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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서스 Feb 05. 2024

치명적인, 너무나 치명적인 거짓말 (1)

6개월 공부한 걸로 사법시험 1차에 도전했는데 한 문제 차이로 탈락. 그 다음 해에는 더 크게 탈락.


중간에 많이 놀았다고는 하지만 본인 입장에서 그리 마음 편할 리 없다. 나는 집에 내려갔다. 5월 초순의 어느 따뜻한 날 부모님이 계시는 경주 근처 목조주택으로 내려갔다.

(당시 부모님은 전원생활(!)을 꿈꾸며 외진 곳 목조주택에 살고 있었다.)


택시 하시던 아버지 C는 그 날 오후 영업을 포기하고 나를 태워 줬다. 목조주택에서 저녁 먹으며 나름 하루이틀 잘 쉬나 싶었다.


그런데...


옆집 사람이 놀러왔다. 목조주택 몇 채 있는 외진 마을에서 나름 친하게 지내고 있었는지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 술자리에서. C는 자기 아들인 나 D를 바로 옆에 앉혀 놓고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들이 이번에 사시 1차 붙었어. 이제 바로 2차시험 준비해야 되는데 잠깐 쉬러 왔어."


"와, 대단합니다. 곧 판검사 되겠네요."


"서울법대 다니면 그 정도는 해야지."


남은 한평생 나를 괴롭혔던, 그리고 아버지 본인을 괴롭혔던 거짓말이 처음으로 시작된 날이었다.



내 아버지가 왜 이런 거짓말을 하게 되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대략 25년 가량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이유를 모르겠다.


매우 합리적이고 똑똑한 사람이긴 했지만 결국은 최종학력이 국졸이었던 아버지 C. 그가 사법시험에 대해 전혀 몰랐고 단지 [서울법대 정원 270명에 드는 게 사법시험 선발인원 1000명에 드는 것보다 훨씬 쉽다!]고 단순하게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혹은... (당시 나는 전혀 몰랐지만) IMF 이후 개인택시 영업이 극도로 어려워지면서 마음에 맺힌 게 많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후 C를 괴롭히게 되는 '고엽제 후유증'이 섬망증상 내지 망상증으로 발현되는 초기 단계였을 수도 있다.


지나고 나서 돌이켜보면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이제는 담담하게 하나씩 되짚어 볼 수 있다.


다만 그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냥 아무 말도 못 했을 뿐.



사람은 너무 당황스러운 일을 겪으면 대응을 못 한다. 그냥 넋놓고 어리둥절하게 가만히 앉아 있게 된다. 말 한 마디 못한 채 앉아서 당하게 된다.


그 날의 내가 그러했다. 나는 한 마디도 못했다. 1차시험 떨어지고 좀 쉬러 온 고향집에서 '얘 이번에 1차시험 붙었다'라는 구라를 듣고서 단 한 마디 반박도 하지 못했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 인생 자체에 대한 후회와 함께 격렬하게 울화통이 터졌다.


(쌍욕 좀 쓰겠다) 씨발. 이럴려고 자식새끼 낳았나.



자식을 일종의 '도구'로 여기는 부모들이 많았다. 유교탈레반 헬조선에서는 그런 부모들이 아주 그냥 차고 넘쳤다. [자식=노후보장수단]이라는 공식이 당연시되었다.


다만, 예전의 C는 그러지 않았다. 자식에게 노후를 맡기겠다는 생각은 안 했다. 본인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자식들이 대신 이뤄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적어도 노후에 자식에게 얹혀 살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본인이 이루지 못했던 꿈. 어릴 때 며칠 굶고 청소년기에는 안동 뒷골목에서 처맞았으며 운전수 된 후에는 늘 경찰에게 시달렸던 사람의 꿈.


'검사가 되어 경찰 따위 턱끝으로 부리면서 떵떵거리고 살아라!'라는 꿈.


C의 이루지 못했던 꿈은 그 아들인 나 D에게 강하게 투영되었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무려 서울법대에 재수 없이 한 방에 입학하게 되어 꿈을 이룰 때까지 한 발만 더 내딛으면 될 것 같았다.


재수 없이 서울법대 간 게 더 재수없었던 걸까. 그랬던 걸까.


