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대략 30여 년 전. `90년대 초반쯤에 일본문화 수입 금지 조치가 풀리면서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대량으로 들어옵니다. 지상파 방송에서도 다양한 일본 애니메이션을 선보였죠.
그 때 저는 중딩~고딩이었는데요. 당시 인상깊게 본 애니메이션이
- 슈퍼맨 로키 (일본 원작 '초인 로크(Locke)')
- 탈로스 (달 뒷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무장파업 하는 이야기. 일본 원작 제목과 동일함.)
- 이름을 알 수 없는 초능력자 애니메이션 (일본 원작 '지구로'. '지구로 간다'는 의미입니다.)
정도였는데요. 당시에는 저 애니메이션의 원작 제목을 찾아볼 생각을 못했습니다. 그 때는 인터넷이 없었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시간이 꽤 흘러 1999년에 '매트릭스'가 나왔습니다. 충격이었죠. 'Unfortunately, no one can be told what the matrix is.'를 비롯한 명대사들과 명장면들이 넘쳐났습니다. 영화관에서 본 영화 중 최고였습니다.
당연히 매트릭스 2와 3를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21세기 초반 매트릭스 2, 3가 나올 때쯤에는 (뒤늦게) 군대 끌려갔다가 복귀해서 백수생활 하다가 잠깐 취직했다가 또 백수생활을 하고 있어서 영화관에 갈 만한 상황이 아니었는데, PC방 알바 아저씨가 나름 유능(?)해서 불법 다운로드 버전을 PC방 메인서버에 받아 뒀더군요. 재밌게 봤습니다^^;;
으음, 그런데...
매트릭스2와 3를 보고 나서 약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그러했습니다.
'이 설정, 중딩 때 본 이름모를 애니메이션 설정이랑 비슷하잖아?' 라는 의문이 들었거든요.
당시에는 그 의문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일단 제가 봤던 애니메이션 이름을 모르는데 주위 사람들과 토론(?)을 할 수가 없죠. 하나씩 다 설명해 줘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구요.
그 이후에도 한동안 저 혼자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매트릭스 세계관을 분석하는 글과 유튜브 동영상이 넘쳐났지만 그 중 2탄과 3탄을 콕 찍어서 '이 설정이 일본 애니 [지구로]와 유사하답니다.' 라고 설명하는 분석은 단 하나도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적어도 제가 찾아볼 수 있는 범위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어제 갑자기 퇴근길에 생각이 나서 이것저것 찾아봤습니다. 중딩 때 봤던 '이름 모를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주요 키워드 - 뮤, 인공수정, 그랜드마더, 그랜드파더 - 정도로 검색했더니 '지구로(To the Earth)'라는 애니메이션이 나오더군요.
서설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매트릭스 2, 3의 세계관이 일본 애니 '지구로'와 어떤 면에서 비슷한지 읊어보겠습니다. 아마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저 혼자만의 분석일 것 같은데, 일단 시작하겠습니다.
2. 본론
(1) 매트릭스1의 설정 : 인간 건전지
워낙 많은 분들이 언급하셔서 다들 아시겠지만 매트릭스 1의 설정을 다시 요약하면
- 기계가 인간과 전쟁을 벌여 승리한 뒤 인간을 지배하고 있음.
- 전쟁 당시 인간이 검은 구름을 만들어 태양을 막아버렸음. 기계 측은 태양광 발전을 못 하게 되어 대체 전력을 확보해야 함.
- 인간은 기계에게 전기를 공급해 주는 발전장치가 되었음. 인간 자체가 하나의 건전지
- 기계는 건전지인 인간이 죽지 않고 오래오래 살아갈 수 있도록 '가상현실'을 제공
-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 전체가 가상현실임. 즉, 1999년 기준 인간 문명은 모두 정교하게 짜여진 프로그램일 뿐이고 우리 인간들은 계속 꿈만 꾸는 상태로 생체건전지 역할을 하고 있음
- 주인공 '네오'처럼 가상현실의 모순을 깨닫고 깨어나는 사람들이 있으며, '모피어스'와 '트리니티'는 네오를 훈련시켜 가상현실의 프로그램을 뛰어넘어 프로그램 자체를 조작해 버리는 초인으로 각성시킴. 네오는 총알을 멈출 수 있고 / 가상현실 내에서 죽어도 다시 살아나며 /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는 걸로 종결
여기서 '인간을 생체 발전기(건전지)'로 사용한다'는 설정은 좀 무리수이긴 합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지적했듯이, 인간이 계속 숨쉴 수 있게 영양분을 공급하고 그 와중에 의식체계가 붕괴되지 않게 매트릭스 가상현실을 구현해 주며 그걸로 36.5도의 체온을 발생시켜 열에너지로 전기를 하는 방식은 상당히 비효율적입니다. 그걸 할 시간에 석탄-석유 같은 화석연료를 캐거나 원자력발전을 하는 게 낫죠. 기계문명은 방사능의 영향도 잘 견뎌낼 수 있을 거구요.
