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허위매출 조사 대응 (2)

by 테서스

(앞 글에 이어서 씁니다.)


3. 대응활동의 목표


아파트 옆 조그만 상가건물(대략 스파 시설)에 40억원 규모의 TV와 냉장고와 인터넷 유료 회선을 공급한다. 가전제품 40억원 어치면 대략 대당 500만원 잡아도 800대 있어야 하고 스파시설에 TV깔아 봐야 100대 깔기 어려울 텐데 아무튼 40억원 어치 팔았다고 한다. 그 TV와 냉장고는 다 어디 갔을까?


참 쉬운 문제입니다. 그 스파 시설 방문해서 직접 보면 '아니 C발 여기에 무슨 가전제품 800대가 들어가? 님 지금 나랑 장난하심? 공급했다는 TV 냉장고 어디서 샀는지 못 밝히면 님들 전부 조세범처벌법상 허위세금계산서발급죄임. 콩밥 드셈.' 이라고 결론 내릴 수 있습니다.


즉, 헬로비전 허위매출 사건의 사실관계를 정리하는 건 매우 간단합니다. 현장 가 보면 게임 끝나요. 저 문제의 스파 시설이 공정률 90% 상태에서 공사중단되었고 안에 휑~하다는 걸 확인하면 더더욱 간단하게 끝납니다. 따로 물류창고를 빌려서 거기에 40억원 어치 가전제품을 쌓아 둔 게 아니라면 빼박캔트 반박불가입니다.


여기에 대응하겠다는 CJ지주사 법무실도 이 간단하고 쉬운 문제를 모를 리 없습니다. 사실관계는 너무 쉬워요. 어디서 대법원장 출신 전관변호사를 모셔 온다고 해도 사실관계를 뒤엎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앞에서 '닭갈비라도 뜯어야 한다.'고 했었죠? 사실관계는 명확하지만 여기서 법무실이 소정의 성과를 거둬야 합니다. 어떻게든 하나라도 '잘 한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사실관계가 거의 확정된 기업 형사사건에서 잘 한 일 만들기. 뭘까요?


답은 [꼬리 자르기] 입니다.



기업뿐만 아니라 모든 조직에 공통되는 것인데, 수사기관이 수사를 시작하면 '윗선'을 노립니다. 당연히 그렇겠죠. 의사결정권을 가진 상위 직급까지 쭉 타고 올라가는 게 수사의 기본입니다.


우선 아래 직급의 실무자들을 불러서 "당신 ~~에 대해서 팀장 지시 받았지?" 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진술을 확보하고 / 그 다음에 팀장 급 불러서 "당신 ~~에 대해서 담당 임원 지시 받았지?"로 족치고(!) / 임원까지 긍정적인 진술이 나오면 최종적으로 대표이사 및 오너 소환. 단독범행이 아닌 '조직 내부 범죄'라면 이렇게 갈 수 밖에 없습니다.


헬로비전의 허위매출 건도 이렇게 갈 게 뻔했습니다. 다만 당시 CJ그룹에서는 여기에 한 가지 '플러스 알파'가 있었죠. 앞에서 수 차례 언급한 [그레이트CJ] 입니다.


9년 동안 매년 24%씩 성장해서 회사 규모를 8배로 키우고 이걸 3번만 반복하면 그룹 전체 규모가 512배로 커져서 마이크로소프트 잡아먹고 지구를 평정하는 슈퍼 울트라 캡짱 대기업이 될 수 있다는 창렬한(!) 계획. 그 계획을 공표한 오너 분이 구속되고 가혹한 감옥생활을 못 견뎌서 결국 형집행정지 상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종의 신앙처럼 전 계열사를 옭아묶던 창렬한 계획.


그레이트CJ 때문에 허위매출이 나왔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않고 무조건 매출 만들어 오라는 압박이 있었던 건 그레이트CJ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헬로비전 기업사업팀과 그 관계자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술하면 안 되겠죠?