C는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려 버렸다. 아직 1차시험도 통과 못하고 힘든 나날을 보내야 하는 아들을 바로 앞에 두고서 '얘 1차시험 붙었다!'라는 거짓말을 너무나 태연하게 해 버렸다.



사법시험 같은 장기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뭘까?


일단 암기력이 중요하긴 하다. 수능처럼 '안 배운 것을 테스트'하는 게 아니라 '알고 있는 것을 테스트'하는 선발고사에서 물리적인 암기능력이 매우매우 중요한 것은 맞다.


서울법대 수준에서 암기력 뛰어난 사람들을 보면 진짜 상상을 초월한다. 삼국지 장송이 맹덕신서 한 번 보고 다 외웠다는 게 아예 구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책 한 번 읽고 판례를 거의 비슷하게 써내는 걸 보면 기겁한다.


나 D는 그 정도 암기력을 갖추지 못했다. 본고사 수학에서 대박 터지면서 서울법대 입학했었고 암기력은 동기들에 비해 약간 떨어졌다. 객관적으로 그러했다.


하지만, 그건 핵심요소가 아니었다. 내가 서울법대 평균에 비해 암기력이 떨어진다고 하지만 그건 평균 내는 집단이 특수해서 그런 것일 뿐 일반인 전체 평균에서는 다르다.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영역에서는 상당한 암기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핵심은 '의지'였다. 반드시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말겠다는 의지. 내 인생에 5년쯤 지워버려도 좋고 평생 허리디스크와 치질로 골골거려도 좋으니 사법시험만큼은 합격하겠다는 의지. 그게 가장 중요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친아버지가 내 상태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다니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의지력이 제대로 발동할까?


특히, 어릴 때부터 검사 검사 노래부르고 다니며 아들이 무의식적으로 취미 및 적성과 관계없이 법학과 선택하게 해 놓고서 그런 거짓말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의지가 제대로 꺾였다. 기나긴 고시생 시절을 버티게 하고 끝까지 도전하게 만드는 핵심요소가 아주 그냥 제대로 망가졌다.


치명타였다. 20대 중반까지 나름 효도르 이단옆차기 지랄발광 효도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젊은이를 제대로 망가뜨리는 치명타였다.



이게 그냥 의지 꺾는 걸로 끝났다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깔끔하게 고시공부 접고 미뤘던 군대를 빨리 갔다와서 빠르게 취직했다면 더 나았을 것이다.


또 다른 문제가 겹쳤다. 내가 "추가합격"이라는 형태로 1차시험에 합격해 버렸다는 문제였다.



앞서 말했듯이 '한 문제 차이로 떨어졌다'는 말은 구라일 때가 많다. 그런데 최소한 내가 첫 번째로 본 사법시험 1차에서는 구라가 아니었다. 대략 1년5개월 뒤에 실제로 증명되었다.


어느 시험에서든 생기는 문제가 '복수정답'이다. 출제자는 답이 1개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재검수해 보니 답이 2개 이상인 상황. 각종 국가고시와 수능에서 끊이지 않는 상황이다.


기존의 사법시험은 복수정답을 인정하지 않았다. 헬조선 권력의 중심인 법조계에서 나름 방귀 좀 뀐다는 교수님들은 '오류 없는 갓(God)'인 것처럼 행동했고, 힘 없는 고시생들은 그냥 찌그러졌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고 있었다. 철옹성 같던 대머리독재 국가폭력자가 사형선고를 받았고 IMF로 온 나라가 대혼란에 빠지면서 대한민국은 빠르게 달라져 가고 있었다.


사법시험 시행 이래 최초로 복수정답이 인정되었다. 총 4문제가 복수정답 처리되었다고 하더라.


그 복수정답 처리된 4문제 중 2개가 나에게 해당되었다. 1개 차이로 떨어졌던 시험이 복수정답 인정되면서 1개 남아서 합격한 시험으로 뒤집혔다.


그리고, 이 복수정답 인정된 시기가 참 좋았다. 원래 4월에 1차 합격자 발표하는데 나는 9월에 추가합격됐다. 무슨 말인고 하니, 남들보다 7개월 더 많은 시간을 확보했다는 거다.


