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없이 서울법대 입학. 그 때는 좋았다. 나 D뿐만 아니라 가족친척들이 다 좋아했다.
그런데... 계속 좋았을까? 취미와 적성과 특기를 고려했을 때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그렇진 않았다. 내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따져보면 '법학과'라는 게 그렇게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우선 '잘하는 것'부터 따져보자.
앞에서 얘기한 대로 나는 수학을 잘했다. 원래는 그렇게 잘 하는지 몰랐었는데 '본고사 수학'이라는 아주 독특한 제도에 힘입어 고2때부터 수학적 재능을 발휘했었고 그게 대박을 친 특이 케이스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수학을 못했던 건 아니다. 중3때는 물리경시대회 나가서 울산지역 3등을 하기도 했었다. 경남에 과학고 있다는 사실을 고등학교 가서 알았을 뿐.
다 지나간 얘기지만, 부모님이 자식의 적성을 미리 알아보고 이과 계열로 보냈다면 내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울산의 특성에 맞춰 기계공학과/자동차공학과 정도로 진학한 뒤 '대졸 초봉 7천만원을 받는 연구원'이 되어 현대모비스 정도에서 한평생 기술연구직으로 살았을지도 모른다.
요즘 시대처럼 문-이과 통합되어 있었다면 고2때 이과수학 배워서 갈아탔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90년대 초중반 무렵에는 고1 말에 문과/이과를 구별해서 선택하게 되어 있었고 나의 부모님은 자식의 적성 같은 것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학력과 무관하게 매우 합리적이고 똑똑한 분들이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과학고가 따로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데 어떻게 자식의 수학과학 재능을 이끌어 주겠는가.
그리고... 좀 극단적인 얘긴데, 내 수학적 재능을 미리 발견했다 해도 그냥 법학과 쪽으로 가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C가 성장했던 환경과 운전기사로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설움 같은 것 고려하면 자식의 재능과 무관하게 법학과로 밀어붙였을 수도 있다.
일단 내 대학 전공은 수학적 재능과 무관했다. 그 수학적 재능이라는 것도 30년째 딴 일 하다 보니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요즘은 가끔 백만단위 천만단위도 헷갈린다.
사람이 다 잘하는 것만 하고 사는 건 아니다. 재능과 큰 관련 없는 일을 '취미'와 연계해서 하는 사람도 많다.
내 대학 후배 중 유명한 친구가 한 명 있다. (이미 많이 알려진 사람이라서 네이버 검색하면 나온다.) "세계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금메달 땄는데 김앤장 변호사 하는 사람"으로 검색하면 된다.
그 친구가 서울법대 수시 지원했을 때 교수님들이 적극 만류하며 면접 탈락시켰다고 한다. "자네 같은 인재는 이공계열로 가서 나라를 먹여살려야지 이딴 법학 같은 것에 관심 갖지 말게."라는 조언과 함께 말이다.
그래도 이 친구는 변호사 하고 싶었나 보다. 미국드라마 '천재소년 두기'에서 주인공 두기가 첨단과학에 별 흥미를 보이지 않고 평범한(?) 의사가 된 것처럼, 이 친구는 평범하게 변호사(!) 하고 싶었나 보다.
세계구급 수학천재가 법대 들어왔고, 그 수학적 재능과 별 상관 없이 암기력으로 사법시험 통과했으며, 연수원에서도 10등 안에 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변호사로 잘 사는 것 같다.
이 정도 레벨이면 적성이 어느 쪽이냐는 큰 의미가 없다. 수학 적성이 세계 랭킹인데 암기력으로도 국내 10위 안에 든다면 뭐... 부러울 따름이다.
잠시 딴 얘길 했는데, 나 D의 취미는 '글쓰기'였다.
내가 고1 올라가던 때. 수학능력시험이라는 새로운 입시 방법이 도입되면서 많은 학부모들이 불안해 했었다. 내 부모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부모님들이 어느날 '세계문학전집'과 '한국문학전집'을 사 오셨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꽤 잘 보관되어 있는 하드커버 고오급 문학전집. 그게 우리집 한켠을 뙇 차지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뻘짓이었다. 특히 세계문학전집은 제대로 뻘짓이었다. 수능 지문에 세계문학은 안 나오거든.