앞 장에서 얘기했듯이, 헬로비전의 허위매출은 2013년에 주로 발생했고 / 회사매각은 2015년 건이라 서로 연결지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 '허위매출로 흠집내기'는 가능하죠.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오너가 구속+형집행정지로 고통받는 사이 그레이트CJ 종교에 심취한 계열사가 결국 물건도 없이 허위로 매출을 만들어 버리는 뻘짓을 시전했다고 하면... 오너의 형사사건과 그 이후 사면에 상당히 나쁜 영향을 미칠 겁니다. 이건 반드시 막아야 했습니다.



CJ지주 법무실의 목표는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명확했고, 또 뻔히 보였습니다. [적정한 선에서 꼬리자르기를 하되, 그레이트CJ 어쩌고 하는 언급이 나와서는 안 된다. 그러면 지주사를 타고 오너까지 올라간다. 반드시 그레이트CJ 관련 진술은 막아야 한다.] 는 목표 하에 움직였고 그렇게 이끌어 갔습니다.


뭐, 저도 대충 목표 자체에는 동의했습니다. 말단 실무자라고 하지만 목표에 동의하지 않으면 일 하기 어렵죠. 회사에서 월급 받는 이상 회사가 받는 데미지를 최소화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법무실의 목표는 오너를 보호하는 동시에 회사를 보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문제는... '방법이 부실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실한 방법 때문에 이 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그 본성을 드러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4. 인간의 본성을 보다


기업 형사사건에 대응하는데 방법이 부실하다. 무슨 말일까요?


대놓고 말하겠습니다. 기업 형사사건에서 '꼬리자르기'를 성공시키려면 ''이 필요합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인 Show me the money를 실행해 줘야죠.


팀장이 책임지고 '다 내가 했습니다. 임원 분들은 몰라요.' 라고 하려면 팀장에게 돈을 주고 / 임원 급이 다 책임지려면 임원 급에게 돈을 주면 됩니다. 맨 하단 실무자는 어렵겠지만 관리자~임원 급에서는 '적절한 보상'만 있으면 얼마든지 꼬리자르기 할 수 있습니다.


그 적절한 보상이 당장 현금이냐 / 장래의 고용보장이냐 / 서면이냐 / 말 몇 마디로 서로 믿느냐 하는 차이는 있겠지만, '돈'으로 보상해 주면 누구든 다 '내가 했소! 나만 처벌하시오!'로 나올 수 있습니다. 흥부전에서 흥부가 돈 받고 곤장을 대신 맞아 주는 것처럼, 현대사회에서도 돈 받고 감옥 가 줄 사람 많습니다.


(당장 저부터도 누가 20억 준다고 하면 3년 정도 감옥 갈 수 있습니다. 군대 또 한 번 가는 셈 치면 되죠. 제가 다녀와서 자식들이 잘 살면 이 또한 좋지 아니하지 아니하다 할 수 없지 않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이렇게 Show me the money를 시전해 줘야 하는데... 헬로비전에는 큰 문제가 있죠. '이미 SK에 팔아버린다고 계약 체결했다!'는 문제입니다.


당시 헬로비전은 아직 CJ소속이긴 했지만 CJ 측에서 아무런 책임도 질 수 없는 회사였습니다. 그렇다고 매수하는 SK 쪽에 '우리 헬로비전이 허위매출로 수사 받을 예정인데 꼬리자르기 해야 하니 적절히 팀장 급에 고용보장 해 주시고 보상금도 좀 주세요 뿌잉뿌잉.' 하는 식으로 요구할 수도 없었죠. 그랬다가는 업무상배임으로 몇 명 더 떨려나갈 겁니다;;


헬로비전은 Show me the money를 시전할 수 없었습니다. 허위매출 조사 대응한답시고 와 있는 CJ지주사 법무실도 마찬가지였어요. 실직하는 수준을 넘어 인생이 망가질 위기에 처해 있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었고 보장할 수 없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법무담당자의 말빨로 형사피의자 될 사람들을 구워삶아서 적절히 꼬리 자르고 적절히 그레이트CJ 계획과 무관하다는 진술을 하게 만든다?


