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허위매출 조사 대응의 시작
병신년 두 달 전에 도둑처럼 찾아온 회사 매각의 충격이 지나고 '진또배기 병신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어감부터 좋지 않은 2016년 병신년이 사뿐하게 다가왔습니다.
뭐, 이름은 병신년이지만 연초에는 그리 나쁘지 않았어요. 앞 편에서 썼듯이 일단 근무환경이 많이 좋아졌거든요. '야근'과 '주말근무'가 없어진 것만으로도 땡큐베리감사였고, 노조 달래기 용도로 성과급을 대폭 올려 준 것 또한 어익후 개꿀로 받아먹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기분으로 (곧 CJ마크 떨어지고 SK마크로 바꿔 달게 될) 헬로비전에 출근하고 있을 때. CJ지주사 법무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금번 SK매각과 관련하여 서울중앙경찰청 특수수사과에서 모종의 움직임이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아마 헬로비전의 허위매출 건을 엮으려고 하는 것 같다.]
는 연락이었습니다.
허위매출 건에 대해 잘 알고 직접 해당 계약서를 검토하기도 했던 업무담당자인 제 입장에서는 '이건 뭥미? 어디 개 풀 뜯어먹는 소리임?' 정도의 반응을 보였었습니다. 시기적으로 말이 안 되거든요.
헬로비전을 SK에 매각한다는 계획은 2015년 10월에 진행되었습니다. 물론 그 전부터 CJ지주사 측과 SK텔레콤 측이 물밑 협상을 했을 테니, 최초의 계획은 2015년 중반부에 시작되었겠죠. 3개월일지 6개월일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 협상 개시 시점은 2015년이었을 겁니다.
반면, 허위매출 건이 발생한 건 2013년이었습니다. 그 때는 헬로비전을 SK에 매각한다는 계획 따위는 전혀 없었고 반대로 'CJ헬로비전이 모든 유선방송사를 흡수합병해서 IPTV 전체를 상대로 한따까리 맞짱 뜬다!'는 창렬한(!) 계획을 실행하고 있을 때였어요.
2013년 경에 2년 뒤 헬로비전 자체가 매각될 거라는 에바쎄바케바 병림픽을 예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걸 예상하면서 허위매출 진행한 사람도 당연히 없구요.
그런데 이걸 하나로 묶는다? SK에 매각하기 위한 전 단계로 매각가격을 높이기 위해 헬로비전의 매출을 부풀린다는 추정을 한다?
당연히 엮을 수가 없었습니다. 서울중앙경찰청 특수수사과에서 들여다본다 해도 허위매출 자체로 처벌할 수는 있겠지만 M&A에 영향을 줄 수는 없는 사안이었습니다.
그렇긴 한데...
[흠집내기]는 가능하겠죠. 최초의 기획수사 의도대로 M&A에 영향을 미치는 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최소한 'CJ그룹이 허위매출을 자행하고 방치하는 부도덕한 회사다!' 라는 식의 간접적인 흠집내기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리고, 당시 CJ는 이런 흠집내기에 매우 민감했습니다. 당시 그룹 오너 분이 4년 형을 선고받고 계속 형집행정지로 시간 연장하면서 병원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상태였거든요.
또한 SK측도 흠집내기를 그리 달가워할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SK 쪽 오너 분은 감옥에서 형량 채우다가 특별사면으로 나오긴 했지만... 하필 2015년 말에 '첩밍아웃'을 하면서 사회적으로 영 떨떠름한 상태였거든요.
(SK 오너 분의 첩밍아웃 이슈는 2025년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헬로비전을 매각해야 하는 CJ 입장에서나 / 이를 인수해야 하는 SK 입장에서나 '헬로비전에 흠집 나는 건 가급적 피해야 한다'는 건 동의했을 겁니다. 여기에 또 하나. [CJ지주사 법무실에 성과가 필요하다]는 사정도 추가되었죠.
여기서 잠시 이 허위매출 조사 대응의 배경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뭐 제 입장에서 정리한 거니까 당시 관계자 분들은 다른 생각을 하셨을 수도 있지만, 이건 제 글이니 제 입장에서만 서술하도록 하겠습니다.
2. (내 마음대로 해석한) 허위매출 조사 대응의 배경
앞서 잠시 말했듯이, CJ는 오너 구속 이후로 법무 라인을 엄청나게 강화했습니다. 지주사 법무팀을 법무실로 승격시키고 유명한 검사 출신 변호사 분을 부사장 직급으로 모셔 왔으며, 사내변호사도 대폭 충원했습니다. 그룹 전체 법무담당자가 80명을 넘었나 그랬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 충원한다고 해서 오너 사건의 결론이 바뀌는 건 아닙니다. 삼성그룹 내부 법무담당자가 300명을 넘고 그 자체로 대형로펌 급이지만 재드래곤 아재 상속 때 구속되는 걸 막진 못했잖아요. CJ 법무실도 마찬가집니다.
오너 사건이 바뀌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냥 놀까요?
