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다 가는 군대. 분단국가에서 남자로 태어난 이상 어지간하면 다녀 와야 하는 군대.
나도 그렇게 군대를 다녀왔다. 남들보다 6~7살 가량 늦은 나이에 후다닥 다녀왔다.
뭐, 늦게 간 덕분에 복무기간이 3주 줄어들긴 했다. 원래 26개월이었던 게 24개월로 단축되면서 이미 입대한 사람들도 조금씩 줄여 주긴 했다. 그래서 나는 25개월 1주일 만에 전역할 수 있었다.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는 말이 있다. 나는 딱히 동의하지 않지만... 어쨌든 군대 갔다오니 내가 스스로 돈 벌어서 스스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처음부터 바로 돈 번 건 아니고 또 사법고시 핑계로 한동안 놀다가 1차시험에 또 탈락한 뒤에 움직인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그리고 그 때 내가 깨달은 게 있다. 나에게 '돈 안 드는 취미'가 생겼다는 것.
고시생 시절이 인성(人性)에 그리 바람직한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한 가지 좋은 게 있다면 '돈을 적게 쓰고 사는 게 습관화된다'는 점은 나름 괜찮다. 즉, 물욕(物慾)이 최소화된다.
면허가 없고 자동차를 몰아 본 적이 없으니 차 욕심이 없다. 1평 반 정도 되는 고시원에 몇 년씩 살다 보니 집에 대한 욕심도 없다. 시간당 1000원짜리 PC방에서 게임만 해도 충분히 즐거우니 골프/낚시/여행 등 비싼 취미활동을 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당시의 나는 게임 외에 또 다른 취미를 갖고 있기도 했다. 군대 병장 때부터 시작한 취미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었다.
행정병은 컴퓨터를 마음대로 쓸 수 있다는 큰 장점이 있다. 그리고 나는 사단사령부 전체에서도 가장 널럴하다는 법무행정병이었다. 소설 쓸 시간이 꽤 많았다.
물론 그 때 쓴 소설은 상업적으로 폭망했다. 대략 15년이 지난 뒤 완성하고 웹소설 사이트에 올렸었는데 이미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소설이었다. 그래도 내 소설 세계관의 기본이 되었으니 첫 작품으로서 할 일은 다 하긴 했다.
아무튼 그렇게 '돈 안 드는 취미'로 무장하고 살다 보니, 딱히 사법시험에 붙어야 할 이유도 없어졌다. 판검사로 위세 떠는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변호사가 돈 버는 것도 그리 부럽지는 않으니 그냥 회사원으로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취직했다. (다른 글에 쓴 대로) 동부건설 법무팀이 내 첫 직장이었다.
그런데, 회사원이 되고 보니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변호사들이 돈 잘 벌어서 부럽다기보다는 그냥 자기 이름 걸고 의견서 쓰는 게 좋아 보였다.
그리고, 이 때의 나는 여전히 자신감 폭발 상태였다. 2차시험에 탈락하긴 했지만 그 전에 '복수정답 추가합격이긴 하지만 아무튼 6개월 공부한 걸로 1차시험 합격했다'는 자신감이 남아 있었고, 2차시험도 21개월 내내 게임하고 놀다가 떨어진 거라 다시 공부하기만 하면 붙을 것 같았다.
결국 그 근거없는 자신감 때문에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다. 이미 로스쿨 제도 실시하는 게 확정되어 있었고 사법시험은 제대로 끝물 타고 있었지만 그런 걸 전혀 고려하지 않고서 덜컥 사직서부터 내게 되었다.
사직서를 냈을 때 내 나이는 한국식으로 32살. 다시 공부하기에 살짝 늦은 나이였고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이미 늦은 때이긴 하지만 일단 신림동 고시생으로 돌아왔다.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충만한 채.
본격적으로 공부 시작하기 전에 고향집에 다녀오긴 했다. 그리고... '두 번째 치명적인 거짓말'을 듣고 말았다.
아마 두 번째 때에는 가족들이 거의 다 모여 있었던 것 같다. 첫 번째 '1차 시험 합격했다는 거짓말' 때에는 다른 형제자매들이 없었는데 두 번째에는 다들 있었던 것 같다.
그냥 일상적인 대화를 하고 과일 먹고 술 먹으면서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고 있을 때. 내 아버지 C가 말했다.
"이번에 이빨 치료하러 치과 갔는데 아들이 검사라고 하니까 치과의사 태도가 달라지더라. 수원지검 검사 한다고 했는데 바로 공손해지더만."
