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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각 불허 결정 : 진정한 충격과 공포 (2)

by 테서스

(앞 글에 이어서 씁니다.)


(4) 총괄부사장 급 대표의 귀환 : 매지션(Magician)인가 트릭스터(Trickster)인가


우선 양해를 구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본 챕터에서 한 자연인 개인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가 나오겠지만, 이는 2013~2016년 기간 동안 실제로 헬로비전에서 있었던 일을 기반으로 한 저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사실 기반에 주관적인 평가가 들어가는 거라면 형법 310조 위법성조각사유에 해당될 거라는 점 미리 밝히고 시작합니다.



제목의 영문 표현만 봐도 부정적인 평가가 나올 거라는 걸 짐작하실 겁니다. 트릭스터(Trickster). '사기꾼, 협잡꾼'이라는 뜻이죠.


뭐 트릭스터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다시 쓰기로 하고. 일단 '매지션'에 대해 써 보겠습니다.



2014년 초반까지 헬로비전의 대표를 맡으시다가 이후 승진+영전으로 지주사 멤버가 되신 분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헬로비전의 대표를 맡으실 당시 평가가 '매지션(Magician)'이었어요. 무슨 마술이라도 하는 것처럼 경이적인 업적을 남겼다는 의미에서 매우 높게 평가하는 말이었죠.


당시에는 2002년 월드컵 4강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을 때였는데, 이 2002 월드컵 당시 딩크횽의 별명이 '매지션'이었습니다. 유선방송업계에서는 해당 대표님을 히딩크 급으로 평가했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대단했어요.


카더라 소문에 의하면, 유선방송사 사장 중 한 분은 해당 대표님에 대해 딩크매직 이상으로 높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한국에 스티브 잡스가 있다면 바로 이 분이다!]라는 극찬을 하셨다고 하네요.


매지션. 코리안 히딩크. 코리안 잡스.


기업의 전문경영인에게 이 이상의 칭찬이 있을까요? 축구변방 한국을 4강으로 올려 놓은 사람으로 비유해 주고 / 2010년 이후 전 세계의 핸드폰을 스마트폰으로 바꿔 버린 위대한 창업자로 비유하는 것 이상으로 칭찬할 수 있을까요?


2014년 초반에 헬로비전을 떠나신 대표님은 실로 대단한 칭찬을 한 몸에 받으셨습니다. 순혈(純血)이 꽤 우대받는 CJ에서 '경력직 보따리장사'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총괄부사장(E5)으로 승진하셨고, 지주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보직을 맡으셨습니다. 부회장(E6) 급은 오너 일가가 아니면 되기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월급쟁이로는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가신 거죠.


뭐, 그럴 만한 실적이 있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 3년 만에 헬로비전의 매출을 2배로 끌어올려 일단 CJ계열사 중 유일하게 '그레이트CJ'에 호응해 줬고

- 정부의 주요 정책이었던 알뜰폰 사업에도 호응하여 알뜰폰사업자 중 1위에 올랐으며

- '진격의 넷플릭스'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미래를 내다보고 토종OTT '티빙'을 출범시켜 해당 분야 1위로 만들었고

- 기업사업, 커뮤니티사업본부 등을 통해 계속 신사업을 확장


하고 있었으니까요. 위의 실적만 놓고 보면 '매지션'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여기서 슬슬 나와야겠죠. [그런데 말입니다].


저 실적이라는 거... 이미 앞에서 여러 번 반박했었죠. 다시 한 번 요약하면


- 매출 2배는 말 그대로 '현질'.

