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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서스 Jan 20. 2024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운전병

월남. 베트남. 비엔남.


영어로는 Vietnam이라고 쓰는데, 실제 현지 발음을 들어 보면 t가 사실상 묵음이라서 '비엔남'으로 들린다고 한다.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렇다 카더라.


내 아버지 C는 베트남 파병용사다. '침략전쟁에 가담한 미제의 앞잡이'라고 해도 할 말 없지만 반대로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했던 나라에 외화를 벌어 오고 자유민주주의 진영 전체를 수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참전용사'로 우대해 줘도 된다. 양 쪽 말이 다 맞으니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이견은 없다.


뭐, C가 무슨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기꺼이 한 목숨 바치겠다는 각오로 베트남 간 건 아니다. 보릿고개에 굶주리면서 소나무 속껍질 먹다가 심각한 변비에 시달렸었고 청소년기에 안동 뒷골목에서 처맞고 다니던 사람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투철한 신념을 가지는 것도 이상하잖아.


C가 베트남 파병에 지원한 가장 큰 이유는 아주 단순했다. '돈' 때문이었다.


(돈 때문이~야 돈 때문이~야 지독한 돈때문이야~ 문제는 돈때문이야~)



모든 개발도상국이 그러하듯이 `60년대의 대한민국은 가난했다. 미국 군인이 받는 월급의 절반만 받아도 나름 큰 돈이 되었었던 것 같다. 1년 동안 베트남에서 복무하다 돌아오면 방 두 칸 전셋집 마련할 정도는 모았던 것 같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 함정이 있다. '미국 군인이 받는 월급의 절반'이라는 함정.


당시 미군은 베트남에 오는 동맹국 병사들에게 미군과 동일한 월급을 지불했다고 한다. 세계최강 천조국인 데다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답게 '목숨을 거는 용사들에 대한 예우'만큼은 확실했던 것 같다.


그러나... 베트남에 간 한국 군인들은 미군의 절반 이하를 받았다. 그래도 한국에서 받던 쥐꼬리 월급보다는 몇 배 많았지만 아무튼 절반 이상을 삥뜯겼다.


파병된 한국군 월급을 삥뜯은 건... 어이없게도 자유민주주의를 숭상하는 대한민국 정부였다.



이 미지급 급여를 반환하라는 소송이 2000년대 초반에 진행되었었다. 당시 미지급 급여에 물가인상분을 고려하여 재산정된 금액은 1인당 약 1억원~4억원. 2000년대 초반 기준으로 아파트 한 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결과는 원고 측 패소. 병사들 월급 삥뜯어서 마음대로 사용했던 대한민국 정부는 후속조치도 하지 않았다. 대충 소멸시효 완성 기타등등 법리를 내세워서 뭉개 버렸다. 머나먼 이국에서 국가의 이름으로 전쟁을 치렀던 군인들에게 '쌩까기'를 시전했고 그게 대법원에서 확정되었었다.


잠시 이야기가 옆길로 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C가 군대에서 일병 갓 될까말까 하던 때. 대한민국 국방부는 현역군인들을 대상으로 하여 베트남 파병 지원자를 모집했었다. 군인 월급보다 몇 배 더 많고 사회인들 버는 것보다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C의 집안은 계속 빚에 시달리고 있었다. 내 기억에 당시 방 2칸 전세를 9만원에 구할 수 있었는데 C의 집안 전체 빚이 15만원이었다고 한다.


이 빚 문제 말고 한국군 내부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당시의 한국군은 심각한 부정부패 상태여서 군 식량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빼돌리는 간부들이 매우 많았다고 한다. 병사들은 배가 고파서 훈련을 못 할 지경이었다 카더라.


그리고 '해외여행'. 21세기 한국인들은 해외여행 잘 가지만 `60년대에는 진짜 갑부들이나 가는 게 해외여행이었다. 그런데 베트남 파병에 지원하면 해외여행을 할 수 있다. 그것도 공짜로.


이러한 이유로 C는 베트남 파병에 지원했다고 한다. 같은 부대의 선임상병과 함께.



C와 함께 지원했다는 선임상병의 이름은 모른다. 그는 맹호부대로 배치되었다.


