뺏는 건 일도 아니었거든요.
2010년대 중반에 유료방송 가입-해지해 보신 분들은 아실 텐데, '이번에 핸드폰과 같이 IPTV랑 유선인터넷 구매하시면 특별혜택으로 ㅇㅇ상품권 30만원을 드려요 호갱님 호호호홍' 등의 전화를 받아 보셨을 겁니다. 말만 잘하면 이 상품권이 50만원으로 올라가기도 해요. 부가적인 할인 요소를 감안하더라도 가입자 1명 당 100만원만 투입하면 유선방송가입자를 IPTV가입자로 땡겨 오는 건 아주 쉽습니다.
(SK텔레콤 입장을 추정해 보면)
헬로비전의 가입자 230만 명을 통째로 개별접촉해서 IPTV가입자로 바꿔도 1인당 100만원의 영업비용을 투입해 총 2.3조 원이면 떡을 칩니다. 즉, 헬로비전의 유료방송 100%를 개별 영업으로 각개격파 인수해도 2.3조면 충분합니다. 실제로 시행한다면 1인당 100만원이 안 들 테니 대략 1.8조 정도 들이면 됩니다.
그런데... 이걸 번거롭게 53% 지분만 1조 원에 인수하고 / 잔여 지분을 공개시장에서 매수하다가 상장폐지하고 / 상폐 후 잔여 지분을 또 비싸게 매수하고 / 그 과정에서 허위매출을 비롯한 각종 문제를 모두 떠안으라구요? 뭐하러 그런 짓을 하죠?
직접 영업이 헬로비전 회사 지분 53%를 인수하고 후속조치를 하는 것보다 더 싸게 먹힙니다. 이건 명확해요.
이 상황을 뒤집고 회사 인수를 추진한 쪽이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이 쪽이 주장할 논리는 "IPTV+위성방송 콤보로 유료방송 시장에서 1위 사업자로 부상한 KT를 한 번에 따라잡는다" 는 경쟁자 배제 논리 뿐입니다. 국민게임이든 기업경영이든 내가 잘 되는 것보다는 경쟁자가 안 되는 게 더 중요하고, 방송통신시장처럼 사업자가 몇 안 되는 시장에서는 이 경쟁자 배제 논리가 킹왕짱이거든요.
다만, 이 경쟁자 배제 논리도 쉽지 않습니다. 이전 편에서 얘기한 대로 'SK 오너 분의 첩밍아웃 사건 때문에 현 정부가 매우 기분 나빠 하고 있다'는 상황이고, KT와 LG는 미친 듯이 반대하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지상파(KBS, MBC, SBS)도 SK의 헬로비전 인수를 반대하는 입장이었거든요.
- 1조 가치가 없는 것으로 확인된 회사를,
- 한국 정부 및 지상파 방송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안티 여론을 부추기면서,
- 오로지 'KT 엿먹이기' 라는 경쟁사 배제 논리 하나만으로
인수한다? 이걸 꼭 해야 합니까?
제가 SK텔레콤의 의사결정권자라면 포기합니다. 물론 공개적으로 포기할 수는 없으니 소극적으로 "노력을 안 하거나 적게 하는 것"으로 포기당하는 상황을 연출하는 게 더 낫습니다.
공정위의 기업결합심사가 엿가락처럼 / 모짜렐라 슈레드치즈처럼 쭉쭉 늘어져서 무려 8개월째 심사하고 있던 2016년 6월 경. SKT는 사실상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습니다. 적극적으로 포기할 수는 없으니 일단 '추진하겠다'는 립서비스는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노력 없이 포기당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당시의 저는 이 상황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헬로비전의 허위매출 사건을 그레이트CJ와 연결시키면 안된다구욧 빼애애액!"에 갇혀 별도의 사무실에 있었고, SK 측이 헬로비전을 실사하면서 어떤 식으로 관점을 바꾸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제가 직접 봤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습니다. 뜨내기 보따리장사인 경력직 과장 나부랭이가 상황 짐작한다고 한들 뭐 어쩔티비.
경력직은 낄끼빠빠. 알아도 모른 척, 몰라도 모른 척 아닥하고 시키는 일만 하는 게 장땡입니다. 책략성공률 100%의 슈퍼책사 '가후'도 대전략 따윈 신경쓰지 않았는데 21세기 직장인 경력직이 큰 전략 알아보면 뭐 하겠습니까. 그냥 물 흐르는 대로 흘러가야죠.
물 흐르는 대로 흘러갔고... 병신년인 2016년의 7월이 밝았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절망'이 찾아왔습니다.
2016년 7월 4일. 천조국 엄웨리커의 독립기념일에 헬로비전은 절망을 맞이했습니다. [매각 불허 결정]이라는 절망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