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의 일화 중 하나로 시작해 보자.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이후, 그가 전선을 시찰하던 중 한 장교를 만났다. 대령 급 장교는 건방진 표정으로 나폴레옹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계급장도 없이 돌아다니는군. 자네 계급이 뭔가? 병사인가?"
"그보다는 좀 높지요."
"상사쯤 되나?"
"그보다는 좀 높지요."
계속 이어진다. 소위, 소령, 대령, 장군(여기서부터는 존댓말로 바뀐다. 영어라면 'Sir'를 붙이겠지), 총사령관, 그리고 마침내... 황제!
계급과 서열이 있는 사회에서 "끝판왕"이라는 것. 나폴레옹의 일화는 그 끝판왕의 자부심 같은 걸 잘 보여 준다. 나폴레옹이 키작남 루저라는 것 따위는 아무 의미 없어지고 오로지 '황제'라는 것만 남는다.
자,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C의 자식인 나 D의 이야기로.
대한민국 대학은 서열화되어 있다. 요즘은 수시모집과 지역인재할당으로 꽤 섞였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30년 전 대학서열이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그 서열화된 대학 내부적으로도 학과마다 커트라인이 다르다. 학력고사 수능 본고사를 거치면서 '커트라인 기준 서열'이 쫙 나온다. 그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기왕 서울대 어그로 내세웠으니 더 세게 가 보자.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서울대라고 다 같은 서울대가 아니다. 서울대 내부에서도 학과 별 커트라인을 기준으로 한 서열이 나뉜다. 모르는 척 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그 서열을 의식하고 있고, 상위 서열 학과는 대학 이름 뒤에 자기 학부 이름을 붙일 때가 많다. 서울경영, 서울약대, 서울치대, 서울의대 하는 식으로 학부를 강조하는 사람이 은근 자주 보인다.
2020년대 기준으로 대학+학과 서열을 매기면 단연코 '서울의대'가 끝판왕이다. 문이과 통합수능에 법학과 소멸에 공대박사 천시 현상에 의대 쏠림 현상이 합쳐지면서 서울의대가 천상천하 유아독존 끝판왕으로 등극했다.
그런데, 예전에는 조금 달랐다. 문과와 이과가 나뉘어져 있었고, 의대 쏠림 현상이 지금만큼 심하지 않았다. 대략 2000년대 초반까지로 볼 때 이과 T.O.P는 물리학과 또는 전자공학부 쪽이었고 문과의 T.O.P는 법학부 쪽이었다.
내가 대학 들어가던 `90년대 중반 기준에서 "서울법대"는 문과 끝판왕이었다. 과거 "서울상대"로 불리던 경제학부 및 경영학부와 큰 차이 없긴 했지만 커트라인 기준으로 끝판왕이긴 했다.
이회창 윤석열 한동훈 조국 박주민 이탄희 등을 배출한 단과대학 서울법대. 겸손 따위 똥구녕에 처박고 거만 떨면 감히 '천하제일'이라는 말까지 붙이던 서울법대.
나도 거기 나오긴 했다. 학점이 바닥을 기어 자칫하면 졸업 안 될 정도긴 했지만 어쨌든 서울법대 졸업장을 갖고 있다. 내 고향 집 어딘가에 잘 찾아보면 졸업장이 있긴 하다.
국졸 개인택시 기사였던 아버지, 당시까지 계속 가정주부였고 역시 국졸이었던 어머니. 그 자식이 서울법대를 갔다. 그냥 서울대도 아니고 서울법대에 입학했다.
그 때는 좋았다. 마냥 좋았다.
조금 덧붙이면, 고1 때까지의 나는 서울법대 갈 정도 실력은 안 됐다. 어릴 때 아버지 C가 바라던 대로 '교통경찰 찍어누르는 권력자 검사'가 되려면 법대 가는 게 좋았겠지만, 고1 시절까지의 실력으로는 서울법대는 영 어려웠다.
당시 울산에는 비평준화 고등학교가 있었고 거기선 한 해에 40~50명 정도를 서울대에 입학시켰었는데, 그 중 소위 '최고학부'를 가는 학생은 15명 정도였다. 문과가 1/3이었으니 문과 중에서 최고학부까지 가는 학생은 5명 전후였다. 즉, 문과 기준 전교5등은 해야 서울법대 노려 볼 만 했고 그 이하 성적으로는 어려웠다.