당연히 그럴 수는 없겠죠. 일이 없으면 일을 만들어야 합니다. 월급을 받는 이상 일이 없어도 일 하는 척 해야 하고, 없는 일도 만들어서 바쁜 척 해야 합니다. 그런 게 '회사원'이에요.
2013~2015년 동안 CJ지주사 법무실은 '컴플라이언스(Compliance)'를 강조하며 오너 사건 외에 그룹 전체 준법프로세스를 확립한다는 새로운 일거리(?)를 만들어 내려고 했습니다. 기존 법무팀을 쪼개 컴플라이언스팀과 지재권팀을 신설하고 그룹 전체에 뭔가 준법프로세스 같은 걸 전파하려고 했었죠.
여기서 또 한 번. 그런데 말입니다.
컴플라이언스 없었을 때 회사들이 모두 탈법 불법 조직이었나요? 컴플라이언스 기능이 분리독립하기 전의 법무팀은 무슨 탈법지원팀이었습니까? 컴플라이언스 기능이 없으면 모든 회사가 분식회계하고 횡령배임 저지릅니까?
그럴 리 없죠. 컴플라이언스 준법프로세스 같은 게 없을 때에도 다들 법 지키면서 살았어요. 가아끔 분식회계하고 가아끔 허위매출 일으키고 가아끔 공정거래법을 위반해 슈퍼갑질 시전하긴 하지만 전반적으로 법 잘 지켰습니다. 법무팀도 법 지키라고 하지 탈법-불법 저지를 방안을 연구하진 않아요.
결국 '지주 법무실은 별로 하는 게 없다.'는 말이 연탄까스처럼 스멀스멀 올라왔고, CJ지주사 법무실 입장에서는 상당히 조급해졌을 겁니다. 법무실 스스로 조직 슬림(Slim)화를 외치면서 납작 엎드리는 분위기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꼈을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헬로비전 기습매각] 이슈가 터졌습니다. 지주 법무실조차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헬로비전 매각이 진행된 상황이었어요.
매출 1조 영업이익 1천억 회사의 지분 53%를 팔아치우는데 대(大) CJ법무실에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계약서 검토도 못한 채 언론보도를 통해 매각소식을 접해야 하는 상황. 영 좋지 않죠. 법무실 입장에서는 '우리가 따 당하는 건가?'라는 느낌적인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CJ그룹 오너를 잡아넣은 정부가 서울중앙경찰청 특수수사과를 통해 CJ헬로비전의 허위매출 건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헬로비전 매각에 흠집내기를 할 것 같다.'는 첩보가 입수된다면...
CJ지주사 법무실 입장에서는 '이거라도 잘 막아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겠죠. 헬로비전 매각 협상 초기에는 전혀 몰랐지만 이제 매각 발표 후 실사 단계에서 숟가락 얹어 보려면 최소한 이 허위매출 건에서는 뭔가 보여 줘야 합니다. 보여줘 보여줘 당신의 능력을 보여줘!
법무실은 (개그콘서트 혁필이 모드로) '보여 드리겠습니다!'를 시전하고 싶었을 겁니다. 이제 곧 SK로 팔려가서 바이바이 두바이 하게 될 CJ헬로비전이지만 그래도 이 곳에서 뭔가 하나 결과물을 만들고 싶었을 겁니다.
계륵(鷄肋). 딱 닭갈비 뜯을 상황이죠. 두툼한 닭가슴살과 맛있는 닭다리살은 헬로비전 기습매각을 주도한 쪽이 가져갔지만, 법무실도 뒤늦게 숟가락 얹어서 빈약한 닭갈비나마 뜯어야 합니다. 허위매출 건이라도 개입해야 합니다.
과거 일을 쓰다 보니 약간 안 좋은 톤(Tone)이 되긴 했습니다만, 뭐 당시 CJ지주 법무실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닙니다. 회사원은 어디나 똑같죠. 남의 돈 받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고, 어떻게든 매년 성과물을 만들어 내고 연말에 인사평가를 받아야 하는 게 우리 회사원의 숙명입니다. 성과 낼 일이 부족하면 닭갈비라도 뜯어야죠.
그리고, 당시의 저는 과장(G5) 급으로 윗선의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었습니다. 곧 SK로 넘어갈 예정이라고 하지만 일단 CJ그룹에 있는 동안에는 상급자의 지시대로 업무 진행해야죠.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듯이 떠날 때까지는 떠난 게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저 또한 허위매출 건 조사 대응에 동의했습니다. 마음 속으로는 '이거 대응한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겠냐?'라는 회의감이 들었지만 겉으로 티 낼 필요는 없겠죠. 그냥 일 했습니다.
그리하여, '허위매출 조사 대응'이 시작되었습니다. 병신년 이름에 걸맞는 진정한 병림픽...이라고 하면 좀 거시기 하지만 아무튼 겁나 빡세고 겁나 힘들고 겁나 정신적으로 피곤한데 막상 뜯어먹을 건 거의 없는 계륵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계속 글이 길어지네요. 이어지는 글은 챕터를 바꿔서 서술하겠습니다. 커밍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