순간 분위기가 싸~해졌다. 나는 노골적으로 험악한 표정을 지었고 형제자매들도 내 눈치를 봤다. 그리고 어머니가 한 마디 했다.
"아 D가 그런 거 싫어한다고 예전에 난리쳤는데 왜 또 쓸데없는 소릴 하소. 마 술 취했으면 들어가 잠이나 자소!"
뒤늦게 수습하려고 했지만 수습이 불가능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돌이킬 수가 없었다.
내가 회사 그만두고 다시 고시공부 하겠다고 할 때 고향집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찬성했었다. 그 이유가 뭔지 알 수 있었다. 그동안 계속 주위에 거짓말 하면서 살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20대 중반에 내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린 거짓말. 자식이 하루하루 스스로와 싸우며 온 정신을 다 쏟아부어 법률서적 외우는 와중에 사람 바보 만들면서 허세 떨어댔던 거짓말.
그 거짓말은 대략 7년이 지난 시점에서 확대재생산되고 있었다. 처음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분명히 알아차렸을 텐데도 더 악의적으로 부풀려지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원지검 검사로 알려진 상태였다. 이후에 신혼살림을 수원에 차리긴 했지만 그때까지는 수원 가 본 적도 없었는데 수원지검에 근무하는 영감님이 되어 있었다.
"그냥 마네킹 하나 사서 수원지검 검사라고 써붙여 놔라. 어차피 거짓말인데 마네킹으로 하나 실제 사람으로 하나 무슨 차이가 있노. 마네킹으로 해라. 내 얼굴 볼 생각 하지 말고."
라는 말이 진짜 목구멍까지 나왔다. 두 번 다시 연락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3년 뒤에 다시 연락할 수 밖에 없었다. 돈이 다 떨어졌거든.
32살에서 35살까지 3년. 사회생활 초반에 열심히 돈 모으고 경력 쌓아야 하는 소중한 시간을 호로록 짭짭 날려먹었다. 신림동 언덕 꼭대기 월세 12만원짜리 고시원 방에 살면서 PC방 게임비로 월세보다 더 많은 돈을 쓰며 시간을 낭비했다.
처음에는 재밌었다. 직장생활 1년9개월 동안 모은 돈이 꽤 됐었고, 다시 몇 달만 집중해서 공부하기만 하면 쉽게 시험 될 줄 알았다. 몇 달만 놀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나는 이미 공부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였다. 30대 초반에 사회생활을 경험한 이상 다시 20대처럼 공부만 하고 살 수는 없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때 3년 놀면서 '아버지의 거짓말'을 변명거리로 삼는 건 그저 내 핑계일 뿐이다. 그냥 내 의지가 약했다. 나 스스로 회사 박차고 나온 주제에 다시 열심히 공부하려는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사법시험 트렌드가 바뀌어 있었다. 이미 7년 전부터 최신판례가 당락을 좌우하고 있었는데 그 트렌드가 더 강화되었고 5지선다 객관식이 8지선다로 늘어났다. 적당히 기존 지식을 응용하여 판례까지 예측해 버리겠다는 장수생의 허술한 마인드로는 어림도 없었다.
첫 해에 5개 차이로 탈락. 둘째 해에는 4개 차이 탈락. 셋째 해에는 다시 5개 차이 탈락.
내 학습능력은 이미 망가졌다. 이걸 다시 복구할 만한 의지와 절실함도 전혀 없었다. 최신판례 트렌드에 맞추기 위해 고시학원을 다니는 것조차도 버텨내지 못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돈을 다 써 버렸다. 짧은 직장생활 동안 모았던 돈이 봄날의 눈처럼 사라져 갔다. 3년이 지난 시점의 나는 빈털터리였다.
35살. 정상적으로 대학 졸업하고 취직했으면 직장생활 8~9년차에 과장 진급했고 차 한 대 끌면서 대출로 집 살 나이다. 딱 그랬어야 할 나이다.
그 나이에 나는 경력 2년 안 되는 얼치기에 돈 한 푼 없고 오히려 생활비 300만원을 집에서 빌려야 하는 신세였다. 솔직히 자살 안 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도 '썩어도 준치'라고 재취업이 되긴 했다. 32살 때 받던 연봉보다 -25% 깎인 연봉으로 근로계약을 체결했지만 당시 나에게는 감지덕지였다. 신림동 고시원 방에서 넥타이로 목걸이 만들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그렇게 재취업을 하고 얼마 후. 내 삶에 매우매우 큰 기적이 일어났다.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내 자랑은 아니지만) 대한항공 스튜디어스 최종면접까지 갔고 대기업 비서 출신인 미모의 여인과 사귀게 되었다. 그러다 덜컥 결혼까지 해 버렸다.
