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편에 이어서 씁니다.)
(3) 미스트(Mist)
제가 한참 백수 생활을 할 때, PC방 알바의 능력(!)으로 불법 다운로드 영화를 여러 편 봤었습니다. 미스트(Mist)도 그 중 하나였는데요. 당연히 영화 줄거리를 전혀 모르는 상태로 봤습니다.
영화 중후반부까지는 그냥 '잘 만든 괴수영화' 느낌이었습니다. 별안간 이상한 안개가 몰려 오고, 그 안개 속에서 거대화된 곤충 같은 괴생물체가 확 뛰쳐나와 사람들을 잡아먹고, 대형마트로 피신한 인간들 사이에서 왠 미친 광신도가 갑툭튀로 튀어나와 분위기 흐리다가 헤드샷 맞고, 용감한 사람들이 더 용감하게 마트 밖으로 나가 탈출을 시도하고. 뭐 여기까지는 평범했습니다.
그러다가 결말부에 이르렀을 때...
주인공 일행은 절망합니다. 끝없이 펼쳐진 자욱한 안개와 또 끝없이 몰려오는 것 같은 괴생물체의 공격에 지치고 힘들어하며 괴로워합니다.
아무리 가도 이 절망이 이어질 것 같습니다. 불길한 안개(Mist)는 지구를 뒤덮어 버린 것 같고, 괴생물체는 이미 인간 대부분을 잡아먹어 버린 것 같습니다. 살아도 사는 게 아니고 살아남아 봐야 더 고통스러운 죽음이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결국 주인공 일행은... 권총 한 정을 활용해 전원 자살하기로 결심합니다. 괴생물체에게 잡아먹히며 온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을 겪느니, 그냥 깔끔하게 헤드샷 한 방으로 아주 짧은 고통만 느끼겠다고 결심합니다.
문제는... 주인공에게 '아들'이 있다는 거죠. 아직 미성년자인 아들입니다.
주인공이 아들을 쏴 죽이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냥 차량 밖을 비추며 총소리만 들릴 뿐이죠.
총소리가 지나간 뒤 다시 차량 안으로 카메라를 돌리자... 주인공만 살아 있습니다. 주인공은 절망과 죄책감으로 부들부들 떨며 자기 입 안에 권총을 넣고 방아쇠를 당기죠.
하지만... 총알이 없습니다. 처음에 총알 수를 잘못 센 건지는 모르겠지만 총알이 1발 부족했어요. 주인공은 죽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짜 반전.
안개 속에서 '캐터필러 구르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천조국 엄웨리커가 자랑하는 최강 전차 M1 에이브럼스의 무한궤도가 들판을 가르며 이 쪽으로 굴러오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을 때... 오 신이시여.
천조국 엄웨리커의 군대 '미군'은 괴생물체를 아작냈습니다. 괴상한 안개를 제거하는 방법도 알아냈습니다. 어디 다른 차원에서 온 것 같은 괴생물체는 미군의 우월한 화력과 기술력 앞에 끝장났으며, 세상은 빠르게 정상화되고 있었습니다.
위기 상황에서 인간 스스로 용기를 떨치고 일어나는 것.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 광신도 미친년을 잡아 족치며 인간의 가치를 지키려 발버둥쳤던 것.
다 부질없는 짓이었습니다. 그냥 '겁쟁이 그 잡채'로 웅크리고 앉아 벌벌 떨던 인간들은 천조국 엄웨리커의 군대 덕분에 다 살아남았고, 괴이한 상황에 맞서 싸우던 용감한 주인공은 자기 아들까지 죽여버린 살인자가 되어 오열합니다.
인생의 모순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영화. '미스트(Mist)'였습니다.
(4) 어벤저스 엔드게임 : I am... Ironman.
"상업영화는 예술성이 떨어져!"라는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영화에서 추구하는 예술성이 뭔지 잘 모르겠지만 예술하신다는 분들이 그렇게 주장하시니 대충 그러려니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술도 결국 '돈'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굳이 피카소 / 앤디워홀 등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뛰어난 예술은 결국 '돈'의 영역으로 편입된다는 정도는 저 같은 일반인들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으로 '돈의 힘'이 예술을 끌어내기도 합니다. 물론 순수예술은 아니고 '매우 정교하게 잘 짜여진 설정과 복선'으로 상업적 예술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만 어쨌든 재미 자체를 예술 수준까지 승화시키면 칭찬해 줘야죠.
