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러모로 갑갑한 상황
앞에서 2014~2015년 당시의 CJ헬로비전 상황을 정리했습니다. 4개 신사업 전체에서 말아먹는 데다 추후 허위매출로 밝혀지는 거래 때문에 크게 힘들어지고, 인사팀장의 양아치 짓으로 회사 분위기가 흉흉해지며, 그 와중에 그레이트CJ 종교 때문에 미친듯이 사람들을 쪼아대는 상황. 홈쇼핑수수료 한 방으로 다 커버하긴 했지만 그거 빼면 이미 -1000억 이상의 적자로 휘청되던 상황.
여기에 더해, 헬로비전 법무팀에 국한된 갑갑한 상황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CJ지주사 법무실의 영향력 확대]라는 상황이었죠.
앞에서 잠깐 말했듯이, 2013년 경 CJ그룹의 오너가 구속되었습니다. 수감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수술을 이유로 형집행정지를 하긴 했지만 그런다고 구속기간이 줄어드는 게 아니죠. 형량은 채우지 못하는데 병원에서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 지속되었습니다.
오너 리스크를 어떻게든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룹 전체 차원에서 형사대응을 강화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법무 라인이 대폭 커졌죠. 지주사 법무팀이 법무실로 승격되었고, 검찰 출신 변호사가 부사장 직급으로 영입되었으며, 신참~고참 변호사들도 대거 영입되었습니다.
뭐... 이렇게 영입해서 곧바로 오너 리스크를 해소했으면 모두가 해피 땡큐베리감사 결말이었겠죠. 그렇게 안 되니까 문제일 뿐.
오너 리스크에 대응한다고 해서 변호사 중심으로 대폭 인력을 확충했지만 그걸로는 무죄를 받아낼 수가 없습니다. 이미 확정된 팩트(Fact)는 변호사 숫자를 늘린다고 바뀌는 게 아니에요. 대법원장 출신을 전관으로 영입한다 해도 마찬가집니다.
오너 리스크 사건이 항소심으로 넘어갈 때쯤, 훌쩍 덩치를 키운 CJ지주사 법무실은 다른 일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결론이 바뀌지 않을 오너 리스크 사건에 몰빵하다가는 한순간에 훅 가는 수가 있었고, 몰빵한다 해도 더 할 일도 없었거든요. 일단 월급 받는 이상 뭔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지주사 법무실이 찾는 다른 일]. 뭐가 있을까요?
이것 또한 대충 뻔합니다. 3단구조 지주사 체계에서 윗선이 할 일 없으면 아랫선 쪼는 거죠. 인간사(事) 어디나 똑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주사가 아래 계열사들을 쫀다고 해서 아무나 막 쪼아댈 수는 없습니다. 계열사가 나름 짱짱하고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힘 좀 쓰는 경우에는 지주사가 뭔 얘기 해도 제대로 먹히지 않습니다.
즉, 지주사가 계열사를 쪼아대려면 '만만한 계열사'를 타겟으로 해야죠. 힘 좋은 계열사에 대해서는 함부로 개입 못 합니다.
어어, 그런데...
앞에서 CJ그룹 계열사는 메이저/마이너 로 나뉜다고 했었죠? 대충 제일제당, 대한통운, E&M 등의 회사는 메이저 / 헬로비전을 포함한 여러 회사는 마이너. 다만, 헬로비전의 경우 마이너지만 돈은 메이저 급으로 버는 마이너. 그렇게 분류했습니다.
제일제당은 지주사가 뭔 얘기 한다고 해서 휘둘릴 회사가 아닙니다. 대한통운은 원래 CJ그룹보다 인지도가 더 높았으니 더더욱 안 먹히죠. E&M은 협조적이었지만 방송문화콘텐츠 전체로 당시 정부에 충성하는 분위기를 연출 중이었으니 딱히 법무 쪽에서 뭐 할 건 없었습니다.
즉, 이것저것 빼 놓고 보면 '헬로비전이 제일 만만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뭐 헬로비전 직원 입장에서는 많이 억울하겠지만 현실이 그랬어요. 제가 지주사 법무팀에 빙의해서 본다고 해도 동일한 결론 내렸을 겁니다.
또 앞에서 얘기했지만, '2014년에 법무팀장님이 바뀌었다'는 언급을 했었죠? 이게 결국 따지고 보면 CJ지주사 법무실의 영향력 확대 건과 연관됩니다. 헬로비전 자체적으로 법무팀장을 뽑거나 영입하지 않고 지주사 법무실에서 찍어 내리는 형태로 진행된 거죠.
잘... 됐을까요?
긴 얘기를 짧게 하면 잘 안 됐습니다. 새로 오신 법무팀장님은 1년 만에 예전 회사로 돌아가 버리셨습니다. 영 거시기 한 결말이네요.
그렇다고 그 아래 차선임이었던 제가 잘 됐을까요?
이 또한 긴 얘기를 짧게 하면 저도 영 꼬였습니다. 팀 분위기 흐트러지면 차선임자도 타격을 많이 받죠. 직급도 한참 낮으니 여기저기 휘둘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차피 경력직으로 들어온 프로이직러가 직장생활에서 꼬인다? 이러면 이직해야죠. 그게 정답입니다.
이직이 그리 쉽지 않았을 뿐.
2. 이직이 잘 안 되네
2014~2015년 당시, 저는 열심히 이직 자리를 알아봤습니다. CJ그룹 계열사에서 법무팀 과장으로 조기진급했다는 걸 최대한 어필하면서 어떻게든 다른 회사로 옮기려고 했었습니다.