C는 내심 선임상병을 따라가고 싶어했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목숨 걸고 싸우는데 그나마 아는 사람 한 명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선임상병과 같은 부대에 배치되길 바랬다.


드디어 C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배치부대는... 십자성!


십자성 부대. 베트남전 파병용사들 중에서도 아는 사람만 아는 부대다. 실전은 거의 한 적이 없고 주구장창 물자수송만 한 수송부대다.


당시의 C는 꽤 실망했었다고 한다. 유일하게 아는 사람 한 명 있는데 그는 맹호부대로 배치되고 본인은 어디 듣보르자브 이상한 부대에 배치되었으니 실망할 수 밖에.


다만 결과는...


맹호부대에 배치되었다던 선임상병은 적과 교전하던 중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십자성 부대로 배치된 C는 단 한 번도 실전을 치르지 않고 무사히 1년 간의 복무를 마쳤다.



여담인데, C는 젊었을 때 맹장수술을 받았었다. 아들인 나 D 또한 맹장수술 자국이 있다. 맹장의 형태가 유전되기 때문에 맹장염 잘 걸리는 집안은 대대손손 맹장염 걸린다 카더라.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 C는 '이거 총알 맞은 자국이다'라고 뻥 쳤었다. 총알 맞은 자국이 배에만 있고 등 쪽으로 뚫고 나간 흔적이 없는 이유에 대해서는... 어릴 때 그것까지 따질 만큼 논리적이진 않았나 보다. 대충 그렇게 믿었었다.


C는 실전을 치러 본 경험이 없었다고 했다. 나이들어서 정신 오락가락할 때에는 '내가 베트남에서 사람 죽이는 기술 배운 사람이다!'라고 기염을 토하며 마누라 구타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베트남에서는 전투를 치러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용산 전쟁기념관에 가서 십자성부대 관련 설명을 읽어보면 C는 실전경험 없었을 것 같다. 베트남전 참전 부대 중 맹호, 청룡, 백마부대는 상당히 유명하고 진열된 물품도 많은 반면, 십자성부대는 아주 단촐하다. 기념할 만한 전투가 전혀 없긴 했을 것이다.


C는 전반적으로 편하게 파병군인 생활을 마쳤다. 단 하룻밤을 제외하고는.



C를 비롯한 10명 가량의 병사들이 매우 긴장하고 두려워했던 날이 있었다. 대민지원을 나가 베트남 농부들과 함께 농사짓고 얼근하게 술 마신 날이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병사 하나가 총을 놔두고 왔다'는 사실을.


낮에는 남베트남 농부, 밤에는 북베트남 베트콩. 세계최강 미군과 그 동맹국 군대들을 끝없이 괴롭혔던 게릴라 변신 작전. 그 공포가 십자성부대 병사들을 쥐어짰다. 단 한 번도 실전을 치러 본 적 없는 병사들이었지만 바짝 긴장했다.


그렇다고 그냥 귀환할 수는 없었다. 총 놔두고 온 당사자는 당연히 영창이고 다른 병사들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 어떻게든 총을 찾긴 해야 했다.


C를 비롯한 전원이 실탄을 장전하고 언제든 사격할 수 있도록 준비한 채 마을로 돌아갔다. 마을 사람들이 베트콩으로 변신해 AK 카라시니코프 소총을 연발로 갈겨댈까봐 두려움에 떨면서 천천히 마을에 접근했다.


천만다행으로 이 마을에는 베트콩이 없었나 보다. 십자성부대 병사의 소총은 마을 입구에 놓여져 있었다. 어서 빨리 가져가라는 듯 평온하게 놓여져 있었다.


어쩌면 십자성부대의 유일한 교전 기록으로 남았을지도 모르는 공포의 밤. 그 밤은 무사히 끝났다. 나트랑 시 근처 시골마을의 밤은 평온하고 조용했었다.



C는 베트남에서 운전병으로 복무했었고 군용 트럭을 몰았다. 60~70년대에는 운전수가 희귀했던 시절이라 군대에서 운전병으로 복무한 사람들은 취직하기 좋았다고 한다. 물론 제대로 된 월급을 받으며 중산층의 꿈을 꾸려면 70년대로 넘어가야겠지만, 일단 C는 평생직업으로 할 만한 기술을 익혔다.