2013년 당시에 3500억원 + 알파 로 보유하던 현금성 자산을 고갈시키며 부실한 지역 유선방송사를 인수한 결과물로 매출만 뻥튀기한 것으로 그 과정에서 정상가입자 수의 60%에 해당하는 부실가입자를 떠안았고


- 알뜰폰사업은 시작 이래 계속 적자인 데다 89만 가입자 중 10만은 계약서가 없었으며


- 토종OTT 티빙 또한 시작 이래 계속 적자인 데다 대외적으로는 가입자 700만이라고 뻥치지만 실제 유료회원은 20만명 밑으로 줄어든 지 오래인 데다 그나마 그 중에서 CJ계열사 및 협력업체의 임직원과 가족을 제외하면 10만도 안 될 것 같은 상황이었고


- 커뮤니티사업본부는 보조금법위반, 기업사업은 허위매출로 수사기관의 수사를 받는 중


- 결정적으로, 회사의 영업이익이 반토막 수준으로 줄었고 홈쇼핑이 수수료를 낮추면 거기서 또 반토막 날 것이며 장기적으로 계속 줄어들 가능성이 매우매우 높은 상태


였습니다...



물리법칙이 지배하는 현실 3차원 지구에서 매지션(Magician)은 마법을 쓸 수 없습니다. 매지션은 위자드(Wizard)가 아니에요. 적당히 숙련된 손기술과 적당히 눈을 혼란시키는 현란한 동작과 적당히 사람 혼을 빼놓는 말빨로 무장한 기술자, '마술사'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마술이 어설프면... 트릭스터(Trickster)가 되겠죠. 사기꾼, 협잡꾼이 되는 겁니다.


여기에 하나 더. 헬로비전은 이미 SK에게 실사를 받는 과정에서 내부 정보가 다 유출되었습니다. 그동안 주위 사업자들을 속인 각종 현란한 기법들이 경쟁사업자에게 고스란히 넘어간 겁니다.


그리고 하나 더. 회사의 실체를 알아 버렸고 회향녀 상태로 고통받는 직원들은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데 CJ는 돈을 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전 대표님의 말빨로(말장난으로) 직원들을 설득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과거에 아무리 뛰어난 매지션이었다 해도 기법이 다 드러나면 더 이상 신기하지 않습니다. 본인은 성실한 마술사였다 해도 이제는 그저 협잡꾼일 뿐이죠. '트릭스터'로 취급받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가는 수 밖에요.


총괄부사장 급 대표님이 귀환할 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매지션의 잔기술은 다 뽀록났고, 공중부양 기술로 허공에 떠올랐었던 기업사업팀은 안전장치 없이 추락해 허리가 부러졌으며, 커뮤니티사업본부와 알뜰폰사업부도 칼찌르기 쇼에 실패해 온갖 곳에 상처를 입고 피를 철철 흘리는 중이었습니다.



그래도 돌아오셨으니 뭔가 하긴 해야겠죠. 상황을 더 악화시키더라도 일단은 뭔가 해야 했습니다. 그게 직장생활이니까요.


복귀하신 전 대표님은 '설명회'를 준비했습니다. 그 설명회가 최악이었죠.



(5) 깊은 빡침을 부르는 설명회


공정위의 용맹무쌍한(!) 매각 불허 결정이 떨어지고 나서 대략 50일 가량 지났던 시점. 과거의 영광 시대를 살았던 총괄부사장 대표님이 설명회를 열었습니다. 회향녀로 CJ그룹에 돌아와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진 직원들을 격려하고 다시 한 번 으쌰으쌰 모드로 만들어 보자, 뭐 대충 그런 취지였습니다.


잘 될 리... 없겠죠?


분위기가 상당히 험악했습니다. 특히 사원-대리 급 젊은 직원들은 상당히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었습니다. 아직 MZ세대로 분류되기 전인 `90년대 젊은이들이 강하게 의견을 내고 송곳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뒷자리에 앉아서 보는데도 총괄부사장 대표님이 당황하는 게 눈에 보이더군요. '내가 헬로비전 있을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다들 왜 이렇게 날이 서 있지? 납득이 안되네 납득이.' 라는 반응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나왔습니다. Show me the money.


