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에 황금시대(Golden Age)라는 말을 썼다. 내 아버지 C의 인생에서 가장 좋았던 시절이 이 때였다고 생각한다. 이후에 조금 더 좋은 일이 있긴 했지만 그 일에는 마(魔)가 끼어 있어서...
전형적인 호사다마(好事多魔)가 된 뒷 시대 이야기는 잠시 미뤄 두기로 하자. 일단은 황금시대 이야기를 하겠다. 대내적으로나 대외적으로나 큰 걱정이 없었고 애들은 잘 자라나며 살림살이도 나날이 나아지던 시대. 운전기술 하나로 먹고 살던 블루칼라 노동자가 중산층의 삶을 누리던 시대. 그 이야기를 풀어 보겠다.
"기~름 부어 축~복된 우리 고장을~ 한~마음 한 뜻으로 지~켜 가꾸~자"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텐데, 저 노래 가사는 울산시가(歌)의 일부다. 내가 어릴 때 지역뉴스 직전에 나오던 노래다.
'기름 부어 축복한다'는 말은 원래 중세 기독교 문화에서 유래된 거라고 한다. 게임에서 자주 나오는 블레스(Bless)가 이거다. 성스러운 기름을 부어 주며 신의 가호 아래 조낸 열심히 싸우고 이교도 대갈통을 으깨 버리라고 격려하는 것이다.
물론 울산시 자체가 군사조직은 아니고 어떤 종교집단도 아니니 블레스 걸려고 기름 붓는 건 아니다. 울산은 그냥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 '기름을 들이부은 도시'였다.
오일(Oil). 올리브 기름, 들깨기름, 참기름 등등이 모두 오일이긴 하지만 가장 많이 쓰이는 오일은 역시 석유(石油)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대한민국이라고 할 때의 그 기름이다.
석유가 나지 않는 대한민국은 용맹무쌍(!)하게도 석유화학단지를 만들었다. 석유를 전량 수입해 오는 주제에 석유를 2차 가공하여 각종 산업재료를 만들어 내겠다는 야심을 품고 대규모 화학단지를 지은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현대조선소 모두 그랬듯이 석유화학단지 개발계획도 이런저런 반대가 심했을 것 같다. 나는 저 시대에 살지 않았지만 나라도 반대했을 듯 하다. 석유가 안 나는데 석유가공 화학단지라니.
그러나, 대한민국에는 '휴전국가'라는 특수성이 있었다. 석유화학단지는 그 설비 특성상 군수산업 용도로 전용하기 좋았다. 유사시 화약 생산 시설로 활용하려면 석유화학단지가 필요했다.
그리고 다들 아시다시피 이 사업은 상당히 잘 됐다. 강려크한 환경오염을 유발하여 90년대 말까지 사람들을 괴롭히긴 했지만 일단은 잘 됐다.
C는 이렇게 잘 되던 석유화학단지의 한 회사에 취직했다. 나일론의 원재료 이름을 그대로 딴 회사 '카프로락탐'. C는 그 회사에서 초대형 탱크로리 운전기사 일을 하게 되었다.
이후 IMF와 금융위기를 거치며 두 번인가 법정관리 들어가고 대규모 적자에 시달리게 되지만, `80년대까지의 카프로락탐은 적자 따윈 생각할 수도 없는 알짜기업이었다. `87년 이후 노동자 대파업 시대에도 월급 팍팍 올려 줘서 노동쟁의가 전혀 생기지 않을 정도였다.
2020년대의 울산을 이끌어 가는 쌍두마차는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이지만 예전에는 석유화학단지가 T.O.P였다. 카프로락탐은 그 석유화학단지 내에서도 잘 나가는 회사였고.
당시 C를 비롯한 직원들은 1년에 1000%의 보너스를 받았다. 보너스가 연봉과 맞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C는 탱크로리 운전기사로서 별도 출장비를 받았다. 한 달에 10번 이상 서울/대구로 출장가는데 그 때마다 출장비가 나왔다. 그 출장비만 해도 월급의 40% 수준이었고 당시 C의 술값을 모두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대략 `80년대 초반쯤에 주택복권 1등 당첨액이 1천만원에서 2천만원으로 올랐었다. 주택복권은 그 개념 자체가 '집 한 채 살 돈을 준다'는 컨셉이었으니, 당시 서울지역 집값이 1500만원 정도 되었고 지방은 1천만원 수준이었다는 얘기다.