잘 될 리... 없겠죠?



허위매출 건으로 피의자가 될 직원들은 꽤 극렬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건으로 내가 개인적인 이익 취한 거 하나도 없고 오로지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죽어라 일만 했을 뿐인데 왜 내가 처벌받아야 되나. 나는 억울하다. 위에서 책임져라!" 는 반응은 기본이었죠.


그럼 결국 '위에서 책임져야' 하는데...


앞에서 잠깐 언급했었는데요. [법적으로 안 되면 법을 바꿔야지. 법무팀이 그거 하라고 있는 거야. 안 된다고 하지 말고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 봐]라고 얘기하신 임원 분이 있었습니다. 하필 그 임원 분이 이 허위매출 관련 본부장이셨어요. 심지어 허위매출 당시 실무자들과 함께 현장을 방문하기도 한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본부장님의 진술은...


"난 모르겠는데?"



임원? 별 거 없습니다. 평소에 뭐 세상 다 갈아엎고 법도 마음대로 주무를 것처럼 나대나대 나대지만 막상 본인이 감옥 갈 상황 되면 곧바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색투명한 무능인간이에요 뿌잉뿌잉.'으로 전환합니다. 별도로 임원의 남은 인생을 책임져 줄 돈이 투입된다면 다시 전능한 인간 행세를 하겠지만 그런 거 없으면 무색무취 투명인간 그 잡채입니다.


직원들은 빡쳤죠. 독박 쓰게 된 팀장 분도 빡쳤습니다. 한참 헬로비전 내부에 노조가 결성되던 때라 그 분노는 극에 달했습니다.


이거 법무담당자가 해결할 수 있을까요?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저는 저대로 피곤하고 힘들었었거든요.



가뜩이나 팔려가는 입장인데 CJ 지주사 쪽에서 온갖 잡다한 요구를 해 왔습니다. 허위매출 건에 대해 법무/기획/인사/감사/컴플라이언스 기타등등 어화둥둥 부서가 다 숟가락 얹으려고 했고, 각 지주사 부서별로 보는 포인트가 다르니 1가지 내용으로 보고서를 4~5개 써야 했습니다. 아주 그냥 병신년에 병림픽 제대로 했죠.


그러면서 회사 사무실을 나와 외부 사무실을 별도로 구했습니다. 거기서 '맨입으로' 허위매출 관련 임직원들을 진술연습시키고 우리가 원하는 목표에 맞게 진술하도록 암시하면서 무한반복 뺑뺑이를 돌았습니다. 대략 4개월 이상 그러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 경찰은 조사하러 나오지 않았어요. 나온다 나온다 말만 무성하고 결국 7월인가 8월까지 안 나왔습니다.


경찰도 대충 허위매출이 진행된 날짜를 보고 통빡 굴린 거겠죠. '이건 바로 조사해 봐야 헬로비전 매각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는 없다. 군불만 때자.'는 정도였을 겁니다.


결국 저를 비롯한 법무담당자들은 [양치기 소년]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허위매출 건에 대응한답시고 4개월 이상 사무실을 떠나 숨어 있는데 정작 조사는 안 나오는 상황에서 결코 좋은 얘기가 나올 리 없었습니다.



뭐, 안 좋은 얘기 한다고 해서 딱히 기분 나쁠 건 없었습니다. 예정대로 헬로비전이 매각되어 SK그룹으로 가기만 하면 다 포맷(Format)될 테니, 누가 뭔 소리를 하든 상관없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진짜 중요한데요.


[헬로비전 매각이 지연되고 있었습니다]. 11월에 공정위 기업결합신고를 했는데 5월이 넘고 6월이 되었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불안감이 점점 더 강해졌습니다. 매각이 지연되면 지연될수록 불안감이 커졌습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연탄까스처럼 스멀스멀 솟아오르는 불안감. 그게 저를 비롯한 헬로비전 직원들을 조금씩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keyword
이전 18화허위매출 조사 대응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