사법시험 1차 합격하면 2차 응시 기회를 2번 주는데, 2차 시험이 6월에 시행되므로 사실상 첫 해 2차는 합격하기 어렵다. 대부분 다음해에 시행되는 두 번째 2차 시험에 집중한다. 총 14개월의 준비기간을 갖고 착실하게 장기레이스를 펼친다.


그런데 나는 9월에 추가합격했다. 다음해 2차까지 9개월 남았고 그 다음해 2차까지는 무려 21개월 남았다. 제대로 공부하기만 하면 첫 해 합격에 도전해 볼 수 있었고 그게 안 되더라도 1년을 더 준비할 수 있었다.


제대로 공부하기만 하면 말이다.



다 지나간 일이긴 한데, 이 때 나는 의지 측면에서 제대로 망가져 있었다. 부모님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효도르 이단옆차기 식 효도문화에 찌들어 서울법대 왔다는 걸 심하게 후회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게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게임 해 본 사람들은 안다. 자기 인생을 말아먹으면서 게임하는 게 제일 재밌다. "인생을 태워먹는 맛"이 더해지면 헤어날 수 없다.


게다가, 나는 거만했다. 원래 거만하고 이기적인 성격이었는데 (지금 나 자신을 소시오패스라고 하는 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 거만한 성격이 서울법대 합격하면서 더 악화되었다. 그 거만함에 "6개월만 공부했는데 1차 합격했다"는 자만심이 또 더해진 것이다.


나는 제대로 놀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심한 거짓말에 더해 나 자신의 자만심까지 더해지자 계속 놀게 되었다. 아주 그냥 노는 데에 심취해 버렸다.


때마침 디아블로2가 나왔다. 지역구 악마 김택진을 귀쌰대기 날려버리는 세계구 급 악마 '빌 로퍼'가 드디어 불멸의 히트작을 내놓은 것이다. 달려 줘야지.


사법시험 2차 준비생인 시간보다 '활전사 아마존'인 시간이 더 길었다. 몇 배 더 길었다. 끝내 윈드포스는 못 뽑았지만 이글혼은 뽑아 봤다. 게임방에 돈 많이 퍼 줬고.


이러는 동안 고향집과는 거의 연락 끊고 지냈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시험 떨어지고 쉬러 내려온 자식을 바로 옆에 앉혀 두고서 합격했다고 구라쳤는데 거기 다시 연락하면 그것도 이상하잖아.



21개월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2차시험 4일 마친 날에 디아블로2 확장판이 나왔고, 나를 포함한 우리 팀은 신림동에서 가장 먼저 확장판 끝판왕 '바알'을 잡는 쾌거(!)를 이뤘다. 그 때는 그러했다.


그리고 시험의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


뭐, 그 와중에도 합격하는 사람은 합격했다. 당시 게임하던 서울법대 졸업생 중 몇몇은 뒤늦게 정신차리고 열공하여 합격하곤 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일단 의지가 없었다. 첫 6개월 동안은 하루 13시간씩 도서관에 앉아 열심히 법학서적 외웠었는데 두 번 다시 그런 의지를 발휘할 수가 없었다.


그 상황에서 군대 끌려갔다. 조금 더 머리를 써서 대학원 진학해 놨다면 군대 안 갈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준비도 안 되어 있었다. 학부졸업 필수학점 미달인데 무슨 대학원을 가겠는가.


27살에 군대 이등병이 되었다. 집떠나와 열차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6주 후 다시 열차타고 강원도 끝자락 철잭사단으로 가던 날. 헬조선 남자들이 20대 초반에 겪는 일들을 20대 후반에 겪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 딱 그 말 그대로였다.


재수 안하고 곧장 서울법대 합격. 6개월 공부했는데 1개 차이로 떨어졌다가 1년5개월 뒤에 추가합격. 남들보다 7개월 길게 2차시험을 준비할 수 있는 여유.


그 좋은 기회가 고스란히 마(魔)로 돌아왔다. 시험 떨어진 아들을 옆에 앉히고 시험 붙었다고 거짓말하는 치명적인 의지상실 행동에 더해 나 자신의 거만한 성격이 합쳐져 최악의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리고, 아직 거짓말은 끝나지 않았다. 거짓말 시즌2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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