고1때 내 성적은 전교 50~70등. 아직 문/이과 구분은 되지 않았지만 구분해서 계산한다면 문과 기준 15~25등 사이였다. 무리해서 서울대를 간다면 국문과 등 어문계열, 취직 잘 되는 학과를 간다면 성균관대 정도를 노리는 게 알맞은 성적이었다.
그런데... 운이 좋았다. 나를 위해 바뀐 건 아니었지만 대한민국 대입시험 제도가 크게 바뀌고 있었다. 나처럼 선행학습을 안 한 학생들에게 매우 감사한 시험제도가 도입되고 있었다.
'수능'과 '본고사'가 시작되었었다.
고1 가을 무렵의 어느 모의고사 날.
오전에 시행된 학력고사 방식의 모의고사를 끝낸 뒤, 나는 완전 좌절했었다. 반에서 5~6등은 했었던 학력고사 성적이 급전직하하여 반에서 18등.
많이 어려웠다. 고등학교 동기들에 비해 선행학습 수준이 한참 떨어졌던 나에게 모르는 단어로 도배된 영어 시험지는 상당히 어려웠다. 모르는 단어를 앞뒤 문맥으로 짜맞춰서 이해하는 게 내 특기이긴 했지만 4지선다 문제에 모르는 단어 3개 나오고 그 중 의미가 다른 것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문맥 같은 걸 고려할 수가 없잖아.
비평준화 고교에서 성적 떨어지면 내신등급에 치명타를 입는다. 학력고사 성적이 내신으로 이어진다고 가정하면 15등급 체제에서 대략 5~6등급. 자퇴하는 게 나을 수도 있는 성적이었다. 대학 진학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인 고딩에게 있어 나름 좌절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 좌절감 때문이었을까. 오후에 본 '새로운 방식의 시험'에서 엄청나게 집중했었다. 그 새로운 방식의 시험이 바로 '수학능력 모의고사'였다.
수능(修能). 말 그대로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검증하는 시험"이다. 배워서 알고 있는 거 말고 앞으로 배울 수 있는 능력을 테스트하는 게 수능의 핵심이다.
21세기로 넘어가면서 대한민국 수능은 나름 헬적화(!)되었고 교과서에서 나오는 문제도 많다고 하는데, 초기 수능은 정말로 '배울 수 있는 능력'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었다. 지문은 교과서와 무관했고 문제 상당수도 단순암기와 무관했으며 각 문제 내에서 합리적인 추론을 하면 생전 처음 보는 내용도 답을 맞출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즉, 초기 수능은 [선행학습을 무력화시키는 시험]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전에 학력고사 방식 모의고사를 말아먹으면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결과는... 전국 20등. 표본집단이 적긴 했지만 아무튼 전국구 등수가 나오긴 했다.
학력고사로 하면 반에서 18등인데 수능으로 하면 전교등수가 아닌 '전국등수'로 20등. 웹툰 "정글고"에서 영원한 2인자 명왕성이 반에서 2등인 동시에 전국 2등인 것과 맞먹는 수준이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심한 격차가 났다.
이 날 이후 자신감이 붙었다. "새롭게 도입되는 시험에서는 내가 전국구 레벨이다!"라는 자신감이 뿜뿜 뿜어져 나왔다. 그게 고2 이후 내신성적을 끌어올리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내게 큰 도움을 준 게 하나 더 있었다. [본고사 수학]이었다.
초기 수능 시절에 본고사를 같이 시행했던 시기가 있다. 그 시절 서울대 본고사 수학은 악명이 자자했다. 이과 문과를 가리지 않고 수학이 당락을 결정지을 정도였다.
당시 문과 쪽도 본고사 수학을 봐야 했고 문과수학의 총 배점은 100점이었다. 본고사 400점 + 수능 200점 + 내신 400점으로 총 1000점을 평가하는데 그 중 수학이 100점이었다.
배점만 보면 10%지만, 수학의 비중은 엄청났다. 6문제가 나오는데 이 중 3개만 맞춰도 합격할 수 있고 2개 맞으면 다른 과목 점수에 따라 합격 여부가 나뉜다고 할 정도였다.
반면 국어나 영어는 문과 기준으로 총 배점은 높아도 그렇게 큰 편차는 없었다. 서울대 지원할 정도 학생이 어학 계열에서 치명적으로 낮은 점수를 받을 리는 없으니까.
내신도 큰 차이는 없었다. 나처럼 2등급도 있고 가아끔 3등급도 있었지만 등급 1개 당 편차가 5점이었다. 수학 한 문제에 15~20점씩 왔다갔다하는데 5점 편차는 뭐 사소한 수준이었다.
