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칼라 노동자가 중산층으로 살 수 있었던 시절. 그 시절의 C에게 조금 더 좋은 일이 찾아온다. 그 일은 C의 둘째자식인 나 D가 대략 5세 정도 되었을 때 일어났다.
C는 늘 그랬듯이 일 마친 후 술 한 잔 마시고 늦게 들어왔다. 나 D의 할아버지, 그러니까 C의 아버지가 밝은 얼굴로 아들을 맞이했다.
"야야 빨리 들어와 봐라. 신기한 일이 있데이."
"뭔 일인교?"
"야 좀 봐봐라. 야가 글을 읽는데이."
"네?"
여기서 '야'는 딱히 나쁜 의미가 아니라 '아이' 또는 '자식'을 뜻하는 말이다. 아무튼 C는 자신의 아버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버지 뭔 소린교. 야한테 글 가르친 사람이 없는데 어예 글을 읽습니까."
"그러게 신기하데이. 아무도 안 가르쳤는데 글 읽어. 참말로 신통하다."
술 취한 C는 여전히 아버지 말을 믿지 않았지만, 계속 진짜라고 하니 그냥 해 보긴 했다. 대충 신문 같은 걸 펴 놓고 글자 몇 개를 짚어 줬나 보다.
어어, 그런데...
"병원. 했읍니다. 대통... 그 다음은 모르겠다."
"어어, 진짜로 읽네?"
"그래 진짜다. 야가 진짜로 글 읽는데이."
그랬다. 나 D는 한글을 읽었었다. 만5세 전후에 읽었다고 하는데, 나 자신도 내가 언제부터 글을 읽었는지 기억이 없다. 장기기억이 형성되기 시작한 만5세 중반쯤부터는 이미 글자를 알고 있었다.
무척 신기한 일인 것 같지만, 사실 원리를 알고 보면 별 거 아니다.
한글은 14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음은 초성과 종성을 구성하고 모음이 중성을 구성한다. 24개 기호의 조합으로 다양한 음성을 문자로 나타낼 수 있다.
그런데, 꼭 이렇게 자음+모음+자음 결합으로 한글을 배울 필요는 없다. 한글 중에서 실제 생활에 쓰이는 글자는 약 800개 정도 된다고 하는데, 이 800개를 글자 단위로 그냥 외워버려도 한글 깨우칠 수 있다.
(예를 들어 '병'이라는 글자를 배울 때 '비읍+여+이응(ㅂ+ㅕ+ㅇ)'으로 하지 않고 그냥 통째로 '병'이라는 통글자를 외우는 방식이다. 800개를 다 외우려면 엄청 오래 걸릴 것 같지만 언어 학습능력이 좋은 5세 이전 어린이들은 말 배우는 것과 똑같은 속도로 글자를 배울 수 있다.
나 D의 자식들 2명은 모두 이렇게 통글자 방식으로 만 5세 전후에 한글을 배워서 읽을 수 있었다. 나중에 기역 니은 디귿 리을 가르치려고 하니까 엄청 괴로워하더라.)
그리고, 당시 D는 아무도 가르쳐 주는 사람 없이 혼자 글자 깨우친 게 아니었다. 그에게는 '누나'라는 스승이 있었다.
D의 누나는 나이로 2살 차이고 학교 기준으로 3살 차이였다. 즉, D는 아직 만5세 전후였지만 그의 누나는 국민학교 1~2학년이었다. 당연히 한글을 알았고 매일매일 글쓰기 연습을 했다. TV에 나오는 한글자막도 잘 읽어 줬다. D가 겁나 짜증나게 계속 물어봤지만 꾹 참고 다 읽어 줬다.
D는 그냥 통글자 방식으로 한글을 깨우쳤을 뿐이었다. '기역 니은 디귿 리을' 따질 거 없이 옆에서 누나가 글자 읽는 걸 보면서 말 배우는 것처럼 글을 배웠을 뿐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 분은 세종대왕님이시네. 어린(어리석은) 백성들에게 그 뜻을 널리 펼 수 있게 하신 분. 대단한 분이시다. 새삼 받들어 모시고 싶다.
