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개인적으로 종교를 믿지 않습니다만, 그래도 각 종교에서 나오는 문구들을 인용하는 건 좋아합니다. 멋있는 말이 많잖아요.
[그 날은 도둑처럼 찾아오리라.] 이 문구는 아마 기독교 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논할 때 붙는 구절일 겁니다. 언제 어느 때 예수께서 재림하실지 모르니 늘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뭐 그런 의미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도둑처럼 찾아오는 일'이 그리 달갑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예상 못한 일에 대비한다고는 하지만 너무 얼척없는 일이 터지면 많이 당황스럽죠. 소위 말하는 '멘붕'이 옵니다.
2015년 10월 30일. 그 날이 헬로비전의 구성원 대부분에게는 '도둑처럼 찾아온 날'이었습니다. 하필 또 창립기념일이었죠.
1. 창립기념일에 매각이라니
명작 군발이 시트콤 '푸른거탑'에 자주 나오는 대사가 있습니다. [이런 젠장! 말년에 혹한기라니!]
2015년 10월 30일이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365일 중 하필 창립기념일에 뽷 맞춰서 예상 못한 일이 터져 버렸죠.
창립기념일을 임시휴일로 지정해서 다 노는 회사가 많습니다만, 헬로비전은 그 독특한 문화 때문에 전원 출근했습니다. '아침에 눈 뜨면 바로 달려가고 싶은 회사를 만들겠다!'는 야심(?)을 내세우고 그걸 문화로 정착시키겠다고 나대나대 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창립기념일에도 쉬지 않고 회사로 출근한 뒤 놀도록 했습니다.
뭐, 나름 창립기념일이니 '일하면서 놀자'는 컨셉으로 놀이기구 같은 건 여러 개 갖다놓긴 했습니다. 무슨 전자오락 게임기도 있었던 것 같네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하루종일 탁구치고 당구치고 게임하면서 놀 수 있게 해 뒀던 것 같습니다.
다만, 저는 그 날 전혀 놀지 못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5년째 헬로비전의 아픈 손가락이었던) '티빙(Tving)'을 계열사 E&M에 매각한다고 해서 한참 바빴었거든요.
잠깐 얘기했듯이, 티빙은 5년 동안 총 400억원 이상을 꼬라박으면서 계속 적자 상태였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2016년 이후로도 계속 적자일 거예요. '넷플릭스에 맞서는 토종 OTT' 치고는 많이 후달리죠...
아무튼 헬로비전은 국내 최초 OTT로 티빙을 만들었고 2015년 당시에도 꽤 많은 애착을 갖고 있었습니다만, 일단 E&M에 이걸 매각해야 했습니다. 지주사 차원에서 의사결정이 끝났고 메이저 계열사에 이관하라고 하니 그 말을 따를 수 밖에 없죠. 위에서 까라면 까는 게 직장인 마인드. 굽신굽신.
다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E&M에 돈이 없다]는 문제였습니다.
이것도 잠깐 얘기했는데, CJ E&M은 당시에 한국 문화산업을 좌지우지하는 거대자본이긴 했습니다만 막상 돈 버는 건 영 꽝이었습니다. 2015년까지 11년 연속 적자인가 그랬어요. 그 이후로 잠깐 흑자 나는 구간이 있었지만 2020년대에는 더더욱 심한 적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아무튼 E&M은 돈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티빙도 만년적자였죠. 돈 없는 회사가 빚더미 사업을 양도받는데 비싸게 살 리 없죠.
그렇긴 한데... 팔아먹는 헬로비전 입장에서는 헐값에 넘길 수가 없었습니다. 적자 폭이 크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설비투자비용이 있고 감가상각 전 자산가치로만 따져도 100억원 이상 되며, DCF법으로 미래가치를 평가하면 (그 기준 자체가 고무줄 잣대이긴 하지만) 최소한 투입비용 상당액은 받아야 매각의 정당성이 있죠. 계열사 간에 헐값 거래를 했다가는 공정위의 따뜻한(!) 직권조사를 받을 위험도 있으니 어떻게든 적정가격을 받긴 해야 했습니다.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매수인도 정해져 있었으며 매수인이 줄 돈 또한 몇십억원 수준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적절한 논리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 적정가격이 적정가격이 아니고 미래 성장성도 엉망이지만 그렇다고 미래 성장성이 엉망이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 양아치를 양아치라 부르지 못하고 망한 사업을 망했다고 부르지 못하는데 막상 매매가격은 망했다는 걸 전제로 책정해야 하는 상황.
