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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서스 Jan 24. 2024

대한통운 운전수 시절

대한민국에 '대한'이나 '한국'을 상호명으로 쓰는 회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지명(地名)이나 도시행정구역 등은 원칙적으로 상표등록이 안 되고 상호등록도 안 되기 때문이다. 최소한 국가 체계가 확립된 이후부터는 그러했다.


즉, '대한'이나 '한국'을 상호명으로 쓰는 회사들은 그만큼 업력이 오래되었다는 거다. 영문으로 쓰면 곧바로 Korea를 붙일 수 있다는 장점도 있고.


대한통운은 그렇게 '대한'을 상호명으로 사용하는 회사 중 하나다. IMF와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잠시 법정관리를 받긴 했지만 대한민국 내 육상운송 분야에서는 압도적인 1위이기도 하다.


C는 그런 회사의 운전수 자리를 추천받았다. 1960년대 말, 쥐뿔 가진 게 없던 대한민국이 어떻게든 일어서 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시절에 트럭을 모는 운전수가 되라고 추천받았다.


다행히 면접에 잘 통과되었나 보다. 군사정권 시절에 '베트남 다녀온 참전용사'라는 것도 나름 가점 요소였을 것이고, 튼튼한 군용트럭을 몰았던 경험도 가점 요소였으리라. C는 대한통운 운전수가 되었다.



대한통운의 근로환경은... 상당히 열악했던 것 같다. 근로기준법은 있으나마나한 시대였으니 초과근무는 당연한 것이었는데, 대한통운 운전기사들에게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트럭이 겁나 후졌다"라는 문제였다.


당시 대한통운이 어떤 경로로 트럭들을 확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리 좋은 성능은 아니었던 것 같다. 과적단속 같은 걸 안 하던 시대라서 만성적으로 짐을 많이 실었는데 트럭이 후졌으면 뭐... 언덕길 올라가려면 하세월 걸렸다고 한다.


도로도 좋지 않았다.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건 1970년인데 이거 하나 뚫렸다고 만사 오케이인 건 아니었다. 여기저기 언덕을 넘어야 했고 꼬불꼬불한 경사로를 달려야 했다.


거기에 안전의식도 무척 희박했다. 지금 들으면 기겁할 얘기지만 당시에는 음주운전 단속을 하지 않았었다. 8톤 이상 대형트럭을 모는 운전기사들이 술 한 잔 땡기고 운전할 수 있었다는 거다.


당연히 사고가 많이 났다. 특히 포항제철(現 포스코) 쪽 화물을 운반하다가 대형사고가 터지는 경우가 많았다.



포철의 화물은 '철덩어리'다. 1개에 5톤~10톤 나가는 코일, 크고 넓은 철판. 자체 무게가 상당히 무겁고 단단한 화물들이다.


이걸 부실한 화물차로 끌고 언덕길을 올라가면 엄청 빌빌거린다. 언덕 하나 넘는데 몇 시간 걸릴 때도 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내려올 때'다. 화물을 제대로 고정시키지 않았다면 정말로 큰 문제가 발생한다. 5톤짜리 철제 코일이 운전석 쪽으로 굴러버리거나 철판 한 장이 미끄러져 내려와 운전석을 베어버리는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C가 대한통운에 있을 때 이런 안전사고가 꽤 많이 났다고 한다. 철제 코일이 굴러간 운전석은 오징어처럼 납작하게 짓눌려져 있었고 철판에 베인 운전석은 안에 있던 사람을 포함하여 고스란히 썰려 나갔다고 한다.


열악하고 힘들고 위험한 일이었다. 모든 게 부족한 개발도상국에서 중화학공업을 일궈낸다는 것은 절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 좋은 점이 있었다. 돈은 많이 받는다는 점.


정확한 금액은 모르겠지만, C가 이전에 하던 병원장 개인기사 일보다는 훨씬 많은 돈을 받았던 것 같다. 살림살이 좀 나아지는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였다.