이 시절에 C가 받던 월급이 세후 30만원이었다. 여기에 *12를 하고 보너스 1000%를 계산하면 얼추 700만원 가까이 된다. 1년에 버는 돈이 서울 집값의 절반이고 지방 집값의 70%였다. 이 정도면 2020년대 기준으로 억대연봉 넘는다.
그렇게 많이 받는데 일 자체는 대한통운보다 편했다. 대한통운 시절에는 한 번 운행 나가면 1주일 이상 계속 운전을 해야 했던 반면, 카프로락탐 탱크로리는 서울 지역 출장을 가도 2박3일이면 충분했다. 그것도 차량이 좋아져서 실제로는 1박2일에 다녀오고 하루는 쉴 수 있을 정도였다.
실로 '황금시대'였다. 어릴 때 끼니 거르는 게 일상사였고 청소년기에 뒷골목에서 깡패들 피해 도망다녀야 했던 C에게 찾아온 최고의 전성기였다.
대외적으로 돈 많이 받는 것 외에 내부적으로도 좋은 일이 있었다. 옛날사람들이 중요시하는 다산(多産)의 축복이 이어졌다.
'아들딸 구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라는 구호가 대한민국 전체를 지배하던 시절이었지만, C는 딱히 그런 거에 신경쓰지 않았다. 딸 아들 딸 아들. 2남2녀를 낳아 키웠다.
그리고 부모님도 모셨다. 총8명의 대식구가 새로 산 집에서 오붓하게(?) 살았다.
물론 100% 오붓하지는 않았다. C가 그 시대 기준으로는 나름 깨어 있는 편이라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폭력적 문제해결에 익숙해져 있던 남자였다. 부부싸움은 가정폭력으로 이어졌고, 2남2녀의 자식들은 부부싸움이 터질 때마다 두려움에 떨곤 했다.
가끔 불안하고 무섭긴 해도 전반적으로는 행복했다. 어린 딸들과 아들들은 큰 걱정 없이 잘 살았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큰 불만 없었으며, C의 아내도 부부싸움 할 때 빼고는 큰 불만 없었다.
C의 황금시대인 카프로락탐 시절. 이 시절은 그의 자식인 나 D에게도 황금시대로 기억되고 있다. 아무 걱정 없이 하루종일 잘 놀 수 있었던 어린날의 추억보정까지 더해지면 말 그대로 '더할 나위 없던 시대'가 되겠지.
울산 석유화학단지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었다. 도로 이름부터가 '산업도로'다. 아주 그냥 대형트럭 다니는 게 당연시되는 도로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이 살던 집은 산업로 근처에 있었다. 소음 및 공기오염 수준을 생각하면 그리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없었지만 5~6살 정도 된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기찻길 옆 오막살이보다는 낫잖아.
당시 우리 형제자매들은 가끔 산업로 옆에 나갔었다. 거대한 트럭들이 쌩쌩 지나가다는 도로 옆에 꼬꼬마 어린이들이 앉아 있는 게 그리 좋을 리 없지만 이 또한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다행히 아무도 트럭에 치이지 않았고.
유치원 따위는 애당초 알아본 적도 없고 하루종일 흙장난 시멘트장난 아스팔트장난 하면서 놀던 꼬꼬마 어린이들. 그렇게 놀면서 계속 지나가는 대형트럭들을 본다. 8톤 이상 가는 덤프트럭, 길다란 카고트럭, 기름을 운반하는 유조탱크트럭. 그런 트럭들이 계속 지나간다.
그러다가 어느새 그 모든 트럭들을 압도할 만큼 크고 긴 트럭이 나타난다. 덤프트럭이나 유조탱크트럭보다 2배 이상 긴 초대형 탱크로리를 매단 트럭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 크고 긴 트럭을 '추레라'라고 불렀다. 그게 트레일러(Trailer)라는 걸 알게 된 건 중학생 이후였고 어릴 때에는 그냥 나도 '추레라'라고 했었다.
그 추레라가 나타나면 길가에 앉아 있던 꼬꼬마들이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외친다.
"아빠 차다!"
그랬다. 카프로락탐 시절 '아빠 차'는 세상에서 가장 크고 길었다. 성공하면 타는 차라고 광고하는 (각)그랜저보다 몇십 배 컸고 육중했다. 5~6살 꼬꼬마들이 보기에는 어지간한 건물보다 더 거대해 보였다.