한국문학전집도 마찬가지였다. 거기 실린 중단편 소설들 꽤 많이 읽었는데 수능에 하나도 안 나왔다. 내 수능점수 중 언어영역이 제일 낮았다...
책장수의 어설픈 말장난에 속아서 산 문학전집들. 수능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거 읽는 시간만큼 공부시간을 줄여 버린 소설책들.
그 책들이 내 취미생활이었다. 밤10시까지 자율학습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1시간~1시간30분 가량 소설책 읽는 게 큰 즐거움이었다.
그 중 가장 압도적이었던 게 '레 미제라블'이다. 만연체의 단점 같은 건 다 씹어먹는 압도적인 필력, 잡도적 떼나르디에가 등장하는 장면 하나를 위해 워털루 전투 전체를 책 두 권 분량으로 휘갈기는 힘. 빅토르 위고의 필력에 압도당했었다. 정말 대단했었다.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다. 길어야 80년인 인간의 삶을 뛰어넘어 몇백년~몇천년 후에도 사람들을 압도적으로 감동시킬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었다.
그런 꿈과 무관하게 서울법대로 진학했을 뿐.
"넌 왜 법대 왔냐?"
"점수가 남아서요."
제3자가 들으면 조낸 짜증나는 말이지만... 서울법대 내부에서는 저 얘기 자주 나온다. 어디 딴 데 가서 하지는 않지만 자기들끼리는 저런 얘기 가끔 한다. 30년 가까운 과거의 그 시절에는 나도 저런 얘기 했었다.
헬조선에서는 저렇게 '점수에 맞춰서 대학 가는 사람'이 상당히 많다. 적성에 맞추고 취미에 맞춰야 하는 게 대학전공이지만 헬조선에서는 그딴거 다 필요없고 점수에 맞춰서 대학간판을 선택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그게 최고학부인 서울법대 수준이 되면 조금 더 많아진다. 법학에 관심 1도 없이 국어 영어 수학 과학 공부만 하던 애들이 갑자기 '법학도'가 되는 경우가 은근히 많다.
사법시험으로 300명 뽑던 시절, 서울법대 정원이 270명이었다. 상식적으로 학력고사/수능/본고사 성적이 그대로 사법시험 암기력으로 이어진다면 서울법대 출신 중 대부분이 사법시험에 합격해야 정상(?)이다. 고대법대 성대법대 연대법대 등에 4년 장학생으로 가는 상위권 인재들을 고려하더라도 서울법대에서 200명 이상의 합격자가 나와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 시절에 서울법대 출신 중 사법시험에 최종 2차까지 통과하는 비율은 절반 가량이었다고 한다. 270명 중 140명 정도만 사시 합격하고 나머지는 통과 못 한 것이다.
대입시험과 사법시험의 차이. 적성의 차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의지의 차이'.
그 차이가 쌓이고 쌓이면 제 아무리 서울법대라도 사법시험 통과 못한다. 300명 아니라 1000명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나도 그러했다.
서울법대 나왔는데 사법시험 탈락. 그것도 1000명 선발하는 시대에 탈락.
뭐, 그게 나쁜 건 아니다. 결과적으로 더 잘 됐다. 로스쿨 도입되면서 한때 변호사가 2500명씩 양산되었고 결국 변호사 시장이 붕괴된 걸 보면 그 때 시험 안 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사법시험 준비하느라 거의 10년 가까이 날려먹은 걸 다 만회하진 못했지만 그래도 회사원으로서 잘 적응했다.)
다만... 문제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었다. 내가 사법시험 탈락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일들이 매우 크리티컬하게 치명적으로 나빴다.
3학년 1학기 때까지는 별 문제 없었다. 전공수업 거의 안 들어가고 시험만 보면서 간신히 학점 C~D 받던 시절에는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살았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IMF 이전 대학생들은 학점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특히 법대생들은 더더욱 그러했다. 학사경고 기준 2.0을 간신히 넘겨 졸업하는 학생들이 부지기수였다.
