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테서스 Jan 29. 2024

자존심을 버려야 했던 개인택시 시절 (1)

C가 카프로락탐에서 탱크로리 운전수로 일하던 시절은 평온하고 좋았다. C에게도 그 가족들에게도 모두 최고의 시절이었다.


그러나, 모든 황금시대가 그렇듯이 그 아름다운 시절이 영원할 수는 없다. 황금시대가 지나가면 '청동과 철의 시대'를 살아야 한다. 핏발선 눈으로 아귀다툼을 벌이고 때로는 전쟁처럼 싸워야 하는 날들을 견뎌내야 한다.


80년대 후반, C의 황금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 위기는 본인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앞에서 말했듯이, 카프로락탐은 나일론 원료를 만드는 화학회사로서 최대주주가 '동양나이론'과 '코오롱'이었다. 어느 쪽이 더 많은 지분을 가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섬유회사가 공동으로 카프로락탐의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는 구조였다.


이 최대주주 중 한 쪽에서 카프로락탐에게 업무상 요청을 했었다. "니들 탱크로리 5대 중 3대를 감가상각 제외한 잔존가에 넘겨라"라는 요청을.


이러한 요청을 한 이유가 뭔지는 모른다. 이 요청이 나온 게 그 회사의 이익 때문인지 / 회사의 일부 개인들을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카프로락탐의 관리직 임원들과 그 주주회사 간에 어떠한 논의가 오갔는지도 모른다.


탱크로리 운전수들 입장에서는 그저 '통보'를 받았을 뿐. '당신들이 몰고 다니던 탱크로리 5대 중 3대가 딴 회사로 넘어가니 앞으로 2대만 갖고 잘 배차해서 타세요.'라는 통보를 받았을 뿐.



어린 시절의 나 D에게 그 탱크로리는 "아빠 차"였다. 중화학 공업 중심인 울산에서도 가장 크고 긴 초대형 트레일러, 하울의 움직이는 성(城)처럼 거대하고 강력했던 그 철덩어리는 어린 내 기억 속에 "아빠 차"로 각인되어 있었다.


그러나... 아니었다. 그 차는 "회사 차"였다. 아버지 C는 회사의 결정 앞에 그저 무기력한 개인일 뿐이었고 "회사 차"는 관리직 회사원들이 마음대로 팔아넘길 수 있는 자산이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탱크로리가 팔려갔다. 아버지의 자부심이었던 외제 트럭과 거대한 화학물질 운반 트레일러는 다른 회사 소속이 되었다.



운전수 5명에 차량 2대. 돌아가면서 배차한다 해도 운전수가 남아도는 상황. 주6일 근무 중 4일 이상은 회사에서 눈치 보며 놀아야 하는 상황.


이 상황에서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지금이라면 '그냥 회사에 눌러앉는다'는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회사에서 마음대로 해고할 수도 없고 (출장비는 줄었지만) 연봉과 보너스는 똑같이 나오니 놀면서 월급받는다는 심정으로 그냥 버텼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때는 1980년대 후반 "노동자 대투쟁" 시절이었다. 소나기 퍼붓는 옥포의 조선소에서 눈보라 휘날리는 서울 철로 위까지 전 국토가 파업으로 들끓었고 그 투쟁의 성과가 '전노협'으로 이어지던 시절이었다.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잔뜩 쫄아 있는 관리직들을 상대로 적당히 겁 줘 가면서 노조활동 강화할 것처럼 행동하면서 대충 시간 때우면서 버티면 오래오래 직장생활 할 수 있었다.


실제로도 버티는 사람이 있었고 그렇게 버틴 사람들은 정말로 정년까지 회사 다녔다. 몇 년 후 카프로락탐은 결국 동일 기종 트럭과 트레일러를 2대 더 사왔고, 버티던 운전수들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IMF 이후에는 힘들어졌지만 그때까지는 잘 다녔었다.


다만... C는 버티지 못했다. '일 안 하고 월급 받는다'는 상황 자체를 갑갑하게 받아들였고 불안해 했었다.


C는 다른 직업을 알아봤다. 그게 바로 개인택시였다.