원리를 알고 보면 '참 쉽죠?'지만, 당시 C와 그의 아버지는 원리를 몰랐고 그만큼 많이 놀랐다. 애들 유치원도 안 보내고 그냥 하루 세 끼 밥만 먹일 뿐이었는데 갑자기 애가 한글을 읽었으니 놀랄 수 밖에.
"야 천재 아이가?"
"그러게요. 이런 아가 있다는 얘기는 듣도보도 못했심더."
C의 아버지, 즉 나 D의 할아버지는 손자를 더 아끼게 되었다. 저 멀리 서울에 장손이 있지만 당장 한글 읽는 손자가 옆에 있으니 조금 더 신경쓰게 되었다.
그것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C의 집에 어린이 세계문학전집이 들어왔다. 어린이 과학전집도 들어왔다. 컬러대백과사전, 그냥 백과사전, 한국사와 세계사 전집도 들어왔다.
컴퓨터가 없었고 비디오게임도 없었으며 낮 시간 동안에는 TV가 나오지 않던 시절. 어린 D에게는 책 읽는 거 말고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게다가 D가 책 본다고 하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먼저 나서서 다른 심부름 못 시키게 막았다. 이러면 책 볼 수 밖에 없잖아.
나 D는 책 보는 걸 좋아했다. 처음부터 좋아서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장기기억이 생성되는 나이 때에는 이미 책을 읽고 있었다.
만화 '베르세르크'에 나오는 대장장이가 걸음마 시작했을 때부터 대장간 망치를 갖고 놀았다는 얘기처럼, 나 D는 스스로 기억하기 전부터 소설책을 읽었었다.
물론 이 시절에 본 소설들이 제대로 된 완역본들은 아니었다. 적당히 어린이들이 읽기 좋게 줄거리만 압축 요약한 수준이었고 진정한 거장(巨匠)들의 필력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삼국지, 수호전, 레 미제라블, 몽테크리스토 백작 등등 많은 소설들이 그러했다.
그래도 재밌었다. 금성출판사 어린이세계문학의 멋진 삽화까지 어우러져 꽤 인상적이었다. 특히 '위대한 왕'에 나오는 대왕호랑이 그림은 정말로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이 때 책 읽었던 게 중년 이후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당장 어린 시절의 인격 형성에는 그리 도움되지 않았던 것 같다. [책읽기=공부=면죄부]라는 이상한 공식이 성립해 버렸거든.
앞에서 말했듯이 나 D는 소시오패스다. 어디서 진단받은 건 아니지만 나 스스로 판단할 때 소시오패스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매우 이기적이고 탈법/불법적인 상상을 많이 한다.
뭐, 성향이 소시오패스라고 해서 다 범죄 저지르고 다니는 건 아니다. 대다수 소시오패스는 범죄를 저질렀을 때의 유리함과 불리함을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있다. 즉,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본인에게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알아서 착한 척 한다.
어릴 때 나를 특별취급하지 않고 그냥 다른 형제자매들과 똑같이 키웠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소시오패스 성향이 달라지진 않았을 것 같다. 발현 방식이 좀 달라졌을 수는 있어도 최종적으로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 성향을 드러내긴 했을 거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특별취급을 받으며 자라났다. 책만 읽고 있으면 심부름 면제. 책 읽는 게 벼슬이었고 권력이었다.
그 책이 학교공부와 관련된 것이냐 아니냐는 상관없었다. 조기교육에 찌들어 버린 21세기의 학생들은 학교공부와 무관한 소설책을 읽는 것도 논다고 까이지만, `80년대 초중반에 조기교육 따위와 무관하게 혼자 잘 놀았던 나 D는 소설책 읽으면서도 공부한다고 칭찬받았었다.
그 와중에 '부모에게 효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긴 했었다. 성인이 된 후에는 그딴 효도르 이단옆차기 처맞는 효도 따위 내다버렸지만 꼬꼬마 시절에는 나름 효도 윤리관이 중요한 것 같았다. 공자왈 맹자왈 파워가 꽤 강하긴 했나 보다.
그렇게 천지분간도 못하는 상태로 효도르 이단옆차기 효도사상 주입받고 또 한편으로는 소설책만 읽어도 공부한다고 칭찬받으며 또 한편으로는 뭔가 대단한 존재인 양 특별취급받아서 더욱 더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 갈 때.