물론 그 차가 '아빠 차'는 아니다. 회사에서 비싼 돈 주고 해외에서 사 온 트럭이고 아빠는 그냥 월급 받으며 트럭 운전해 주는 운전기사일 뿐이다.
그래도 그 시절 우리에게는 '아빠 차'였다. 뭔가 회사에 보고하고 회사사람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건 알지만 아무튼 '아빠 차'였다.
어린 우리들에게는 그 자체로 성(城)이었던 거대한 트레일러. 나일론의 원재료 카프로락탐과 각종 화학물질을 서울과 대구로 운송하는 트레일러.
그건 힘의 상징 같은 것이었다. 21세기 광고에 나오는 (각)그랜저보다 훨씬 더 거대하게 각인된 상징물이었다.
카프로락탐의 탱크로리 트레일러. 그 거대한 트럭을 그냥 지켜보기만 하고 끝내는 게 아니었다. 나를 포함한 C의 아들딸들은 그 트럭을 자주 탔었다. 함께 트럭을 타고 대구와 서울 쪽으로 여행 가기도 했었다.
요즘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시절에는 회사 트럭으로 출장갈 때 옆에 사람 한 명 태우고 가는 게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다. 아마 차량 성능이 극도로 나빴던 시절에 운전 조수를 태우고 다니던 관행이 남아서 그런 것 같은데, 아무튼 옆에 한 명 더 타고 있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C는 자기 조카들이나 아들딸들을 트럭에 태워 주곤 했었다. 카프로락탐 이전에 대한통운 시절에도 태워 줬다고 하는데 난 그 시절의 기억은 없다. 대신 카프로락탐 시절의 초대형 트레일러를 탔던 건 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트럭의 조수석에 타는 건 그 자체로 대단히 설레는 일이었다. 5~6살 꼬꼬마 어린이 혼자서는 절대 올라갈 수 없었고 아버지가 올려 줘야 간신히 탈 수 있었는데, 일단 올라가서 앉아 있으면 거의 대부분의 자동차들이 저 아래로 내려다 보였다.
다른 차량들은 알아서 피해 갔다. 울산 공업탑 로터리에 그 거대한 트레일러가 진입하면 감히 끼어들려는 차가 없었다. '가장 크고 긴 트럭'이라는 건 그 자체로 강력한 힘이며 권력인 것 같았다.
요즘 트럭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 시절 트럭에는 조수석 뒷자리에 누울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장거리 운행시에 잘 수 있는 간이침대였다.
트럭을 타고 가다 졸리면 그 간이침대 공간에 누워서 한잠 잤다. 웅웅거리는 트럭 엔진 소리, 뒷창문으로 보이는 하얗고 큰 트레일러. 그게 어린 나를 안심시켰다. '우리 아빠 차가 제일 크다!'는 사실이 편안한 잠을 유도했었다.
그렇게 자다가 일어나면 휴게소에서 식사를 했었다. 아직 소고기가 귀하던 시절, 아버지의 출장비로 고기덮밥 먹는다는 게 꽤 뿌듯했었다. 우리 집이 나름 부자라는 인식이 저절로 각인되었다.
유럽 쪽에서는 18세기 중반 ~ 19세기 초반 무렵을 벨르 에포크 (Belle Epoque) 라고 부른다고 한다. 직역하면 '아름다운 시대'다. 물론 그들에게 지배당하던 식민지 약소국 국민들 입장에서는 이 갈리는 헛소리겠지만 적어도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아름다운 시대이긴 할 것이다.
C에게는 이 카프로락탐 트레일러 기사 시절이 '벨르 에포크'였을 것 같다. 경제적으로도 풍요롭고 일도 그렇게 힘들지 않으며 친구들도 다 안정되고 자식들이 잘 자라던 시절, 가장 찬란한 시절이었을 것 같다.
C 본인의 생각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랬을 것 같다.
그 좋았던 시절에 또 하나 좋은 일이 있었다. 나중에는 호사다마(好事多魔)로 꼬이고 말았지만 처음 시작될 때에는 매우 기분 좋았던 일이었다.
'아들이 의외로 똑똑하다'는 것. 그게 또 다른 기쁨이었다. 그 때 당시에는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