IMF 이전의 개인택시는 꽤 좋은 직업이었다. 운전대 잡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좋은 직업으로 인식되기도 했었다. IMF 이후 급속도로 망가지면서 힘들어졌지만 그 전까지는 운전수 사이에서 일종의 동경 같은 걸 받는 직업이기도 했다.


IMF 이후로 택시가 망가진 건 '면허 남발'의 영향이 크다.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정부는 자영업을 늘리는 방식으로 위기를 각 개인들에게 분산시켰었고, 택시면허 따는 게 쉬워지면서 경쟁이 격화되었었다. 가뜩이나 택시 타는 사람이 없는데 공급만 늘어나니 각 택시들의 수입이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뭐, `80년대 후반에 그것까지 예상할 수는 없었다. 그 때 당시에는 택시가 좋았다. 잘 하기만 하면 카프로락탐 때와 비슷하게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C는 개인택시 면허를 따려고 했다. 운전면허 자체는 대형 특수 소형 다 있으니 문제없었고, 개인택시 면허를 얻는 데에 필요한 요건을 갖추려고 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카프로락탐 재직 시절의 운전경력은 개인택시 면허에 필요한 경력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


(내 기억이 맞다면) 당시 개인택시 면허를 딸 때 1순위는 '법인택시 무사고 경력 10년 이상'이었다. 이건 뭐 당연한 거다. 똑같은 택시인데 법인택시 기사에서 개인택시 기사로 바뀌는 것 뿐이니 1순위 해 줄 만 하다.


2순위 가. 항목이 '법인택시 무사고 7년 이상'이고 나. 항목이 '차량운송을 직업으로 하여 무사고 10년 이상'이었을 것이다. 즉, 대한통운 화물차 운행을 10년 이상 무사고로 해냈다면 2순위 상급 요건이 된다.


그러나, 카프로락탐은 운송회사가 아니고 화학물질 제조 회사다. 그래서 카프로락탐의 탱크로리 운전기사는 저 2순위 나.에 해당되지 않는다.


3순위도 있지만 매년 80개 정도 나오는 택시면허에 3순위로 도전하기는 어렵다. 최소한 2순위에는 들어야 면허 받을 수 있다고 했었다.


군 시절 포함 20년 이상 직업운전수로 살았지만 택시 2순위에 들지 못한다. 경력요건만으로는 그러했다.


여기서 또 한 번. 그런데...


C에게는 다른 요건이 있었다. 2순위 중에서 최하 요건이긴 했지만 2순위 마. 항목에 해당하는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경찰청장 표창]이라는 요건이 있었다.



당시 기준으로 거의 10년 가량 잊고 있었던 일인데, C는 30대 초반 즈음에 경찰청장 표창을 받은 적이 있었다. 정말 우연히 사람의 목숨을 구해 주고 '의로운 시민'으로 표창장을 받았었다.


C가 대한통운에 다니던 때. 그는 트럭을 몰고 지나가다가 근처 물웅덩이 같은 곳에서 사람이 허우적거리는 것 같은 모습을 봤다고 한다. C는 트럭을 세우고 조수와 함께 물웅덩이 쪽으로 가 그 사람을 건져 줬다고 한다. 진흙 다 뒤집어쓰면서 사람 하나 살려냈다고 한다.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줬더니 보따리 내놔라... 는 상황은 아니고. 건져낸 사람은 대략 중~고등학생 정도 되는 청소년이었단다. 생명의 은인에게 그랜절 올릴 정도의 예의는 갖춘 청소년이었다.


그리고, 그 청소년의 아버지가 인근 경찰서장이었다. 운전수였던 C가 그렇게 싫어하고 두려워했던 경찰 중에서도 꽤 높은 경찰이었다.


C는 은근 금전적인 보상을 생각했다고 하나... 경찰서장은 C를 추천하여 표창장을 줬다고 한다. "언젠가 이 표창장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라는 말과 함께.


그렇게 표창장 받긴 했는데, C는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다. 하긴 일상생활 하면서 경찰청장 표창장 써먹을 일이 없으니 잊어버리는 게 당연하기도 했다.


그렇게 잊어버리고 살던 표창장이 갑자기 매우 중요해졌다. 울산지역 개인택시 면허를 신청하는 데에 2순위 마. 항목으로 이름 올릴 수 있는 강려크한 무기로 맹활약하기 시작했다.



