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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처럼 찾아온 회사 매각 (2)

by 테서스

(앞 편에 이어서 씁니다.)


2. 충격과 공포. 그리고... 기대감


(1) 충격과 공포


병신년이 되기 2달 전의 창립기념일에 도둑처럼 찾아왔던 '회사 매각' 소식. 이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에는 당연히 크게 충격받았습니다. 그리고 두려웠습니다.


Shock and Awe. 아마 2차 이라크 전쟁 때 미군 작전명이 '충격과 공포'였을 겁니다. 압도적인 공군력과 포병전력으로 무시무시한 충격을 줘서 얼이 빠지게 만든 뒤 공포에 질린 이라크 병사들을 쉬운 타겟으로 털어버리겠다, 뭐 이런 컨셉이었죠.


다니고 있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매각되었다고 발표나고 심지어 그 발표가 '매수하는 회사 노조'를 통해 언론에 정보를 흘리는 식으로 유출되었다면... 직장인 입장에서는 만만찮게 큰 충격입니다. 특히 부양가족이 있는 외벌이 직장인이라면 더욱 더 큰 충격이겠죠.


아주 자연스럽게 '구조조정'이 연상되었습니다. 특히, 불과 1년 전까지 불꽃 M&A를 진행하는 주체였던 CJ헬로비전 입장에서는 '인수 후 구조조정'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CJ헬로비전 이름으로 지방 유선방송사들을 인수하면 몇 달 뒤에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었고 그 지방 유선방송사 직원 중 몇 명은 짐 싸야 했었죠. 인수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일이었지만 짐 싸서 나가는 사람 입장에서는 피 마르고 이 갈리는 일이었을 겁니다.


이제는 입장이 바뀌었습니다. 헬로비전은 인수주체가 아니라 '매각 대상'이 되었습니다. 헬로비전이 지방 유선방송사 직원들을 상대로 휘두르던 칼날이 이제 헬로비전의 목줄기를 노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냥감이 된 사냥꾼. Hunter hunted.


공포가 밀려왔습니다. (제가 모두 인수한 건 아니지만) '인수하는 입장'에서 5개의 SO를 인수할 때에는 느끼지 못했던 '인수당하는 약자의 설움'이 성난 파도처럼 밀려와 외벌이 직장인을 휩쓸었습니다.


다만, 그 충격과 공포가 오래 가진 않았습니다. 노조를 통해 정보가 유출된 인수자 SK텔레콤 측이 꽤 발빠르게 움직였고, 나름 좋은 소식들을 흘리기 시작했거든요.



(2) 기대감


2015년 당시 헬로비전에도 SK텔레콤 출신이거나 / SK텔레콤과 연락이 되는 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알뜰폰 사업을 하면서 통신3사 출신들을 많이 영입했고, 인터넷 쪽 사업을 통해서도 SK브로드밴드 쪽 분들을 채용한 경우가 많았거든요.


당연히 이런 분들이 빠르게 정보를 확인했습니다. 재직중인 회사가 팔려 가는데 최대한 빨리 많은 정보를 입수해야죠. 회사 일보다 이게 오조오억배 더 중요합니다.


그 정보가 CJ헬로비전 내부에도 퍼져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보 대부분은 나름 합리적인 근거를 가진 좋은 소식들이었습니다.



일단 당시 무선통신-유선통신 및 IPTV-유선방송 상황을 살펴보면...


무선통신 쪽은 SK텔레콤, KT, LG유플러스 3사가 과점 형태로 장악하고 있었는데, 유선통신(인터넷) 쪽은 잠시 춘추전국시대를 거쳤다가 거의 통신3사 주도로 재편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에 인터넷 중심이었던 회사들이 M&A로 통신3사의 자회사가 되었었죠.


그리고, 이렇게 '통신3사의 자회사가 된 인터넷 회사의 인력과 조직'이 IPTV 쪽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IPTV 시스템이 인터넷을 통해 유료방송을 송출하는 방식이니, 기존 유선 인터넷 인력과 조직이 이 업무를 담당하는 게 자연스럽죠.


KT와 LG유플러스 쪽은 이 인터넷+IPTV 업무를 회사 내에 통합시켰습니다. 인터넷 회사들을 합병시켜서 조직을 융합시키는 과정이 있었을 거예요.


반면 SK텔레콤은 이 인터넷+IPTV 업무를 별도의 자회사에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당시 'SK브로드밴드'가 그 자회사였죠.



즉, CJ헬로비전이 SK텔레콤으로 매각되어 SK그룹으로 편입되면 당분간은 [SK브로드밴드-SK헬로비전 내부경쟁 체제]가 됩니다. SK브로드밴드는 유선인터넷과 IPTV, SK헬로비전은 유선인터넷 일부 및 유선방송 사업을 가지고 서로 협력하면서 동시에 경쟁하는 구도가 될 것이고, SK텔레콤은 두 유선방송 자회사의 직원들에게 거의 동등한 대우를 해 줬겠죠.