물론 '매트릭스 세계관'에서는 이 지적도 재반박 가능합니다. [매트릭스 내부에서는 물리법칙이 다르게 작용하고, 우리 인간들이 알고 있는 물리법칙은 매트릭스 내부에서만 적용되는 것이며, 매트릭스 밖 실제 현실에서는 인간을 이용한 생체발전이 매우 효율적이다.] 라는 식으로 갖다붙이면 되죠.
(* 이 재반박에 대해 또 재재반박 가능한 게, 매트릭스에서 벗어난 시온 사람들이 만든 장비는 생체전지를 안안 씁니다. 생체전지의 효율이 킹왕짱 좋다면 매트릭스에서 벗어난 인간들이 기꺼이 자기 자신을 self건전지로 활용해서 싸우는 게 최선인데 그런 식의 전개는 하지 않죠. 매트릭스 밖 현실세계에서도 매트릭스 내부와 거의 동일한 물리법칙이 적용되고 있는 겁니다.)
아무튼, 인간 건전지 설정은 약간 오버한 것 같습니다. 워쇼스키 형제(당시에는 형제였으나 이후에 남매가 되고 최근에는 '자매'가 되었습니다만 뭐 그건 넘어가고;;)도 이걸 잘 알고 있었어요.
카더라 통신에 의하면 최초 시나리오는 인간 건전지가 아니라 [거대한 생체 바이오 컴퓨터]였다고 합니다. 인간의 생체두뇌가 기계문명의 슈퍼컴퓨터로 활용되고 있다는 설정이었다는데, 이러면 관객들이 바로 납득하기 어려우므로 '직관적인 전개'를 위해 건전지 설정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영화 전개상으로는 그게 더 뛰어나긴 했죠.
이렇게 매트릭스1의 인간건전지 설정이 무리수였기 때문에, 이 설정은 2 이후로 약간 바뀌게 됩니다. 이건 아래 매트릭스 2, 3 설정에서 같이 살펴보도록 하죠.
(2) 매트릭스 2, 3 설정 : 기계는 인간을 '관리'하고 있다
1편에서 '인간 자체를 생체발전기로 활용하고 있다'는 설정을 내세웠으나, 2편과 3편으로 이어지는 설정에서는 이게 약간 바뀝니다. 생체발전기로 활용하는 것은 맞지만 이는 주된 목적이 아니라 부수적인 것일 뿐이며, 정작 더 중요한 목적은 [기계가 인간을 관리하며 계속 존속하도록 케어(Care)해 준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기계는 매트릭스를 여러 번 포맷하고 다시 만들었음. 그러면서 인간들이 매트릭스 '안(inside)'과 '밖(outside)'에서 모두 살아갈 수 있게 배려함.
- 최초의 매트릭스는 모든 인간이 무한한 행복을 누리게 할 수 있는 방식이었으나, 인간들 본연의 의심병 때문에 실패함. 너무 행복하면 인간 스스로 미쳐버린다나 어쨌다나.
- 두 번째 매트릭스는 늑대인간과 뱀파이어가 설치는 고통의 암흑시대. 이건 또 너무 불행함.
- 매트릭스가 몇 번이나 포맷되었는지는 모르겠음. 언젠가부터 '인간의 구원자 네오(Neo)'를 출현시키기 시작했음.
- 네오는 각 매트릭스가 망하고 포맷될 때 남자 7명과 여자 16명을 데리고 매트릭스 밖으로 나가 '시온'을 건설함. 즉, 기계 스스로 매트릭스에 반발하고 저항하는 외부조직을 만들도록 장려(!)하는 것.