당시 나 자신도 나를 믿을 수가 없었다. 자다가 눈을 뜨면 다시 신림동 고시원 방 안이고 하룻밤 긴 꿈을 꿨다는 결말 아닐까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었다.
현실적인 조건만 따지면 '하룻밤 긴 꿈'일 가능성이 훨씬 더 높았다. 나는 가진 것 전혀 없는 35살 빈털터리였다. 결혼 포기하고 그냥 나 혼자 노후준비 하는 게 바람직한 상태였다.
물론 꿈에는 돈이 든다. 당시 나는 돈이 없었고, 결국 고향집에 손을 내밀어야 했다.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을 예상했다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당시에는 대안이 없었다. 사채 빌려서 결혼식 올릴 거 아니면 고향집에 의지하는 수 밖에 없었다.
마지막에 거짓말은 없었다. 다만 '갑질'이 있을 뿐.
고향집은 여전히 '내 아들 서울법대 자부심'에 쩔어 있었다. 35살에 최저임금 될까말까한 연봉 받으면서 겨우 재취업에 성공했고 모은 돈 전혀 없는 인생이지만 그래도 자부심에 쩔어 있었다. '판검사와 동급이다!'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에 잔뜩 독이 올라 있었다.
내 아내가 첫 아이를 낳고서 몸이 안 좋아 친정에서 쉬고 있을 때. 아버지 C가 며느리에게 전화를 했다. "당장 올라가서 내 아들 아침 해먹여라."는 지시를 하려고.
이 때 알아차렸다. 내 아버지는 이미 젊은 날의 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이미 시작되었었나 보다. 노년의 섬망증상이 술과 담배를 만나 심화되는 단계 - '치매'가 도둑처럼 문 앞까지 다가오고 있었나 보다.
35살에 쥐뿔 가진 게 없는 아들을 구원해 준 천사에게 단 한 점의 고마움도 없이 '갑질'을 시전했을 때. 이미 아버지는 정상인이 아니었다. 현실의 상식과 합리성에서 벗어나 버린 편집광적 집착 환자일 뿐이었다.
그 집착의 대상이 아버지 본인의 취미나 관심사였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본인이 본인 꿈대로 살겠다면 누가 그걸 말리겠는가.
하지만 그 집착이 '살아 있는 사람인 아들'을 향한다면... 그 끝에는 파멸밖에 없다. 사법시험 떨어지고 인생 망가져서 30대 중반에 빈민층으로 살며 밑바닥 기고 있는 아들을 '판검사 동급'으로 취급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대우를 요구하는 순간... 그런 사람과 대화할 방법은 전혀 없다.
아버지와 연락을 끊어야 했다. 내 가족을 살리고 내 아이들을 지키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내 가족이 흩어지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만 했다.
나는 단호했다. 아버지 C가 젊은 날에 상병 5명을 상대로 단호하게 야전삽을 휘둘렀던 것처럼, 나 또한 정신적인 야전삽을 움켜쥐고 아버지를 향해 휘둘렀다.
효도? 까라그래. 효도르 이단옆차기 처맞고 뒈질 소리는 니들끼리나 해라.
노인공경? 노인공격이다. 유교탈레반들은 니들끼리 모여 놀아라.
헬조선의 바람직한 전통문화? 염병하네. 전통문화 찾는 것들이 땅거지로 살 때 그거 버린 사람들은 해외여행 다닌다.
나는 나 자신이 '소시오패스'라는 걸 깨달았다. 이미 20대 후반부터 그 경향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게 더욱 더 확실하게 굳어진 건 30대 후반부터였다.
효도를 비롯한 헬조선식 가치관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아버지와 연락을 끊으면서 드디어 나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아직은 자유롭지 못했다. 당장은 직장생활에 충실해야 했다. 내 가족을 지키려면 돈을 더 벌어야 했고 최소한 회사원으로서 중상 이상까지 올라가야 했다.
그렇게 고향집과 연락을 끊고 회사원으로서 나름 열심히 살았다. 대략 10년 가까운 세월을 그렇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