여담인데, C는 박정희를 꽤 좋게 보는 사람이었다. 박정희와 비슷하게 쿠데타로 정권 찬탈한 전두환에 대해서는 그리 좋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박정희만큼은 다르게 봤었던 것 같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어릴 때 보릿고개로 고생하고 청소년기에는 빈민층으로 고생했던 그 시절 사람들에게 있어 '박정희'라는 이름 세 글자가 갖는 무게감은 실로 대단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의 나는 아버지 C의 시각에 동의한다. 젊을 때는 좀 달랐지만 사회생활을 해 보고 중화학공업 기반의 국가경제 시스템을 살짝이나마 이해하게 되니 새삼 그 시절의 결단이라는 게 대단해 보이긴 한다.


물론 살아남은 사람 한정일 것이다. 산재사고로 희생된 사람들은 다른 얘길 하겠지. 그 또한 동의한다.



힘들었던 병원장 개인기사 시절을 끝내고 나름 번듯하게 돈 잘 버는 직장을 갖게 된 C. 그에게 다음 미션(Mission)이 주어졌다. 바로 '결혼'이었다.


21세기 헬조선은 완전히 다르지만, 20세기의 지옥불반도는 '결혼 안 하면 문제있는 사람'으로 취급하던 세상이었다. 드라마에 노총각 나오면 어디 문제 있냐고 물어보는 게 당연시되곤 했었다.


C는 어느덧 20대 후반이었고 이제 곧 한국나이 30살이었다. 그 시대 기준으로는 3년 이상 늦은 노총각. 사람 구실 하려면 서둘러 결혼해야 했다.


물론 서두른다고 해서 아무나 붙잡고 결혼한 건 아니다. 주위 평판 등을 잘 고려해 좋은 곳에 소개를 받았다. 안동에서 나름 중상층 급으로 살던 집에 중매를 넣은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그 중매는 성공했다. C는 한국 나이로 9살 어린 신부를 얻었다. 바로 내 어머니다.



두 분이 처음 만날 때 이야기를 얼핏 들었었는데, '과연 경상도'라는 말이 나올 만 했다.


C가 중매쟁이를 통해 소개받은 집에 처음 찾아가 미래의 장인어른을 만났을 때. C는 거짓말 전혀 보태지 않고 매우 담백하게 얘기했다고 한다.


"어르신 이미 얘기 들으셨겠지만 저는 가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다 새로 일궈야 합니다.

그래도 하나는 약속드리겠습니다. 딸 데려가면 평생 밥 굶는 일은 없게 하겠습니다. 숟가락이랑 젓가락만 갖고 오면 남은 한평생 먹여 살리겠습니다."


진짜 100% 경상도 남자 스타일이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먹여 살린다'는 약속 하나만 하는 것. 진솔하긴 하다.


그 말을 들은 미래 장인어른이 딸을 보고서 질문했다고 한다.


"니는 어떠노?"


C의 아내가 될 사람, 그러니까 내 어머니는 아무 말 안 했다고 한다. 침묵이 긍정으로 해석되는 시대에서 아무 말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의 친구분은 이 얘기를 듣고 '마음에 들었나 보네.'라고 했었다. 이후 50년 간 서로 죽이네 살리네 난리치고 주먹질하고 가끔 칼부림까지 났었는데 그래도 처음에는 서로 마음에 들었나 보다.


이 또한 여담인데, 50년 살아 보면 처음에 연애결혼이었냐 중매결혼이었냐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함께 온갖 평지풍파를 이겨내고 그저 살아왔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다른 모든 것들은 그 압도적인 세월 앞에서 다 묻혀 갈 뿐이다.


이혼하면 사회적으로 매장되던 시대에 중매로 만나 결혼한 두 사람. 한국 나이로 30살의 남자와 21살의 여자. 그들은 새롭게 발전하고 있는 공업도시에 작은 전셋방을 얻어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70년대 초반부터 대규모로 발전하던 공업도시. 80~90년대에는 공해가 너무 심해 강에서 등 굽은 물고기가 잡히고 여름에는 썩는 계란 냄새로 창문을 열기 어려웠던 공업도시. 그 와중에 돈 벌기에는 좋았던 공업도시.


'울산'이었다.