C가 아들 D에게 바라는 것이 생겼다. 그 시절 모든 부모님들이 그러하듯 '본인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국민학교 1학년인가 2학년이 되었을 때 일이다. 앞에서 말한 초대형 추레라(트레일러)를 타고 서울 나들이를 다녀오던 중이었다.
서쪽 하늘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하늘이 온통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빈센트 반 고흐가 넘버3 송강호 빙의하듯 '저건 누리끼리한 노란색!'이라고 우기던 석양이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C는 담담하게 직업 하나를 얘기했다. 본인 기준으로 볼 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끗발 좋은 직업.
'검사'였다.
C의 입장에서는 검사가 가장 좋아 보였을 것이다.
청소년기에 안동 뒷골목을 헤매며 법보다 주먹이 더 가까운 삶을 살았었고 사회 나온 후에는 운전수 일을 하며 교통경찰에게 삥뜯기는 일상을 살았으니 일단 '경찰'이 무서웠을 것이다. 그리고, 쌍팔년도 시절에 경찰은 검사 앞에서 납작 엎드리는 시다바리에 불과했다.
즉, 쌍팔년도 이전 대머리독재 치하 헬조선에서는 [검사>>>경찰>>>>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운전기사] 부등식이 성립했다. 운전기사들은 경찰 앞에서 찍 소리도 할 수 없었고, 그 경찰은 검사 앞에서 빌빌 기어다닌다. 검사 한 명이 온 집안을 다 먹여살리고 한 가문을 일으켜 세울 것 같았다.
21세기 기준에서 보면 참 어이없고 안타까운 소리다. 당장 `87년 민주투쟁과 노동자 총파업을 겪고 나면 급격히 변하게 될 텐데 '검사 킹왕짱'이라니. 20년 후를 예상 못한 푸념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특히 C의 인생 경험만으로는 더더욱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군사독재 시절에 배고프고 처맞고 교통경찰 앞에서 굽신거려야 했던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판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주황색으로 물든 석양 아래에서 C는 '검사라는 직업'에 대해 자신이 아는 걸 얘기해 줬다.
20대 나이에 영감님으로 불린다는 이야기. 할아버지 대에 억울한 일 겪었는데 검사 하고 있는 먼 친척을 알음알음으로 찾아가서 사정 얘기했더니 지역 경찰서장이 고개 숙여 사과하더라는 이야기. 이 나라에서 검사 되면 남은 한평생 떵떵거리고 산다는 이야기.
훗날 C는 이 순간을 기억 못 했다. 어쩌면 기억하는데도 기억 못 하는 척 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기억 못 한다고 했다.
아들인 나 D는 기억한다. 국민학교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아들을 대형 트레일러 조수석에 앉혀 놓고 불타는 듯 주황색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며 '검사 킹왕짱'을 얘기하던 아버지, 그 모습을 기억한다. 40년 가량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 자신이 뭘 잘 할지, 뭘 좋아할지, 뭘 하고 싶어하는지 전혀 생각 못한 채. 국민학교 1학년~2학년 어린아이는 이미 장래 직업을 정해 버렸다. 그놈의 효도르 이단옆차기 효도사상 때문에 부모님이 원하는 직업을 가져야겠다고 결심해 버렸다.
뭐, 결심한다고 해서 다 되는 건 아니다. 당시 사법고시는 Dog나 Cow나 다 통과하는 시험이 아니었으니까. 21세기 의대 입시보다 더 빡세고 어려운 시험이었으니까.
내가 어설프게 결심만 하고 어설프게 적당히 공부 잘하는 수준으로 끝냈다면 차라리 더 나았을 것이다. 그게 C와 나 자신에게 더 좋은 결말을 가져다 주었을 것이다.
호사다마. 좋은 일에는 마(魔)가 낀다. 사람들은 그런 결말은 원하지 않지만 때로는 그렇게 안타까운 결말이 되기도 한다.
그 안 좋은 결말을 얘기하기 전에! 먼저 C의 또 다른 시절을 얘기해야 할 것 같다.
C의 인생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편안했으며 여러모로 행복했던 '카프로락탐 시절'이 끝나고 새로운 인생 챕터가 열렸다. C의 자존심이 대폭 꺾였지만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계속 일해야만 했던 힘든 시간이 시작되었다.
[개인택시]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