직장생활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런 상황 참 잣같습니다. 답은 정해져 있는데 그걸 뒷처리 하는 실무진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갖다붙여서 보완해야 하니 실로 잣같죠. 창립기념일에 출근해서 이 일 하고 있으면 더더욱 잣같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잣같은 일은 빨리 끝낼 수가 없습니다. 결국 '야근'까지 준비해야 했죠.
창립기념일에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잣같은데 출근해서 하는 일도 잣같고 그 잣같은 일이 빨리 안 끝나서 야근까지 해야 하는 잣같은 상황. 무려 9년이 지났는데도 다시 돌이켜 보면 잣같습니다. 그 해가 병신년이어서 그런지 병신짓 크리티컬이 제대로 터졌던 것 같습니다.
(* 쓰고 나서 찾아보니 2015년은 병신년이 아니고 그 다음해가 병신년이었네요. 안 좋은 기억이 많아서 그런지 기억에 오류가 난 것 같습니다. 정정합니다;;)
아무튼 잣같은 기분을 삼키며 저녁 먹고 있었습니다. 창립기념일에 야근하려고 순대국밥 먹는 중이었고 어느새 시간은 6시를 넘어간 상태였으며 제가 속한 법무팀은 남들이 맥주 먹고 놀다가 퇴근한 빈 사무실에 올라가 티빙 매각의 근거논리가 될 의견서를 보완해야 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당시 팀장님에게 문자인가 카톡인가로 '긴급속보'가 전달되어 왔습니다. 뭐 국가 차원의 긴급속보는 아니고, 헬로비전 회사 차원의 속보였죠.
헬로비전 회사가 발표한 것도 아니고 그 모회사인 CJ오쇼핑이나 조모회사인 CJ지주사가 발표한 것도 아니었으며 거래상대방인 SK텔레콤이 발표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SK텔레콤 노조'를 통해 흘러나온 기사였어요.
[CJ헬로비전을 SK텔레콤에 매각한다]는 기사였습니다.
눈 뜨면 출근하고 싶은 (대표이사만 혼자 출근하고 싶은) 문화를 만든답시고 창립기념일에 출근. 남들 다 놀 때 말도 안 되는 근거논리 만든답시고 의견서 작성. 일과시간에 다 안 끝나서 야근까지.
거기에 진또배기 크리티컬한 치명타 뙇! 회사매각 똬돻!
'멘붕은 이런 것이다!'라는 느낌적인 느낌을 제대로 받았습니다. 아주 그냥 이가 갈리더군요. 이걸 비밀리에 진행한 인간들이 눈 앞에 있으면 젓가락으로 눈깔 쑤셔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불꽃처럼 일어났습니다.
(다른 글에 썼듯이 저는 소시오패스라서 눈 돌아가면 무슨 짓을 할 지 모릅니다. 물론 지금 만나면 눈깔 쑤실 일은 없어요. 평소의 저는 '선비' 소리까지 들을 만큼 얌전한 사람이거든요. 허허허.)
뭐, 당시에는 제 눈 앞에 이걸 진행한 인간들이 없었어요. 대충 CJ지주사 쪽 누군가가 진행하긴 했겠지만 그게 누군지 모릅니다. CJ헬로비전 재무팀에서 근무하는 (거짓말 잘 하는) 인간 하나가 며칠 전부터 나대나대 하면서 뭐 대단한 일 하는 양 거들먹기리긴 했지만 어차피 그 인간도 말단 꼬리일 뿐이니 눈깔 쑤셔버릴 이유는 없구요.
아무튼 '멘붕'이었습니다. 티빙 매각 논리 따윈 아몰랑. 빨리 퇴근해야지.
9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2015년 10월 30일 저녁 6시 무렵의 기억. 그렇게, 제가 다니던 회사가 매각되는 상황이 도둑처럼 찾아왔었습니다.
(그 날의 임팩트가 컸었는지 자연스레 말이 길어지네요. 다음 글은 챕터를 바꿔서 이어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