(물론 이 매각 건은 실패했습니다만 2015년에는 이게 실패할 거라는 생각 자체를 못했습니다.)


당시 CJ헬로비전 임직원 입장에서는 '기존에 SK브로드밴드 측이 어떤 대우를 받았는가?' 하는 게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결국에는 SK브로드밴드의 임직원에 대한 처우가 인수 후 SK헬로비전 측에도 그대로 적용될 테니까요.


이에 대한 정보는... 꽤 긍정적이었습니다. SK브로드밴드 임직원들이 나름 괜츈하게 잘 살고 있다고 알려졌거든요.



SK텔레콤은 인터넷 회사를 인수하면서 과격한 구조조정(!)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표이사 및 주요 임원들은 물러났겠지만 직원들은 대부분 다니던 회사를 잘 다녔고, 자연스레 SK그룹의 구성원으로 편입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순혈의 SK공채 출신'이나 '한국에서 손꼽히는 상위 기업 SK텔레콤 정규직'에 비해서는 조금 낮은 대우를 받았겠죠. 같은 SK라고 해도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는 달랐을 겁니다. 연봉, 복지, 그룹 내에서의 위상, 처우 등에서 SK브로드밴드가 많이 밀렸을 거예요.


어어, 그런데 말입니다.


(저 자신을 기준으로 볼 때) 이 '그룹 내부의 위상 차이'는 CJ에 있어도 똑같습니다. 저는 어차피 '경력직'이고, CJ헬로비전은 CJ그룹 내부에서 3단 지주회사 체계의 제일 하단에 위치하는 손자회사였거든요.



드라마 '미생'에서 중반부쯤 팀에 합류하는 과장이 경력직의 설움 비슷한 걸 잠깐 얘기하긴 합니다. 공채출신들은 실수를 해도 만회할 기회를 주고 애당초 위험부담이 큰 직무에는 보내지 않지만, 경력직으로 입사한 사람들은 늘 위험부담이 큰 직무에 배치되고 한 번만 실수해도 그냥 떨려 나간다는 식으로 하소연을 하긴 하죠.


뭐, 이건 당연한 겁니다. 한 번이라도 이직했으면 그때부터는 공채 프리미엄 같은 거 없어요. 경력직은 당장 성과를 내야 하고 또 그런 만큼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소연할 이유도 없고 들어 줄 사람도 없습니다.


대신 '회사의 주인이 바뀐다'는 상황이면... 매도인 측 입장 따윈 조까. 난 넘어가는 회사에 충성할 거야.


게다가, 그 새로 바뀌는 주인이 당시 재계3위인 SK그룹입니다. 똑같이 손자회사 레벨에서 경력직으로 근무할 거면 재계20위권 CJ보다재계3위 SK가 훨씬 낫죠. 오조오억배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1.5배 정도 더 낫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SK텔레콤 직원들의 의견이라는 카더라 통신에 따르면, SK텔레콤 측에서는 CJ헬로비전의 업무역량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기존 중소 인터넷회사 출신인 SK브로드밴드 직원들은 연령대가 높은 편이고 중소기업 마인드가 남아 있는 반면 / CJ그룹에서 잘 훈련되고 나이도 젊은 CJ헬로비전 직원들이 막상 SK그룹으로 넘어오면 더 잘 할 거라고 생각한다는 카더라 소식이 있었습니다.


(뭐 현실은... CJ헬로비전의 직원 중 상당수가 '중소 유선방송사 출신'이어서 딱히 인터넷회사 출신들과 비교해 업무역량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만... 일단 새 주인이 될 SK텔레콤 측이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좋은 거죠.)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CJ그룹 공채 출신이거나 / 그에 준해서 CJ그룹과 인연이 깊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SK로 매각되는 게 영 떨떠름할 수 있지만


- 이 글을 쓰는 저처럼 경력직인 사람들 입장에서는 SK로 가는 게 땡큐베리감사


- 기존에 SK브로드밴드를 인수할 때에는 무리한 구조조정도 없었고 인수 후에도 SK그룹의 일원으로서 잘 적응해서 살고 있음


- 오히려 SK텔레콤 측은 CJ헬로비전 직원들을 좋게 평가하고 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음



이 정도 정보를 얻는 데에 며칠 걸리지 않았습니다. 다들 자기 일이 되니 정말 열심히 알아보더군요.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튼 결론은 '꽤 괜찮을 것 같다'였습니다. 비록 회사 매각 자체는 도둑처럼 급작스럽게 찾아왔고 첫 충격이 크긴 했지만, 구조조정으로 짤리는 일 없이 SK그룹의 손자회사 멤버로 편입되어 안정적으로 직장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게 매우 괜츈해 보였습니다.


기대감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조금 안 좋게 표현하면) [SK맨이 된다!]는 기대감이 연탄까스처럼 스멀스멀 부풀어 올랐습니다.


2015년 11월에는 그러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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