어벤저스 초창기 시리즈는 '재미를 상업적 예술로 승화시키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주요 주인공 간의 갈등관계, 주인공들의 심리변화, 인간 찬가(讚歌)까지. 자칫 뻔한 얘기로 흐를 수 있는 주제들을 짧은 시간 안에 매우 효율적으로 잘 녹여넣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벤저스 시리즈에서 제일 탁월했다고 생각하는 건 [양대 핵심 인물의 심리 변화]인데요. 아이언맨 vs 캡틴아메리카(캡아), 두 대립되는 캐릭터가 서로 영향을 주며 변화해 가는 과정이 정말 물 흐르듯 잘 묘사되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탁월했구요.
아이언맨은 (어벤저스1에서 스스로 읊조리듯이) '바람둥이, 과학자, 천재, 기업가, 휴머니스트'입니다. 본인이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세상의 평범한 사람들을 무시하죠. 천재인 만큼 거만함은 기본. 법률과 사회질서 따윈 적당히 따르는 척 해 줄 뿐.
반면, 초기의 캡아는 '명령에 죽는 군인 그 잡채'입니다. 동료들이 철조망을 넘어가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철조망 위에 엎드릴 수 있는 사람인 동시에 / 명령이 떨어지면 그 명령이 옳은 것인지 여부를 따지지 않고 무조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죠.
그런데... 그랬던 두 사람이 달라집니다. 아이언맨은 스스로 유발한 '울트론 사태'를 겪으며 [규제]를 받아들이고 / 캡아는 본인이 절대적으로 믿고 따랐던 쉴드 조직 내에 '하이드라'가 잠입했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명령'에 의문을 품은 끝에 규제 자체를 거부하고 무법자(Outlaw)가 됩니다.
절대복종 군인은 무법자가 되고, 자유분방한 바람둥이는 스스로 규제에 얽매이는 상황. 이 극단적인 변화를 MCU는 아주 자련스럽게 묘사해 줍니다. 그것도 매우 짧은 시간에.
액션과 화려한 볼거리로 가득 채워야 하는 상업영화에서 '짜투리 시간'을 활용하여 극단적인 심리변화를 압축적으로 보여 준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간 제한이 없는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성격을 바꾸는 것도 어려운데 그걸 불과 몇 분 정도의 대사와 표정연기만으로 납득시키는 건 몇십 배 더 어렵죠. 아무리 뛰어난 배우를 투입했다 해도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하지만 MCU는 이 어려운 작업을 해냈습니다. 바쁘게 이어지는 연속 시리즈 중간중간에 심리변화를 넣으며 결국 아이언맨과 캡아의 정신적 위치를 바꿔버렸습니다. 그것도 매우 자연스럽게.
이 어려운 작업을 해낸 후... 마지막 대미를 장식했죠. 타노스의 'I am inevitable.'에 대응하면서 비장한 표정으로 읊조리는 대사 I am... Ironman. (+핑거스냅)
완벽했습니다. 그 직전에 PCPC 뷔페미를 처덕처덕 처바른 것 정도는 다 용서해 줄 수 있을 만큼 완벽한 결말이었습니다.
(물론 이 처덕처덕 처바른 PCPC 뷔페미 사상이 이후 시리즈를 아주 그냥 제대로 말아먹었습니다만 그건 안 봤으니 아몰랑.)
단언컨대, 어벤저스 엔드게임까지의 서사는 '상업적 예술'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돈을 꼬라박고 그 돈의 힘으로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지만 그 '돈으로 만든 재미'도 극한까지 올라가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걸 제대로 보여 줬습니다.
글을 쓰다 보니 계속 길어지네요. 여기서 또 한 번 끊고, 나머지 결말이 좋은 영화 3개는 (하) 편으로 돌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