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테서스 Jan 31. 2024

자존심을 버려야 했던 개인택시 시절 (2)

1년에 보너스 1000%를 주는 화학회사의 탱크로리 운전수 일을 그만두고 '개인택시 기사'가 된 C. 목줄에 묶인 개보다 들판의 늑대가 되길 바랬고 '사장님'으로서 자영업을 하고 싶어했던 C.


쉬웠을까?


아니다. 2020년대를 사는 우리들은 다 알고 있다. [아프니까 사장이다] 라는 것을.


자영업은 절대 쉽지 않다. 사장님으로 불리긴 하지만 1인 자영업의 사장님은 CS 직원을 겸해야 한다. 온갖 불만으로 가득한 손님들을 직접 응대해야 한다.


뭐, 대부분의 손님들은 그냥 별 불만 없다. 100명 중 99명의 손님들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느낌으로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다들 택시 타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말없이 돈 내고 하차해서 자기 갈 길 간다.


100명 중 1명이 문제다. 모든 자영업자 사장님들을 아프게 하는 '손놈'이 문제다. 그 1% 확률이 문제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에 이런 말이 나온다. "계란 노른자와 흰자를 휘저으면 서로 섞인다. 이걸 다시 노른자와 흰자로 정확하게 분리하려면 무한에 이를 때까지 계속 휘저어야 한다. 계란 속 노른자와 흰자 분자들이 정확히 시작 당시의 배열과 동일해질 때까지 끝없이 휘저으면 언젠가 한 번은 원래 배열로 돌아간다. 매우 낮은 확률도 무한한 경우의 수 속에서는 결국 실현된다."


손놈 확률도 비슷하다. 하나하나를 보면 1%지만, 100명의 손님을 태우면 그 중에 한 명의 손놈이 있다. 한 명의 손님만 태울 때는 확률이 낮지만 하루종일 여러 손님을 태운다면 결국 손놈 한둘 만날 수 밖에 없다.


회사원일 때에는 관리직 간부직원 몇 명만 상대하면 끝이었지만 개인택시로 만나는 손놈은 하루에 몇 명이 될지 예상할 수 없다. 잘못 꼬이는 날은 하루에도 여러 명 만나게 된다. 막히는 길을 피해 돌아가면 일부러 택시요금 더 나오게 했다고 쌍욕 먹고 막히는 길로 가면 대기할 때 택시요금 올라간다고 쌍욕 먹게 된다.


자연스레 C가 술을 먹는 날이 많아졌다. 특히 개인택시는 이틀 연속 일하고 하루를 의무적으로 쉬어야 하기 때문에 쉬는 날에는 술을 더 많이 먹었었다. 전체적으로 카프로락탐 운전수 시절보다 더 많은 술을 마시게 되었다.



가끔 C는 술 마시면서 카프로락탐 시절과 개인택시 시절을 비교하곤 했었다.


"그 탱크로리 탈 때가 좋았지. 울산 로터리에 그거 들이밀고 확 꺾으면 다른 차들이 들어올 엄두도 못 냈어. 일단 그 차만 끌고 나오면 아무도 건드리는 사람 없고 그냥 편하게 도로만 달리면 됐는데. 그 때가 좋았다."


라고 말하는 날이 있었고,


"그래도 택시는 내 사업이다. 내가 열심히 하고 더 참으면 그만큼 돈 더 버는 직업이야. 나만 열심히 하면 돼. 나만 열심히 하면."


이라고 말하는 날도 있었다.


개인택시 기사로서의 자부심 같은 걸 내비치긴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카프로락탐 탱크로리 운전기사 시절을 더 그리워하는 듯 했다. 당시의 C는 그렇게 보였다.


썩은 고기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하이에나보다 눈 덮인 산꼭대기에서 얼어 죽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되고 싶었었지만, 실리(實利)는 하이에나 쪽이 더 나았다. 거대한 탱크로리 자체는 C의 소유가 아니었지만 회사의 힘을 빌어 그 큰 차를 몰고 다니는 게 일상의 스트레스를 줄이는 길이었다.



여담인데, C의 아들인 나 D는 '회사의 힘을 빌어 위세를 부리는 회사원'이다. 사회생활 시작한 이래 18년 동안 그렇게 살아 왔고 그것 말고 다른 걸 할 줄은 모른다. 자영업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고 할 생각도 없다. 내 경력과 관련된 자영업은 자격증이 필요하니 애당초 불가능하고.


