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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비전 시절의 화양연화(花樣年華)

by 테서스

1. 서론


화양연화. 꽃처럼 찬란하고 아름다운 시절.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


CJ헬로비전 재직 시절의 화양연화는, 아이러니(Irony)하게도 그 회사를 SK텔레콤에 팔아버린다는 보도가 된 후에 찾아왔습니다. 눈 뜨면 달려가고 싶은 회사를 만들겠다던 대표님의 시절에는 괴롭고 힘들고 피곤했었는데 의외로 그 회사를 딴 데 팔아버리겠다고 선언한 후에 좋은 시절이 왔습니다.


병신년이 얼마 남지 않은 2015년 10월 말, 회사창립기념일인 10월 30일에 충격과 공포로 찾아온 회사 매각. 그 충격이 가신 자리에 '화양연화'가 왔습니다. 제가 헬로비전에 재직한 4년 중 가장 편하고 행복했던 몇 달, 그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뭐 그리 길진 않았죠. 출근 안 하고 논 것도 아니었구요. 정상적으로 출근했고 정상적으로 일했으며 하루 8시간 꼬박꼬박 근무시간 채웠습니다.


그러나 그 '정상근무'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 이전이 '비정상적인 초과근무' 상태였다는 얘기겠죠.


그레이트CJ의 환상에 빠져 폭풍성장으로 몰아치던 게 멈춘 것만으로도 '화양연화'였습니다. 매일 저녁 먹고 퇴근하던 생활이 끝나고 [8시 반 출근 ~ 5시 반 퇴근]을 지켜 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습니다.


거기에 조금 더 좋은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성과급', 다른 하나는 '내 존재 가치를 인정해 주는 이직 제안'이었습니다.


서론은 이만 줄이고 조금 더 좋은 일 두 개를 되새겨 보도록 하겠습니다.



2. 성과급 : 무리한 계산방법이었지만 일단 받으니까 조으네


잠깐 얘기했듯이, CJ그룹은 각 계열사의 실적이 좋으면 추가 성과급을 지급합니다. 물론 실적 계산 방법이 상당히 짠 편이죠. 1년에 1000억 벌었다고 해서 무조건 성과급이 나오는 건 아니고 '전년도 실적 대비 향상 폭' 및 '목표 대비 달성률'을 따져서 성과급을 주는 방식입니다.


원래 헬로비전도 매년 조금씩 성과급을 주긴 했었습니다. 예전에 비해 성과급 규모가 줄어들었고 / CJ 고유의 '상위 직급일수록 더 많이 주는 방식' 때문에 사원~과장 레벨에서는 별로 많이 못 받았습니다만 아무튼 주긴 줬었죠.


그런데... 2015년 10월 30일에 기습적으로 매각 발표가 난 뒤에는 이 성과급을 좀 더 많이 줬습니다. 과장 기준으로 연봉의 30%에 육박할 정도로 많이 줬었어요.


물론 CJ그룹이 갑자기 혜자스러운 연봉정책을 펼쳐서 그랬던 건 아닙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두려움' 때문에 성과급을 많이 줬던 거예요. 헬로비전에 [노조]가 생겼거든요.



2020년대 중반에는 삼성그룹에도 노조가 있지만, 2015년 당시에는 삼성그룹에 노조가 생길 거라는 생각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삼성그룹의 모태(母胎)라는 자부심을 뿜뿜 뿜어내는 CJ그룹도 마찬가지였죠.


다만, CJ헬로비전에는 과거에 노조 활동 경험을 한 직원들이 꽤 있었습니다. 헬로비전 자체가 각 지역 유선방송사를 인수하면서 생겨났고 이후에도 계속 중소 유선방송사를 인수합병했으니, 과거 중소 SO일 때 노조활동을 하다가 헬로비전으로 인수된 후 노조를 해산한 경우가 은근히 많았습니다.


이렇게 노조 경험이 있는 직원들에게 기습매각 뙇! 하필 병신년 창립기념일에 SK텔레콤 노조를 통해 정보유출 똬돻!


