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규직보다 더 뛰어났던 파견직 직원
2014년 초반. 당시 CJ헬로비전 법무팀에는 '정규직 이상으로 성실하고 발전가능성이 높은 파견직 직원'이 있었습니다. 명작웹툰 미생(未生)의 '장그래'를 떠올리게 하는 직원이었죠.
미생의 장그래는 바둑 때문에 정규교육을 소홀히 한 것으로 나오는데, 이 직원은 바둑이 아닌 예체능 쪽으로 가다가 중간에 그만둔 케이스였습니다. 불가피하게 최종 학력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2년제 전문대를 나왔고 법무 쪽은 전혀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매우 성실했습니다. 또 막상 일을 시켜 보면 잘 했습니다. 자료정리도 잘 했고, 요령을 가르쳐 주기만 하면 법원에 제출할 서면도 작성했습니다. 원래 똑똑한 사람이어서 문장도 잘 썼구요.
물론 보완할 게 많긴 했습니다. 회사 법무팀 일이라는 게 대학 때 4년 전공한 사람들도 신입 시절에는 어버버거리는 일인데, 중~고등학교 시절에 정규교육을 거의 패스하고 예체능에 집중하던 사람이 실무로 직접 배우는 데에는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뭐 굳이 이 직원의 흠을 잡자면 '너무 정직했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습니다. 제가 간단한 소송서면을 작성해 보라고 시킨 적이 있었는데, 저희 회사에 불리한 사실관계도 다 기재하더군요. 나중에 수정하면서 '법무는 거짓말은 안 하지만 진실을 다 말하지 않을 수는 있어요. 밑장빼기 같지만 세상 일이 다 그래요.' 라고 설명(?)해 주긴 했었습니다;;
정직한 게 유일한 흠이 될 정도로 열심히 잘 했습니다. 대다수 파견직~계약직 직원들이 적당히 맡겨진 일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직원은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자기 일에 집중했고 늘 새로운 걸 배우려 노력했습니다.
당연히 평가가 좋았습니다. 이 직원을 뽑았던 전(前) 법무팀장님뿐만 아니라 2014년 당시의 법무팀장님도 매우 좋게 평가했고, 주위 팀의 평가도 매우 좋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CJ그룹에는 '파견~계약직의 정규직 전환' 제도가 있었습니다. 대졸공채보다 한 직급이 낮긴 했지만 일단 전환되기만 하면 확실한 정규직으로서 고용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직원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가 만장일치로 '정규직 전환해서 오래 다니도록 해 주자.'는 의견이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죠.
미생 장그래처럼 직급을 초월한 대활약을 펼치는 건 아니었지만. 파견직이 임원 때려잡는 신화(?)를 쓰는 건 아니었지만.
성격 무난하고 늘 맡은 일에 열심이며 무엇보다도 발전가능성이 높았던 20대 초반 직원. 그 사람을 정규직으로 바꿔 주려 했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당시 부임한 지 얼마 안 됐던 법무팀장님도 노력했고, 주변 팀의 팀장님들도 다 응원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절차도 거의 다 진행되었습니다. 해당 파견직 직원의 정규직 전환에 대해 경영지원실장 결재까지 났었고, 모두 다 이 직원의 새로운 인생 2막을 환영해 주는 분위기였습니다.
인사팀에서 잡질을 하기 전까지는 그러했었습니다.
4. 잡질하는 양아치 인사팀장
해당 직원의 파견계약기간이 만료되기 이틀 전. 인사팀의 차선임자가 법무팀장과 저를 따로 불렀습니다. 그러더니 엑셀로 정리해서 출력한 서류 한 장을 들이밀더군요.
"안타깝지만 인적성 검사 결과가 이렇게 나왔습니다. 대상자 정규직 전환은 내규상 불가능합니다." 라는 말과 함께.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서류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대상자, 즉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신청해서 내부 결재까지 끝난 파견직 직원에 대해 CJ그룹 고유의 인적성 검사를 실시했다.
- 해당 인적성 검사 결과, '일반 정직' 항목은 80점을 넘어 양호한 것으로 나왔다.
- 그런데 이 인적성 검사 항목 중 'CJ그룹 특유의 정직 평가' 항목이 있는데 이 점수가 40점대로 나왔다.
- 즉, 일반적으로 보면 매우 정직한 사람이지만 CJ그룹의 특별한 정직 평가 방법으로 보면 부정직한 사람이다. 응?
이 말인지 방구인지 알 수 없고 그 출처가 되는 평가자료가 뭔지도 알 수 없으며 그저 엑셀로 표 하나 찍 만들어서 수치만 입력한 자료 앞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가진 법무팀장과 나름 법무팀으로 짬 좀 먹었다는 저(당시 과장 1년차)는 아무 말 못 했습니다. 전혀 예상 못한 일을 겪으면 사람이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라 멍때리게 되는데 그 때 당시 법무팀장님과 제가 딱 그랬습니다.