대부분의 울산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내 아버지 C와 어머니는 '타향사람'이었다. 영양군 홍거리와 안동을 떠나 남쪽 낯선 항구도시에 터 잡은 사람들이었다.


경상도 사람들은 경북 사투리와 경남 사투리를 구별한다. 주로 드라마에서 희화화되는 쌍시옷 발음 안 되는 사람들은 경남 쪽(특히 마산 쪽)이고 경북은 조금 덜한 편이다.


부모님의 사투리는 경북 쪽이었다. 항구도시 울산의 거칠고 억센 말투에 비해서는 그나마 조금 완화된 느낌이었다. 물론 다른 지역 사람들이 듣기에는 거기서 거기겠지만.


가진 거 하나 없이 밥그릇과 수저만 가지고 시작한 신혼생활. 낯설고 물설고 투박한 항구도시에서 부부 둘이서만 근근히 일궈 가는 신혼생활.


그리 낭만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 C는 한 번 출장 나가면 1주일에서 열흘 정도 연속으로 전국을 떠돌아야 했고, 어머니는 혼자 빈 집을 지키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그래도 첫째딸이 태어나고 둘째아들도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모셔 오게 되었다. 방 한 칸으로 시작했던 공간도 넓어졌다.



나 D가 둘째아들인데, 나는 대한통운 시절에 대해 잘 모른다. 아주 어릴 때에는 아버지가 대한통운 다녔었다고 하는데 내가 기억하는 건 그 이후 시절이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사촌형과 누나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이 시절의 C는 상당히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유교탈레반 효도르 이단옆차기 효도문화 따위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아이들과 스스럼 없이 웃고 떠들고 장난치는 아버지였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께 반말을 썼었다. 최근까지도 만나서 얘기하는 상황이면 자연스레 반말이 나왔다. 친척들과 얘기할 때에는 존댓말 썼지만 부모님께는 말 놨었다.


나중에 태어난 막내동생은 왼손잡이였는데, 그것도 특별히 고치지 않고 내버려 뒀다. 유교탈레반들이 왼손잡이 고친답시고 난리칠 때 C는 그런 거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냥 편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했었다.


물론 C가 모든 영역에서 다 깨어 있었던 건 아니다. 유교탈레반의 고질적인 문제였던 남녀차별 영역에서는 여전히 남아선호사상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특별히 마누라를 더 많이 때리거나 하진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험난한 청소년기를 거쳐 오다 보니 폭력 성향도 상당히 강했다. 술도 많이 마셨고 심하게 술주정하기도 했었다.


단점이 없지는 않았지만, C는 좋은 아버지였다. 교육수준과 무관하게 상식과 합리성을 갖춘 사람이었고 `70년대의 시대상황에서는 상당히 깨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좋은 남편은 아니었던 것 같지만 최소한 좋은 아버지였던 것은 확실했다. 특히 아들 입장에서는 더더욱 좋은 아버지였다.


그 때는 그랬었다. 그 때는.



10대 20대 시절을 모두 힘들게 살았던 C. 그의 삶은 30대로 접어들면서 조금 나아졌다. 빈민층에서 벗어나 나름 서민층으로 올라서긴 했다. 더 이상 밥 굶는 일은 없었고 고급 음식은 못 먹어도 끼니 걱정은 안 하게 되었다.


그리고, C에게 또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국가주도적으로 중화학 공업을 육성하고 있던 대한민국이 전략적으로 키워 주고 있는 도시 울산은 대형트럭 전문 운전수 C에게 꽤 좋은 기회를 주었다.


서민층이 된 C가 새로 잡은 기회. 서민층을 넘어 중산층에 입성하고 한동안 꽤 좋은 인생을 살게 해 줬던 기회. 나름 C의 인생에서 '황금시대'라 부를 만 한 시절을 누리게 해 줬던 기회.


그건 울산의 화학공업단지에서 찾아왔다. 나일론의 원재료를 공급하기 위해 동양나일론 + 코오롱 등 화학회사가 공동출자하여 설립한 회사에서 대형트럭 운전수를 모집한 것이다.


그 회사의 이름은 [카프로락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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