뭐 저는 법무팀이고 만년 '사측'이니까 노조활동은 생각하지 않았지만, 초기에는 저 같은 100% 사측 직원들까지도 '이럴 거면 내가 노조 만들까?' 라는 생각을 할 만큼 빡쳤었습니다. 대놓고 말하면 'CJ그룹에 대한 배신감'이 크리티컬한 치명타로 끓어오르고 있었죠. 노조 생기는 건 당연했습니다.


'삼성 모태'임을 강조하며 무노조 원칙을 고수하던 CJ 입장에서는 '엄훠 엄훠 이건 뭐야 앗뜨거 팔아넘기기 전에 노조활동 시작하면 무서워욧!' 이었을 겁니다. 비밀리에 SK측과 협상하던 단계에서는 노조 문제를 생각하지 못했겠죠. 팔아넘긴 지주사 임직원들로서는 쩌리 손자회사의 노조 경력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기 어려웠을 것 같기도 하네요.



아무튼, CJ헬로비전은 다시 노조를 만들었고 CJ 지주사 쪽은 상당히 당황했습니다. 일단 직원들을 달래야겠죠.


그리고, 언제나 어디서나 직원들을 달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돈'입니다. Show me the money는 만고불변의 진리죠.


헬로비전은 2가지 보상안을 제시했습니다. 그 중 첫번째가 '성과급'이었고, 두 번째는 '매각 완료 후 위로금'이었습니다.


매각 완료 후 위로금은 당장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건 몇 챕터 뒤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죠. 매각 실패로 인해 더 큰 문제가 일어나긴 했지만 일단 2015년 당시에는 그럴 거라는 예상을 하기 어려웠구요.


성과급은 나름 괜츈했습니다. 당시 과장 급 기준으로 연봉의 30% 가까운 금액이 나왔었죠. 근로소득세 원천징수를 왕창 때리긴 했습니다만 꽤 쏠쏠했어요.


뭐, 기존의 CJ그룹 계산법으로는 이 정도로 많은 성과급을 줄 수 없긴 했습니다. 2012년 이후 계속 영업이익이 줄어들고 있었고 분기별로 주던 50만원 상품권도 (제가 입사한 지 4개월 째인) 2014년 3월부터 지급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성과급이 늘어나긴 어려웠겠죠.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헬로비전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고, 노조에 화들짝 놀란 CJ그룹은 헬로비전에 한해 특별히 성과급 산식을 바꿔 줬던 것 같습니다. 달달하게 성과급 받아먹었죠. 어익후 좋아라.


2016년 초반에는 꽤 행복해졌습니다. 더이상 야근을 안 하고 5시반 칼퇴근인데 성과급까지 두둑하면 참 좋죠. 이 맛에 직장생활 하나 싶었습니다.


거기에 조금 더 좋은 일까지. '이직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그것도, 둘씩이나.



3. 두 개의 이직 제안


프로이직러 경력직 분들은 거의 다 동의하실 텐데, 이직이 안 될 때는 정말 안 되다가 갑자기 2~3곳에서 이직 연락이 옵니다. 동시에 2곳 이상 면접 통과하는 경우도 생기죠.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는데요. 2016년 초반에는 조금 독특한 이직 제안 2건을 받았습니다. 하나는 CJ그룹 쪽이었고 / 다른 하나는 제가 'RPG 레드오션 투쟁기'에서 썼던 그 B건설사 쪽이었습니다.



CJ그룹 제안은 뭐 대단한 건 아니었어요. SK쪽으로 매각하기 전에 나름 성골~진골 CJ공채 출신들을 빼내고 있었고, 그 와중에 저 같은 6두품 경력직들에게도 은근슬쩍 스리슬쩍 'CJ계열사에 남아 보는 건 어때?'라고 넌지시 던져 보는 정도였습니다.


짧게 얘기하면, 그 때 CJ그룹에 남지 않은 건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당시에 제 주력 분야는 M&A와 공정거래 쪽이었고 그 역할 그대로 CJ그룹에 남았으면 아마도 'CGV'에 갔을 텐데... 2020년대에 '코로나19'라는 치명적인 크리티컬이 터지면서 CGV가 확 기울었죠. 자칫하면 지금쯤 희망퇴직 당해버렸을 겁니다.