(다른 글에 썼듯이) 영화 '비트'에는 "너 자신의 성능과 기계의 성능을 착각하지 마! 찌질해 보여."라는 대사가 나오지만... 회사원의 세계에서는 회사의 성능이 각 회사원 개인의 성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기획/재무/감사/법무 등 회사 자체를 움직이는 기능에 특화된 회사원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스티브 잡스의 명언 중에 이런 게 있다. 당시 펩시콜라 재무담당 부사장(CFO)이었던 '존 스컬리'를 설득할 때 드립했다는 명언. "설탕물이나 팔면서 인생을 끝낼 겁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세상을 바꿀 겁니까?"


나는 재무 쪽 라인이 아니고 임원도 아니지만, 나한테 저런 얘기 하는 사람 있으면 나는 아주 단호하게(!) 대답할 것이다. "저는 설탕물이나 팔면서 인생 끝낼 건데요. 잘 가세요. 아디오스."


듣보르자브 벤처기업에서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는 이미 세상에 잘 알려진 설탕물판매 대기업에서 CFO를 하겠다. 대기업 명함 한 장을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하이에나로 살겠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몽상가를 따라가 눈 덮인 산꼭대기에서 얼어 뒈지는 표범이 되지는 않겠다.


낭만이 밥 먹여 주지 않는다. 물론 이미 회사원으로서 성공하여 남은 한 평생 가족들 먹고 사는 데에 지장이 없다면 낭만적인 도전을 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냥 지금 현재 상황을 지키는 게 더 낫다. 본인 스스로 '목줄에 묶인 개'로 남더라도 그 가족들을 위해 회사에 이끼처럼 달라붙어 있는 게 더 낫다.


그래서였을까. C의 부부싸움이 늘었다. 술 먹는 날이 많아지면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는 날도 함께 많아졌다.


"조금만 참고 카프로 있었으면 더 나았을 건데. 그 성질머리 때문에 못 참고 나와서 이 고생이다. 이래 술독에 빠져 살면 어쩌노."


라는 푸념도 자주 들렸었다.



C가 개인택시 일만 했던 건 아니다. C 나름대로 '다른 개인사업'도 찾아보려고 했었다. '현대자동차 하청 중소기업'이 되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


선반, 보링머신, 밀링머신, 절단기, 프레스. 공업도시 울산의 중딩들이 공업기술 시간에 배우는 기계장치 이름이다. 울산에는 이런 기계장치를 구입해 작은 공장을 운영하는 중소기업들이 많았다. `80년대 말 ~ `90년대 초 경제호황기에는 이 중소기업들도 돈을 많이 벌었었다.


그 때 C의 옆집에 이런 기계장치 전문가가 있었다. 함께 술을 먹던 C는 이 기계장치 중소기업 일에 관심을 보였고, 결국 몇천만원을 투자하여 합작사업 비슷하게 작은 공장을 운영하게 되었다.


일감은 꽤 있었던 것 같다. C도 기계장치 작동법을 배워 부품들을 만들었었다. 택시 쉬는 날에는 공장에서 공동사장 겸 직원으로 일했었고 가끔 택시 영업하는 날에도 공장에 갔었다.


작동법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한 번 옆에서 보면 다 따라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문제는... "도면"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C는 국민학교까지만 다녔다. 그것도 집안일 하느라 학교를 자주 빼먹으면서 띄엄띄엄 다녔었다.


물론 학력과 무관하게 C 본인은 매우 합리적이었고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쌍팔년도 헬조선 유교탈레반 수준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 시절 사람들 치고는 합리적인 편이었다. 어깨 너머로 보고들은 지식도 많았다.


그러나... 그런 지식만으로 알파벳을 배울 수는 없었다. 도면 읽는 법을 깨우칠 수도 없었다.


공동으로 출자하여 공동으로 사장이 되긴 했지만, 발주처에서 내려오는 도면을 읽을 수 있는 건 기계장치 전문가 1명 뿐인 상황. 공동출자자인 C는 셋팅된 대로 기계를 다룰 수 있을 뿐이고 도면에 맞게 기계 자체를 셋팅하는 건 불가능한 상황.


이런 식의 동업은 오래 하기 어렵다. 당연히 그러했다. 상대방 동업자가 뭘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면 계속 불안할 수 밖에 없고 그렇게 의심이 생기면 끝이 없다.