표창장으로 재무장한 C. 그는 곧바로 개인택시 면허를 따...지 못했다.


2순위 중에 제일 하위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연속으로 탈락할 건 아닌데, C는 두 번 가량 택시면허 심사에서 탈락했다. 나름 명예훈장 같은 '의로운 시민'인데도 택시면허를 받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당시 시대적 배경이 쌍팔년도를 갓 지난 시점이었다는 걸 고려했어야 한다. 대머리독재 이후 동네아재 코스프레 하던 물렁이 시절이었다는 걸 고려했어야 한다.


그 시대에는 [뇌물이 필수]였다.



나 D가 2010년에 중고신입으로 재입사했을 때. 선배 법무직원이 이런 얘기를 했다.


"등기서류 뗄 때 만원짜리 한 장 같이 주면 빨리 처리해요. 변호사 사무실에서는 다 그렇게 합니다."


2010년에 들은 얘기다. 즉, 2000년대 후반까지는 저게 관행(!)이었다는 거다. 최소한 법원 등기사무소 직원 상대로는 저렇게 일 처리를 했었다는 거다.


쌍팔년도에는 뭐... 온 사방에 뇌물 천지였다고 봐야 한다. 학교에서는 촌지, 도로에서는 뽀찌, 동사무소에서는 담배값, 경찰서에서는 회식비, 조금 직급 높아지면 별장접대. 그런 게 이 나라였다.


울산지역 택시면허 심사도 그러했다. 같은 순위 내에 가~마 항목 분류가 있지만 그 분류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고 '재량 판단'이 들어가는 방식이었던 것 같은데,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하면 이건 '뒷돈 먹여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였다.


내 아버지 C가 얼마만큼의 뒷돈을 준비했는지는 모른다. 대략 중간전달자 뽀찌까지 고려하면 300~500만원은 준비했을 것이다. 물가상승률 고려하면 2020년대 기준으로 5천만원 이상 될 만한 돈이다.


어떤 식으로 누구에게 뒷돈 줬는지도 모른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평소보다 더 많이 취한 아버지의 모습" 뿐.


당시 내가 국민학교 6학년인가 그랬는데, 나는 아버지를 업지 못했다. 우리 누나가 업었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버지를 업은 건 내가 아니라 누나였다.


그 때의 기억도 몇 년 후 내 선택에 영향을 주긴 했던 것 같다. 뇌물로 돌아가는 더러운 대한민국에서 그나마 손해 안 보고 살려면 국가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아무튼, '뇌물 먹이기 대작전'은 성공했다. 아버지는 개인택시 면허를 받아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때 뇌물까지 먹여 가며 개인택시 면허 따낸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냥 카프로락탐에서 버티는 게 더 나았다. 관리직 엿먹으라고 하고 놀면서 월급 받아내다 보면 다시 탱크로리 들여 와서 일거리 생겼을 것이다. 그 몇 년만 버티면 되었다.


이후 전노협으로 민주노총으로 민주노동당으로 발전해 가는 노동단체의 힘을 믿고 그냥 버티는 게 더 나은 선택이었다. 결과만 보면 그게 더 나았다.


그러나, C의 성격상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C는 일 없이 놀면서 버틴다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했다. 그리고 '관리직들의 독단적인 결정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블루칼라 노동자'라는 걸 견디지 못했다.


목줄에 묶인 개보다 굶어 죽는 늑대가 더 낫다고 했던가. 썩은 고기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하이에나보다 눈 덮인 산꼭대기에서 얼어 죽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더 낫다고 했던가.


C는 자유로워지고 싶었나 보다. 블루칼라 노동자를 옭아매는 한 줌 낡은 쇠사슬을 벗어던지고 '자영업자'가 되고 싶었나 보다. 택시 한 대 몰고 나가면 그 안에서 스스로 '사장님'인 직업, 그런 직업을 원했나 보다.


경찰청장 표창장에 뇌물을 더해 개인택시 면허를 받아낸 C. 그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자영업자 사장님인 동시에... 사장님이라고 쓰고 '점점 더 열악해지는 운수노동자'라고 읽는 인생이 새롭게 펼쳐졌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