- 주인공 네오는 시온 건설을 거부하고 '평화'를 얻는 것으로 기계와 협상함. (네오와 동등한 힘을 얻은 백신프로그램 '스미스'와 맞짱뜬 뒤) 새로운 매트릭스가 열리면서 영화가 끝남.
매트릭스 2와 3의 설정을 극한까지 따져 보면, 결국 네오가 출현하고 기존 매트릭스의 질서를 파괴하며 매트릭스 외부의 인간 문명을 건설하는 것조차도 '이미 기계 측이 다 예상하고 의도한 것'입니다. 모든 것은 부처님 손바닥 안인 거죠. 기계가 부처님이고 예수님이고 갓(God)입니다.
기계가 인간을 박멸(!)하지 않고 이렇게 매트릭스 외부에 문명을 건설할 시간과 자원을 주면서 관리하는 이유가 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기계문명을 만든 창조주가 인간이니 그 창조주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고, 기계의 단순한 호기심 때문에 인간 본성을 연구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기계는 인간을 갖고 놉니다. 인간의 구원자 네오조차도 기계의 큰 의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비록 새로운 시온을 건설하라는 임무는 거부하지만 결국에는 매트릭스 질서 내에서 평화를 찾는 게 한계죠.
뭐, 이 설정에 불만은 없습니다. 기계가 창조신이든 말든 영화가 재밌었으면 그만이죠. 매트릭스 2, 3 모두 잘 만들었고 재밌었습니다. 그럼 됐죠.
다만, 서론에서 얘기했듯이 이 설정은 일본 애니메이션 '지구로(To the Earth)'와 유사합니다. 항을 바꾸어 정리하겠습니다.
(3) 지구로(To the Earth)의 설정 : 가상현실은 없지만 '그랜드마더'라는 기계가 인간을 관리하고 있음
우선 요약체로 간략히 서술하겠습니다.
- 가까운 미래. 인간은 지구 외에 여러 행성에 흩어져 살고 있음
- 인간은 더 이상 자연출산을 하지 않음. 모든 인간은 '기계에서 인공수정되어 탄생'하는 시대임. 이 인공수정 및 인간문명 일체를 관리하는 기계가 '그랜드마더'.
- 인공수정된 인간 중 낮은 확률로 '뮤(Mu)'라는 초능력자가 태어남. 이 뮤(뮤리안)들은 아무리 인공수정 기계를 조작하고 업그레이드해도 일정 확률로 반드시 태어나게 되어 있음. 왜 그런지는 인공수정 기계를 관리하는 인간들도 알지 못하며, 그랜드마더 본체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함.
- 인간들은 뮤를 적대요소로 보고 발견되면 죽여버림. 뮤 중 일부는 살아남아 저항군이 되었으나 그 세력이 미미함.
- 그런데 '탁월한 뮤'(당연히 주인공)가 태어났음. 기존의 뮤에 비해 몇십 배 강한 초능력을 갖고 있어서 인간들을 압도함. 예전 뮤 저항군의 대장은 이 주인공 뮤를 구해 주고 희생.
- 새로 대장이 된 주인공 뮤는 인공수정을 거부하고 '자연출산' 방식으로 아이를 낳음. (당연히 협조해 주는 여자 뮤가 있음). 그리고 이 자연출산된 뮤는 엄청 빠르게 성장하고 또 주인공 뮤를 뛰어넘는 초능력을 발휘. 기존의 뮤들도 이 '자연출산 뮤'를 두려워할 정도로 강함.
- 주인공 뮤가 식물인간이 되는 등 이벤트가 있으나, 주인공 뮤의 아들이 주도하는 자연출산 뮤 부대는 지구로 쳐들어가 인간 군대를 개발살 내고 '그랜드마더'를 파괴해 버림.
- 그러자 '그랜드파더'가 깨어남.
사실 그랜드마더가 인간을 인공수정할 때 일정 확률로 뮤(Mu)가 태어나는 것은 어떤 오류가 아니라 그 자체로 기본 설정이었으며, 그랜드마더의 역할은 이렇게 인간과 뮤 사이에 상호대립과 갈등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음.