매각실패하고 회향녀로 CJ에 돌아왔는데 이 기간 동안 직원들이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고 사기 떨어진 건 어떻게 보상하실 거냐, 매각보상금으로 예정되어 있던 1인당 1800 ~ 2500만원의 보상금은 매각실패시에도 주는 거냐. 직장인에게 가장 민감한 '돈' 관련 질문이 날카로운 화살촉으로 날아가 대표를 찔렀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이 가관이었습니다. 마치 농담따먹기 하듯 실실 쪼개면서 "지금부터 열심히 해서 인센티브 많이 받으면 메꿔지지 않겠어요? 허허허." 라고 답변하는 순간, 온 우주의 기운이 휘몰아쳐 주먹으로 집중되면서 죽빵 마려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앞서 정리했듯이, CJ그룹의 인센티브는 '상위직급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구조'입니다. 하위 직급은 인센티브 가중치가 1.0인 반면 / 임원 및 대표이사는 4.0 이상의 가중치에 업적달성 인센티브가 따로 책정됩니다. 기본급이 높은 상위 직급이 가중치도 3~4배 높게 가져가서 인센티브를 왕창 땡길 동안 하위 직급은 콩고물 살짝 찍어먹는 수준입니다.


헬로비전이 가장 돈을 잘 벌던 시기에도 사원~대리급은 인센티브 수준이 300~500만원 정도였습니다. 2016년에 돌아와서 (병신년 컨셉에 맞게) 비실비실 쪼개는 대표님이 2013년 말에 3억원 이상의 인센티브를 받았을 때, 사원~대리 급은 그 1/100 수준의 인센티브를 받고 있었습니다.


SK로 매각한다는 기습발표 후 '매각 보상금'을 정할 때 이 얘기가 나왔었습니다. [인센티브에 연동시키면 하위직급은 사실상 보상금액이 미미해지므로 최저보상금을 1800만원으로 정하고 상위직급도 2500만원을 넘지 않도록 조정하자.] 는 결론이 나온 것도 바로 이 '상위직급에 유리한 인센티브 구조'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나온 것입니다.


설명회 자리에 모인 과장 급 이하 직원들 모두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CJ그룹 인센티브는 하위직급에 매우 불리하니 그걸로 보상금을 커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매우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이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 지 7개월이 넘은 시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앞에서 농담따먹기를 해요? 2013년에 3억 이상의 인센티브를 땡겨먹고 영전해 갔던 대표이사가 다시 돌아와서 비실비실 쪼개면서 "니들이 X빠지게 일해서 인센티브 받아라. 니들 뺑이치는 동안 나는 인센티브 50배 100배 땡겨먹지만 그건 아몰랑. 예전처럼 뺑이쳐." 라고 얘기하면...


자칫하면 죽빵으로 끝나지 않아요. 칼부림 납니다. 농담이 아니고 진짜예요.



물론 당일날 죽빵사태는 없었고 칼부림 유혈사태도 벌어지지 않았지만, 두가지는 명확했습니다.


- 총괄부사장 대표님을 비롯해서 CJ지주사 전체 인력은 헬로비전 직원들의 마음 따위에는 코딱지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것.


- 이 날의 설명회도 사전 리허설 같은 거 전혀 없이 전 대표님 혼자 뇌피셜로 대충 정리하고 말빨로 때울려다가 날 선 반응을 접하고서 당황했다는 것.



조카튼튼 상황입니다. 대표님 조카 튼튼하게 잘 자라길 기원할게요. 조카튼튼 조카튼튼 조카 조카 조카 튼~ 튼~.


뭐 대표님 조카의 건강을 기원할 건 아니고. 중요한 건 제가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외벌이 가정을 책임지는 남자로서 저 자신이 계속 직장생활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며 가능하다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겁니다.



죽빵마렵고 조카튼튼을 기원하게 되는 설명회 이후 모든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제가 가야 할 길, 선택해야 할 길은 하나뿐이었습니다.


[이직]이 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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