동업 그만둬야 했다. 결국 C는 손해를 보고 자기 지분을 동업자 측에 넘겼다. 어쩔 수가 없었다.



전반적으로 스트레스가 심하긴 했지만, 개인택시 영업으로 아내와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카프로락탐 시절보다 수입이 줄어들었고 그것도 그날그날 영업에 따라 들쭉날쭉하긴 했어도 일단 먹고 사는 건 지장이 없었다.


80년대 후반 ~ 90년대 초반 대한민국은 나름 호황기였다. 특히 그 중에서 울산은 더더욱 좋았다. 석유화학단지가 뙇 버티고 있으면서 직원들에게 고소득을 보장해 줬고, 현대자동차는 (소나타는) 소나타와 (포르쉐 추월하는 구라광고를 냈던) 엑셀 시리즈를 선보이며 계속 성장하고 있었다. 현대조선소(이후 현대중공업)는 세계1위 포스를 뿜뿜 뿜어내며 거대한 도크에서 강철 선박을 꽝꽝 찍어냈다.


이렇게 돈이 도는 도시에서 개인택시를 하면 일단 수입 자체는 보장된다. 진상손놈 태울 때마다 스트레스 받고 경찰에 걸릴 때도 스트레스 받고 접촉사고라도 나면 더더욱 스트레스 받지만 어찌됐든 개인택시 일로 가족을 먹여 살릴 수는 있다.


C는 열심히 일했다. 이후 그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의하듯이 C는 정말 성실한 사람이었다. 나중에 개인택시 팔아치우기 전까지는 일 할 수 있는 데까지 일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몸이 삐걱거리긴 했지만. 어릴 때 제대로 못 먹고 자란 데다 계속 운전대에 앉아 있으면서 무릎 관절이 나가 버리긴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혈액순환이 잘 안 되고 혈관에 뭔가 문제가 생기기도 했지만.


C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최선을 다해 가족을 먹여살렸다. 시대적 트렌드에 맞지 않게 자식을 넷이나 낳았고 그 넷을 모두 다 교육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적어도 C의 어린 시절처럼 밥 굶기는 일은 없도록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나쁜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개인택시 일로 스트레스 만땅이고 몸은 하루하루 힘들었으며 한여름에도 뜨거운 물에 담그지 않으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무릎관절이 망가졌지만, 그것과 별개로 꽤 좋은 일이 있었다.


그래, 당시에는 '좋은 일'이었다. 그 좋은 일 뒤에 묻혀 버린 부작용이 많았고 그 부작용 중 몇 개는 정말 치명적으로 나쁜 일이 되어 버리긴 하지만 일단은 좋은 일이었다.


그 때 당시에는 좋은 일이었다. 한평생 학력 콤플렉스를 갖고 살았던 C와 그의 아내에게 무척이나 좋은 일이었고,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일이기도 했다.


당시 사람들이 흔히 "자식농사"라고 부르는 일. 자식을 얼마나 잘 키웠느냐를 가지고 서로 은근슬쩍 경쟁하던 일.


그리고... C의 자식인 나 D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일.


그래, 그 때는 좋았다. 나 D가 부모님의 학력과 무관하게 대한민국 최고 대학 최고 학부에 발을 들일 때까지는 모든 게 좋아 보였다.


말 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얘기하겠다. 나 D는 서울대를 갔었다.


아니, 더 직접적으로 얘기하겠다. 그냥 서울대 아니다. 그 학과를 나온 사람들 대부분은 학교 이름 말할 때 학과 이름을 넣어서 부를 때가 많다. 나도 그러했다.


나는 서울법대 출신이다. 로스쿨 생긴 이후 사라졌지만 그 이전까지는 전국 문과 계열 학과 중 가장 높은 커트라인을 자랑하던 학과 출신이다.


그 때는 좋았다. 그 때는.


나에게도, 아버지에게도, 어머니에게도 모두 좋았다. 그 좋은 일 뒤에서 연탄까스처럼 스멀스멀 피어나는 부작용들을 전혀 못 본 채 마냥 좋아했었다.


이 글은 내 아버지에 대한 글이지만, 다음 챕터에서는 한동안 내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C의 자랑이었던 동시에 가장 아픈 일이기도 했던 아들 이야기. 그걸로 넘어가 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