3학년 1학기까지는 그렇게 자유로운 인생이었다. 뒤늦게 PC게임의 재미에 푹 빠지긴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삼국지 시리즈 정도였고 인생을 말아먹을 만큼 위험한(?) 게임은 나오지 않았었다. 나는 그냥 즐겁게 몇 년 놀았다.
노는 와중에 잠시 내 취미에 대해 부모님과 얘기하긴 했다. "난 그냥 소설 쓰면서 살고 싶다"고 얘기하긴 했었다.
물론 그리 진지한 논의는 아니었다. 부모님은 듣는둥 마는둥이었고, 얘기하는 나 또한 아주 진지하게 말한 건 아니었다. 어쨌든 서울법대 간판을 달았는데 고시공부 전혀 안 하고 소설만 쓸 수는 없었으니까.
3학년 여름방학을 마치고 2학기부터 공부 시작했다. 다음해 2월 1차 시험까지 대략 6개월을 공부했고... 1개 차이로 탈락했다.
대부분 이런 시험에서 '1개 차이로 떨어졌다'고 하면 거짓말인 경우가 많다. 어차피 입증불가 영역이니 대충 구라쳐도 다 넘어간다.
그렇긴 한데, 내가 1차시험에서 1개 차이로 탈락했던 건 차후에 입증이 된다. 그게 더 나쁜 결과로 이어지긴 했지만 어쨌든 입증은 됐다.
6개월 공부했는데 1개 차이로 탈락. 당시에는 딱히 아쉽지 않았다. 고시공부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4~5년 준비하게 되고, 나 또한 그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1차 시험 끝나고 6개월을 놀아버렸다. 다시 여름부터 시작해 6개월 빡세게 달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아주 편하게 6개월 놀았다.
그 때가 마침 '새로운 게임문화'가 도입되던 시기였다. PC방이 생기고 스타크래프트와 디아블로가 나오던 시절. 고시생들이 게임문화에 미쳐 나가던 시절이었다.
그 전까지 고시생들을 타락(!)시키던 유흥은 바둑/당구 정도였지만, 게임은 차원이 달랐다. 디아블로를 개발한 '빌 로퍼'는 진정 악마의 재림 그 잡채다. 리니지 만든 택진이형은 대한민국 한정으로 더 강려크한 악마고.
뭐, 나는 리니지까지 발을 담그진 않았다. 그나마 놀고먹던 시절에 유일하게 잘 한 것 두 가지를 꼽으라면 담배 안 피고 리니지 안 한 거다. 그거 두 가지는 나 스스로를 칭찬한다.
다만, 게임하고 노는 동안 한 가지 중요한 변화를 놓치고 있었다. "사법시험 출제 경향이 바뀐다"는 변화를.
당시 사법시험은 변별력을 확보하기 위해 최신판례 출제 비율을 높이고 있었다. 즉, 작년에 공부 열심히 해서 기초이론을 잘 쌓았다고 해도 그 한 해의 최신판례를 모르면 1차시험에 합격하기 어려운 분위기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런 트렌드 따위에 관심없이 게임만 하다가 막판 6개월 동안 작년에 본 기초이론만 주구장창 외웠다면... 잘 될 리 없다. 두 번째 1차시험도 탈락해 버렸다.
큰 틀에서 안정적으로 계속 의지를 갖고 공부할 수 있었다면, 이 두 번째 탈락도 그리 문제되진 않았을 것이다. 최신판례는 잘 모르지만 대신 기초이론을 더 확실히 다졌고 이건 2차시험에서 밑천이 되니까.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터졌다. 나도 예상 못했고 내 아버지 C도 예상 못했던 문제였다.
시험문제 따위와 비교할 수 없는 인생 자체의 문제. 20대 중반에 나 자신의 존재이유를 고민하게 만들어 버렸던 문제.
그건 심각했다. C는 전혀 예상 못했겠지만 자식 D의 앞날을 제대로 꼬이게 만들어 버릴 만큼 심각했다.
C는 거짓말을 했다. 자식 D가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