즉, 초기수능 시절에 함께 시행되었던 본고사는 "수학 만능주의"였다. 본고사 수학 문제 6개 중 3개 이상을 풀어내느냐 마느냐 하는 게 핵심이었다.
당연히 모든 학생들이 수학에 몰빵했다. 최소한 서울대 입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라면 문과 이과 가리지 않고 모두 수학에 집중했다.
그 때 나는 몰랐지만, 서울 지역에서는 본고사 수학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사교육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그 사교육의 폐해를 없애기 위해 시행 3년 만에 국영수 본고사를 없애버렸고 논술만 남기게 되었다 카더라.
뭐, 울산에서는 본고사 수학을 사교육으로 가르쳐 줄 만한 사람 자체가 없었다. 누군가 샘플로 갖고 온 일본 동경대 본고사 문제는 학교 선생님들도 풀어 주지 못했다. 해설을 봐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결국 울산 비평준화 학교에서는 학생들끼리 머리 짜내서 자체역량으로 어려운 문제 풀어 보는 수 밖에 없었다. 밤10시까지 이어지는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나름 수학실력 되는 학생들이 일본 본고사 문제 붙잡고서 몇 시간씩 고민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에 나는 미분적분을 배웠다. 원래 고3 과정인데 고2때까지 모든 과정을 끝내 버리는 기형적인 한국입시 시스템에 맞춰 2학년 때부터 미적분을 배웠다.
함수를 만든 데카르트. 미적분의 기본 개념을 세운 뉴턴. 미적분을 지금의 수학체계로 확립했다는 라이프니쯔.
다들 천재다. 인류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거인들이다.
지금의 나는 30년 가까이 '문송합니다'로 살아 왔고 미적분의 기본 개념조차 잊어버렸지만, 고2 시절의 나는 함수와 미적분을 꽤 잘 다뤘다. 도형 문제나 방정식 문제를 함수와 미적분으로 풀어 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악명 높던 동경대 본고사 수학도 해설과 다르게 함수와 미적분으로 풀 때가 있었다.
그 시절에는 그랬었다. 그 시절에는.
시간이 흘러 수능을 봤고 결국 서울대 본고사 시험장까지 가게 되었다. 이틀 연속으로 이어진 시험 중 수학은 2일째 1교시에 배정되어 있었고 총 120분의 시험 시간이 주어져 있었다.
6개의 문제들. 도대체 무슨 공식을 적용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
나는 대략 90분 동안 2개를 풀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2개 중 확률문제 1개는 틀렸었다. 경우의 수를 잘못 계산했더라.
그런데... 나머지 30분 동안에 4개를 더 풀었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어려운 문제 하나를 놓고 몇 시간이고 고민하면서 해결방법을 찾으려 노력했던 경험이 한순간에 폭발했다.
명작만화 '베가본드'에서 미야모토 무사시가 숙적의 칼을 받아넘기는 데에 온 정신을 집중하여 입가에 침이 흐르는 것도 모를 정도로 몰입하는 상태. 그에 맞먹는 수준의 몰입이 일어났다. 나는 6개 문제에 모두 풀이와 답을 썼다.
15점짜리 확률문제 1개는 틀렸지만 나머지 5개는 다 맞았다. 아마 풀이식에 일부 빠진 부분이 있었을 테니 85점은 아니었겠지만, 아무튼 6개 중 5개를 맞췄다.
(여담으로 당시 본고사에서 문과 수학부문 수석이 87점인가 83점이었다고 기사에 난 것 같다.)
내신 2등급으로 -5점 까먹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국어 영어 제2외국어 점수가 조금 부족한 것 같았지만 그것도 딱히 문제되지 않았다. 그냥 수학문제 5개 맞춘 걸로 다 커버되었다.
나는 서울법대에 합격했다. 재수를 하지 않고 곧바로 합격했다.
다들 예상하시겠지만, 집에서는 (좋은 의미로) 난리가 났다. 국졸 학력으로 한평생 설움을 안고 살았는데 자식이 갑자기 서울법대라니. 어익후 좋아라.
뭐, 장본인인 나도 좋긴 했다. 기분 나쁠 이유는 없잖아.
고2 때 수학적 재능을 발견했는데 학과는 법학과로 갔다는 것. 법학과 학생들이 거의 다 도전하는 '사법시험'에서 수학적 재능은 별 의미 없다는 것. 암기력과 끈기와 필사적인 각오가 훨씬 더 크게 좌우한다는 것.
그 때는 그걸 몰랐다. 단지 '가문의 영광'을 즐길 뿐.
그 때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