- 그랜드마더의 역할은 끝났음(어차피 파괴됐으니까 역할 할 것도 없음). 그랜드파더는 인간과 뮤 양측을 모두 인정하는 걸로 셋팅되어 있으며, 이 셋팅으로 뭘 할지는 아몰랑. 애니메이션 끝났으니 각자 알아서 상상하셈.
뭐 대충 이런 식입니다.
이렇게 줄글 식으로 나열하면 좀 애매하죠? 표로 나눠서 비교하면 좀 더 직관적으로 보이긴 할 텐데... 아무튼 매트릭스 2, 3 설정과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4) 매트릭스 2, 3 설정과 '지구로' 설정의 비교
1) 매트릭스는 기계가 지배하는 가상현실 / 지구로는 기계가 지배하는 출산관리
매트릭스에서는 아예 기계가 거대한 가상현실을 구현했는데, 지구로에서는 가상현실까지는 구현하지 않았고 그냥 기계가 인간 생활 전반을 지배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출산 관리'구요.
2) 양 쪽 모두 '일정 확률로 오류를 발생'시킴
매트릭스는 모피어스/트리니티/네오 등 '매트릭스의 가상현실을 깨닫고 이질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2,3에서는 매트릭스 자체에서 이런 오류를 고의로 발생시킨다는 식으로 전개하죠.
지구로에서도 인공수정 때 '뮤(Mu)'가 일정 확률로 반드시 출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랜드마더가 인공수정 출산을 관리하는데 고의로 오류를 발생시키는 겁니다.
3) 오류로 발생한 존재가 기존 질서를 갈아엎음
매트릭스에는 네오, 지구로에서는 '기존의 뮤보다 훨씬 더 뛰어난 주인공 뮤 및 그의 아들'이 기존 질서를 갈아엎습니다. 이 주인공을 이끌어 주는 존재(네오의 존재를 확신했고 또 네오의 가능성을 일깨워 줬던 모피어스 / 새로운 뮤의 출현을 기다리고 그 새로운 뮤를 위해 목숨을 바친 기존 저항군 지도자)도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네요.
4) 오류 존재, 기존 질서의 붕괴 모두 '기계 측이 이미 예측한 것'이었음
매트릭스의 아키텍트(Architect)는 이미 여러 번 매트릭스를 갈아엎었고, 그 와중에 여러 명의 네오를 탄생시켰습니다. 영화 속 네오가 새로운 매트릭스를 원했을 때에는 아키텍트가 출현하지 않았지만 대신 '오라클(Oracle)'이 등장해 '평화와 사랑이 넘치는 매트릭스'가 탄생할 거라는 걸 암시해 주죠.
지구로에서는 그랜드마더가 파괴되자마자 '그랜드파더'가 깨어납니다. 기존에 계속 일정 확률로 뮤(Mu)를 탄생시켰던 그랜드마더는 인간-뮤 간의 대립과 갈등을 방치했지만, 그랜드파더는 인간과 뮤가 협력하여 새로운 질서를 만들 거라는 식의 발언을 합니다.
5) '시스템의 의도'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음
매트릭스에서 인간을 지배한 기계 측이 왜 인간을 계속 살려 두는지, 매트릭스 외부에 시온을 건설해 인간의 반항심(?)을 이어 나가도록 하는 이유가 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관객들이 각자 알아서 상상하면 그만입니다.
지구로에서도 그랜드마더-그랜드파더 시스템을 만든 자가 누구인지, 왜 이렇게 인간과 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조장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한국 지상파에 상영되었었던 극장판 말고 원본 만화 및 장편드라마 애니에서는 조금 다른 설정이라고 합니다만 거기까진 모르겠고, `90년대에 나온 극장판 기준으로는 그냥 각자 알아서 상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떠신가요? 비슷해 보이죠?
워쇼스키 형제(지금은 자매)가 일본 애니메이션 '지구로'를 보고 매트릭스 2,3편 설정을 기획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형제 둘이서 머리 맞대고 고민한 결과물이 우연히 일본 애니메이션의 설정과 비슷한 구조로 되었을 가능성도 있죠. 결정적으로 '매트릭스 가상현실'이라는 점이 다르기도 하구요.
매트릭스 - 지구로 설정 비교. 아마 지구에서 이 비교작업을 한 건 저 한 명일 것 같습니다. 그걸로 만족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