뭐, 그 당시에는 나름 기분 좋았습니다. '허허 CJ그룹에서 남으라고 할 정도면 내가 쪼큼 일 잘했나 보네. 허허허.' 정도의 느낌적인 느낌?


물론 기분좋다고 해서 남으면 안 됩니다. 헬로비전이 SK그룹으로 매각되면 가만히 있어도 'SK맨'이 되는 거고 연봉도 CJ그룹 평균보다 더 오르면 올랐지 내려가진 않을 것 같았거든요. 나중에 희망퇴직 당하더라도 SK쪽 위로금이 더 많기도 하구요.


CJ에 남으라는 제안은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제 두 번째 직장이었던 곳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RPG 레드오션 투쟁기'에서 상당히 안 좋게 표현했었고 실제로도 사회적 이미지가 그리 좋지 않았던 B건설사. 저에게는 여러모로 참 고마운 회사지만 다른 직원들에게는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할 것 같은 저연봉 + 미칠 듯한 업무량'으로 악명이 높았던 B건설사.


그 회사에서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돌아올 생각이 없냐?" 라고.


제 자랑 같지만, B건설사에 다닐 당시에는 꽤 큰 업적작을 하긴 했습니다. 3개월 공사지연으로 40억원 지체상금을 맞은 현장에서 '앞 시공사의 지체기간 6개월을 합쳐 총 120억원에 대한 감액청구를 한다!'는 잡질(?)을 시전해서 결국 60억 받아냈었거든요.


그 때 (무늬만) 대리 2년차였고 실제로는 사회생활 경험이 4년도 안 되는 초짜였는데, 지금 같으면 함부로 못 할 말을 담담하게 떠들곤 했었습니다. '중재는 어차피 반이다', '제가 욕심 한 번 내 봤습니다', '당장 금액 줄이라고 하면 줄이겠지만 40억만 청구하면 절반밖에 못 받습니다' 등등.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는데 당시의 제가 딱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얘기들이 얼추 맞아떨어졌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도 인생 최대 성과를 냈고, 회사 실적으로도 이어졌습니다.


당시의 기억이 강렬했었는지, B건설사를 나온 지 3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 '컴백 제안'을 해 주시더군요. 과장 급 직원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직급 높은 분이 직접 나서 주기도 하셨었구요.



B건설사의 제안이 3개월 정도만 빨랐더라면. 혹은 6개월 정도 늦어졌더라면.


CJ헬로비전에서 미친 듯이 빡빡 구르며 이직 자리를 알아볼 때에 제안을 줬더라면. 혹은 SK텔레콤에 매각하는 게 실패로 끝난 뒤에 제안을 줬더라면.


그랬다면... 저는 B건설사로 돌아갔을 겁니다. 남들에게는 가혹한 블랙기업이지만 저에게는 기회의 땅이었고 또 실제로 그 기회를 잡아내기도 했던 회사에 다시 한 번 재입사하여 나름 열심히 일했을 겁니다.


하지만... 인생은 타이밍입니다. B건설사의 제안은 타이밍이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SK맨이 된다!'는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있을 때에 돌아오라는 제안을 줬으니 성공할 수가 없었습니다.



9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요즈음에는 가끔 와이프랑 그 때 얘기를 하곤 합니다. '헬로비전 매각 실패할 줄 알았으면 B건설에 가는 거였는데.'라고 얘기하며 당시를 되돌아보곤 합니다.


결국 안 가긴 했지만, 떠난 지 3년이 지난 회사에서 아직도 저를 기억해 주고 다시 돌아오라고 제안을 줬다는 게 은근 기뻤나 봅니다. 고시생을 가장한 게임중독 백수로 7~8년을 날려먹었는데 그래도 사회생활 어딘가에서 그 정도로 인정받았다는 게 영광스럽긴 했나 봅니다.


그 때가 제 헬로비전 생활의 화양연화였습니다. 그 때는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 고진감래 흥진비래.


짧았던 화양연화는 2016년 2월쯤에 끝났습니다. 우선 첫 번째 태풍을 맞이해야 했죠.


매각 예정 회사인 CJ헬로비전에 찾아온 첫 번째 태풍. [허위매출 조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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