물론 대놓고 하면 안 되죠. 당시 CJ그룹은 '이직 시도하는 잡것들은 회사 업무 충실도가 낮다는 걸 셀프증명하고 있으므로 징계 대상이다!'라는 기적의 논리(!)를 펼치면서 감사를 진행했었고, 거기에 걸려들면 이후 진급은 물먹을 게 뻔했습니다. 요즘도 그런 기적의 논리를 펼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당시에는 그러했었습니다.
(솔직히 요즘도 CJ그룹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다면 아마 노동청에 신고당했을 겁니다. 주52시간 근무가 정착되면서 근무시간 이외에 뭘 하든 간섭하기 어려워졌죠. 10년 전에도 노동청에 신고하려면 신고할 수 있었겠지만 그 때는 사회적 분위기가 지금처럼 근로자에게 우호적이진 않았었습니다.)
아무튼 은근슬쩍 스리슬쩍 아무도 모르게 이직 시도를 했었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네요. 서류통과가 안 됐습니다.
프로이직러(!)로서 '이직의 기술'을 쓸 수 있게 된 2023년의 저라면 왜 이직이 안 되는지 잘 알 수 있었을 겁니다. 일단 현재 재직중인 회사에 다닌 기간이 너무 짧았어요. 2년 만에 쇼핑하듯 이직 자리를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영 거시기 하죠. 뽑는 사람도 부담스러울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단기간에 이직하려는 사람을 뽑는 회사가 있다면 반대로 프로이직러 측에서도 그 회사가 정상적으로 굴러가는지에 대해 한번쯤 의심해 봐야 합니다. 급히 사람 뽑는 회사는 그만큼 내부적으로 급한 사정이 있다는 얘기고, 대부분의 경우 그 '급한 사정'은 근로자 측에 좋지 않은 사정이거든요.
뭐, 2014~2015년의 저는 여기까지 생각하진 못했습니다. 그저 구직 사이트 공고를 보고 서류 냈다가 광탈해서 실망할 뿐이었죠.
그렇게 이직이 안 되는 동안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하루하루는 길지만 1년은 금방이더군요.
그리고... 다시 좀 안정되었습니다. 익숙해졌습니다.
3. 익숙해진다는 것
예전에 다른 글에서 '업무 숙련도'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요. 이직의 기술에서 썼었나 뭐 그랬습니다.
처음 유선방송회사로 이직했을 때, 저는 해당 업종에 대해 전혀 몰랐습니다. 방송법, 전기통신사업법, 통신망법, 개인정보보호법 등등 방송통신 분야에서 주로 적용되는 법령에 대해서도 몰랐죠. 유선방송 내부에서 쓰는 알파벳 단축어도 알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낯선 환경에서 낯선 용어를 들으며 낯선 법률 분야를 찾아보고 판단하는 일은 생각보다 스트레스가 큽니다. 특히, 저처럼 인생 7년 이상을 날려먹고 늦깍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어떻게든 조기진급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스트레스가 큽니다.
그러나... 좋은 말이 있죠. [이 또한 지나가리라(Et hoc transivit. 에트 혹 트란지비트.)]
솔로몬인지 다윗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고대의 왕 한 명이 반지에 새겨 뒀다는 구절, '이 또한 지나가리라'.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프로이직러에게도 이 명언은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다 지나가더군요.
어려웠던 방송법무 일에 조금씩 익숙해졌습니다. 처음에는 밤 9시 10시까지 일해도 버거웠던 일들이 서서히 반복숙달되면서 1~2시간 만에 끝낼 수 있는 일이 되었고, 과거의 경험으로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의 업무가 되었습니다.
유선방송업이 몇 년이나 더 갈지는 알 수 없었지만 '버틸 때까지 버티자'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뭐 꺾였다고는 하지만 일단 한 해에 1000억원은 버는 회사였고, 제가 떠나왔던 건설업종 기준으로는 기적의 영업이익률 10%를 가뿐히 달성하는 회사였습니다. 건설회사 다니다가 법정관리 들어가는 꼴을 볼 바에는 그냥 헬로비전에 남아 있는 게 오조오억배 더 나았습니다.
앞에서 얘기했던 '지주 법무실의 영향력 확대'도 적절히 적응했습니다. 새로 오신 법무팀장님은 기존의 헬로비전 선배들을 존중하면서 친해지려고 노력하시는 분이었고, 기존 법무팀장님을 비롯한 선배 분들도 적절히 지주 법무실의 영향력을 인정하면서 win-win하는 관계로 나아가려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정생활도 안정되었습니다. 이 때쯤에 집을 샀죠.
그 때가 초이노믹스 어쩌고 떠들면서 '다들 빚 내서 집을 사시오.' 전략을 국가 단위에서 발동 걸 시점이었는데, 적절히 대출 받아서 경기도에 아파트 한 채 장만했습니다. 물론 와이프 명의고 제 명의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가족 전체적으로 보면 '내 집 한채 마련했다!'고 할 수 있었죠.
차는 없지만 집은 있는 남자. 주말이 되면 CJ임직원 할인 -35%를 이용해 빕스 차이나팩토리 투썸플레이스 등등의 혜택을 누리는 남자.
젊은 날에는 인생을 많이 날려먹었지만 그나마 40대 초반에는 남들 사는 수준까지는 따라잡은 남자.
익숙해졌습니다. 그레이트CJ 종교, 헬로비전 고유의 다양한 내부 문제, 방송통신업의 고유한 분쟁들, 그 모두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렇게 어느덧 3년차를 넘어갔습니다. 2012년 10월 15일부터 헬로비전에 출근하여 어느새 3년이 넘었고, 과장2년차로서 꽤 노련하게 법무업무를 처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 10월 30일. '충격과 공포'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CJ헬로비전을 SK에 매각한다]는 상황이 정말 도둑처럼 갑자기 훅 찾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