베트남에서 월급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정부가 절반 삥뜯어 가긴 했지만 나머지 절반으로도 집안의 빚을 거의 다 갚을 정도였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사실확인은 안 되지만 그랬다고 들었다.


그리고... 아들 입장에서는 말하기 좀 껄끄러운 얘기도 있다. 아마 농담인 것 같지만 C가 술 먹으면 가끔 하던 얘기.


'베트남 큰형' 얘기다.



라이따이한. 한국인과 베트남인 혼혈. 현대사가 묻어 버린 또 하나의 비극.


C는 농담삼아 '베트남 가서 니 형 찾아와라.'고 얘기하곤 했다. 당연히 어머니(C의 아내)는 그 얘기를 엄청 싫어했다. 솔직히 세상 어느 아내가 그 얘길 좋아하겠나.


내 생각에도 그냥 농담인 것 같다. 베트남에 큰형이 있을 정도면 현지에서 돈을 꽤 썼다는 얘긴데 그랬으면 집안의 빚을 갚을 수 없었을 테니까.


99% 확률로 농담일 거라 생각한다. 99% 확률로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런데 만약 1% 확률이 발동한다면... 내 큰형은 나보다 12살 많을 것이다. 지금쯤 환갑 됐겠네.


없을 거다. 없을 거라 생각한다.



라이따이한 베트남 큰형 얘기는 농담이었지만, 다른 얘기는 좀 진지했다. 어릴 때에는 그러려니 했는데 나이들어 다시 생각해 보니 꽤 심각한 얘기이기도 했다.


꽤 심각한 얘기는... '고엽제'다.


미군은 베트남의 정글(Jungle)에 아주 그냥 학을 뗐다. 낮에는 농부였다가 밤에는 무장게릴라로 변신하는 베트콩 문제에 정글까지 겹치자 헬오브지옥이 따로 없었다.


초기에 미군은 이 정글 문제를 쉽게 생각했다. '나무가 많으면 그냥 나무 없애버리면 되는 거 아니야?'라는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래서 미군은 약 440만 리터의 제초제를 베트남 곳곳에 뿌렸다. 아주 그냥 넓고 광범위하게 흩뿌려서 대규모 정글을 지워 없애려 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도 피해를 입는다는 걸 알지 못한 채.


내 아버지 C는 군대 가기 직전에 키 164cm에 몸무게 60kg이었다고 했다. 어릴 때 제대로 못 먹어서 키는 덜 자랐지만 청소년기 이후 청과물 상점에 일하던 시절에는 어깨와 등 근육이 짱짱했었다고 한다. 하체도 매우 탄탄했고.


그런데, 베트남에 있으면서 C의 몸무게가 47kg으로 줄어들었다. 몸무게가 20% 이상 빠진 것이다.


내가 어릴 때 C는 '베트남에서 계속 통조림 과일만 먹어서 살 빠졌다'고 했었다. 본인도 그렇게만 생각했고 나도 그냥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때 이미 고엽제 영향이 있었을 것 같다. 피끓는 20대 초반 청춘이 -20% 이상 몸무게가 줄어들 정도면 뭔가 이상이 있긴 있었을 것이다.


고엽제 문제는 C의 말년에 영향을 미친다. 당연히 나쁜 영향이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C의 월남 시절 얘기는 이 정도로 마친다. 중간에 나온 베트남 큰형 이야기나 베트콩 없었던 마을 이야기는 소설적으로 각색하기 좋은 테마이긴 하지만, 이 글의 취지는 최대한 사실 중심으로 사건들을 나열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설적 변용은 미뤄 놓기로 한다.


다음 이야기는 조금 암울할 것 같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운전병 C가 `60년대 헬조선 군대에서 생활했던 이야기, 그 군대 복무를 마치고 세상에 떠밀려 나와 고생하던 이야기다.


그래도 그 암울한 이야기가 지나가면 조금 행복한 이야기가 나오긴 한다. 그것도 더 먼 미래에는 불행으로 바뀌긴 하지만... 인생사 그런 것 아니겠나. 새옹지마, 흥진비래, 고진감래.


모든 일은 지나간다. Et hoc transibit(에트 혹 트란시비트. 이 또한 지나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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