당일날에는 아무 대응을 못했습니다. 저 엑셀자료의 근거를 내놓으라거나 이게 과연 정확한 수치인지 의심스럽다거나 하는 얘기를 한 마디도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변명 같지만 그 때 당시에는 '조작된 자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습니다. 나름 20대 기업집단에 들어가고 삼성그룹의 모태라고 어깨뽕 잔뜩 들어가 있는 CJ그룹에서 또 나름 계열사 인사팀이랍시고 어깨뽕 잔뜩 들어가 있는 인간들이 허위자료를 들이밀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를 안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어쩌면 당일 저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10년 전 일이라 기억이 명확하진 않네요.)
[일반 인적성 기준으로는 정직 점수가 80넘 넘는데 CJ고유의 인적성 기준으로는 정직 점수가 40점 대에서 정직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이 말인지 방구인지 알 수 없는 헛소리에 대해 불 같은 분노가 밀려왔습니다. 하루 전에 본 한장짜리 허접한 엑셀출력본 표에 찍혀 있던 점수가 과연 합리적인 것인지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고 잔뜩 화가 났습니다.
일단 예전 법무팀장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제가 본 서류의 내용에 대해 말씀드렸고, 이 문제 때문에 일 잘하던 파견직 직원이 정규직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그대로 퇴사해야 한다는 점을 설명드렸습니다.
그리고 대략 알아본 바...
1) 해당 인적성 자료 자체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단, 이는 추정일 뿐이고 인적성 검사 자료 자체를 다른 부서에서 공개적으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진실을 알아낼 방법은 없다.
2) 해당 인적성이 조작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기존에 다른 회사에서는 인적성 검사를 필수로 하지 않고 '참고사항'으로만 보기 때문에 인적성 검사 결과와 무관하게 정규직 전환은 가능하다. 심지어 CJ헬로비전에서도 인적성 점수가 낮은데 채용하거나 / 정규직 전환을 한 사례가 있다.
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지금 10년이 지나서 다시 글을 쓰는데도 열받네요. 당시 인사팀장 이 개새끼 양아치 새끼야. 니 자식새끼가 똑같은 일 당하기를 간절히 빌어 주마. 니 자식새끼도 거짓말하는 인사팀장 만나서 똑같이 엿먹으라는 축복을 내려 줄게. 니 업보로 자식이 고통받는 꼴을 보면 속이 후련해질 것 같다.
열받긴 하지만...
당시의 저는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과장1년차였던 법무팀 차선임자는 파견직 직원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사팀과 싸우고 싶진 않더군요. 저 쪽이 명백하게 양아치 맞고, 사회적 약자를 짓밟아 더러운 KPI 숫자만 맞추려는 의도라는 게 뻔히 드러나지만... 그 이상 뭔가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저는 침묵했습니다. 인사팀과 싸워서 제 진급 길이 막힐까봐 나서지 못했습니다. 인사팀이 서류조작으로 사기쳤을 가능성이 90% 이상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한 '회사 내규상 전환 불가능하다'는 게 명백한 거짓말이라고 확인되었는데도 아무 말 하지 못했습니다.
[침묵하는 자 또한 공범이다.] 라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저도 공범이겠죠. 결국은 그러합니다.
일 잘하던 파견직 직원은 주말에 나와서 조용히 짐을 쌌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마치 처음부터 이 더러운 회사에 없었던 것처럼 빈 자리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양아치 인사팀장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돌아다녔습니다. 그 인사팀의 중간관리자(과장 급) 한 명이 근무시간에 창고 가서 퍼질러 자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고 회사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흉흉해지는데 인사팀장은 혼자 승진했습니다.
인사는 만사 맞습니다. 양아치가 인사팀장이랍시고 모가지에 힘 주고 다니면서 잡질하면 회사가 급격히 망가지는 걸로 볼 때, 인사는 만사 맞습니다.
그리고 저런 양아치를 계열사 인사팀장으로 세워 놓고 말인지 방구인지 알 수 없는 자체 정직 기준을 인적성검사에 반영했다는 CJ그룹 또한 영 비실비실하고 있죠. 이 또한 인사는 만사 맞습니다.
그 일 잘하던 파견직 직원 분이 지금은 더 잘 되어 있기를 기원합니다. 공부를 더 하셨을 수도 있고 짧은 경력을 살려 재취업하셨을 수도 있겠지만, 어딘가에서든 그 양아치 인사팀장의 애새끼보다는 더 잘 되었기를 기원합니다.
제 작은 소원이 이루어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