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다른 얘기부터 해 보자.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펄 벅(Pearl Buck)'의 작품 대지(大地)에서, 주인공 왕룽과 그 가족들은 흉년을 견디다 못해 땅을 헐값에 팔아넘기고 도시로 나오게 된다. 왕룽은 인력거꾼으로 하루종일 도시의 벽돌길을 뛰어다니지만 일가족 전체가 죽 끓여먹고 살기에도 부족한 수준이었다. 왕룽의 막내딸은 흉년 때에 너무 굶었던 데다 도시에서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탓에 결국 한평생 백치로 살게 된다.
다만, 이건 소설이다. 대지의 주인공 왕룽에게는 큰 반전(反轉)의 기회가 찾아온다. 중국 전체가 혁명에 휘말리면서 대혼란이 일어났고 결국 부잣집을 약탈할 기회가 온 것이다.
왕룽의 아내는 원래 부잣집 하녀 출신으로 도시로 나온 후에도 부잣집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부자들이 진짜배기 보물을 어디에 숨기는지 대략 짐작하고 있었다. 왕룽이 부잣집 주인을 상대로 협박(!)을 시전하여 돈 몇 푼 뜯어내는 동안 그의 아내는 보석 숨겨 둔 곳을 찾아낸다. 이 보석을 밑천삼아 왕룽은 예전 팔아치운 땅보다 몇 배 넓은 땅을 사들일 수 있었고 지역 최고 부자로 성장하게 된다.
(그 보석을 다 판 게 아니고 아내를 위해 진주귀걸이 한 쌍을 남겨 두었으나, 이후 왕룽이 첩을 들이면서 진주귀걸이를 다시 빼앗아 가기도 한다.)
소설은 이렇게 극적으로 반전하지만 현실은...
영양군 홍거리 마을을 떠나 대도시 안동으로 흘러들어온 C의 일가족. 그들은 잘 살았을까? 소설 속 왕룽 일가처럼 한 방에 큰 돈 모아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었을까?
그럴 리 없다. 소설은 소설일 뿐. 현실은 몇 배 더 가혹했다.
또 잠시 다른 얘기를 해 보자. 이번에는 C의 아버지, 즉 이 글을 쓰는 나 D의 할아버지 얘기다.
할아버지(C의 아버지)는 당시 기준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70대 나이에도 키가 170cm 정도 되었으니 젊었을 때에는 거의 180cm 가까이 되었을 것이고, 20~30년대 평균 키를 고려하면 상당히 큰 덩치였다.
할아버지는 손재주도 좋았다. 목수 일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목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도면을 보고 그대로 깎아내야 하는 일이 절대 쉬울 리 없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담력도 좋았다. 젊었던 시절에는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광산에 화약 불 붙이는 일을 했었다고 한다. 다이너마이트로 바위 폭파시킬 때에 마지막으로 심지에 불 당기고 도망나오는 일이었는데 잘못되면 당연히(!) 죽는다. 위험수당이 꽤 됐었나 보다.
그렇게 힘 좋고 덩치 좋고 손재주 좋고 담력까지 갖춘 사람이었지만... 625 전쟁으로 망가진 세계 최빈국에서 일자리 구하는 건 쉽지 않았었나 보다. 안동 같은 대도시에서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을 수는 없었나 보다.
당장 굶어 죽느니 도시로 나가자고 하여 안동으로 이사 나오긴 했지만, C의 일가족은 계속 가난했다. 늘 돈이 없었고 늘 배고팠다.
이때쯤 C가 국민학교를 졸업했던 것 같다. 주민등록 상으로는 만12세, 실제 나이로는 14세. 중학교는 언감생심 꿈도 못 꿨고, C본인이 먹고 살려면 바로 일을 해야 했다.
현재 근로기준법 상으로는 만15세 미만인 사람을 근로자로 채용할 수 없다. 만15세 넘은 사람을 채용하더라도 하루 7시간 이상 근로시킬 수 없고, 국제기준을 적용받으며 ESG경영을 표방하는 대기업(삼성, 현대, SK등)에서는 취업규칙 자체에 '미성년자 채용 금지'를 명문화하여 근로기준법보다 더 강한 보호를 하고 있다.
그런데 1950년대 대한민국에서라면...
근로기준법이 있긴 있었을 것이다. 60년대에 (군사독재로 장기집권한 남로당 빨갱이 출신 군인이 충격받았다는)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 때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쳤었다. 즉, 뭔가 준수할 만한 법이 있긴 했다는 거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뭔가 법대로 해야 한다는 인식은 최소한 1990년대 넘어가야 정착되는 것이었다. 80년대까지의 대한민국은 말 그대로 법보다 주먹이 앞섰다. 그나마 서울 같은 곳이면 몰라도 지방도시 뒷골목은 무법천지나 다름없었다.
그런 무법천지에서 14살 된 C는 뭔가 돈을 벌어 보려고 했었다. 노점상 비슷하게 장사를 해 보려고 했었다.
잘 됐을 리... 없겠지.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C는 안동 뒷골목 깡패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고 한다. 어른과 청소년의 압도적인 격차를 절실하게 느끼면서 꽤 많이 맞았다고 한다.
준법의식? 험한 말 좀 쓰겠다. 조까.
윤리규범? 이 또한 마찬가지다. 저기 가서 같이 까세요.
양반의 도시 안동? 양반다리 뽀개 버리는 수가 있다.
문명국가? 인간의 천부적인 권리? 그게뭐임? 먹는거임?
세계 최빈국의 도시 뒷골목. 노점상과 깡패들이 뒤엉키는 곳. 법 따위는 아득하게 멀고 주먹과 발길질 실력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곳.
판사의 법봉보다 깡패의 주먹이 훨씬 더 앞서서 판결을 내리는 곳.
그 곳에서 C는 14살 나이로 돈을 벌려고 버둥거렸다. 타고난 악바리 근성이 더 강해지면서 하루하루 버텨냈다.
(* 만약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상상력을 동원하여 C의 청소년 시절을 좀 더 풍부하게 서술할 수 있을 것 같다. C의 가치관이 형성되던 시절에 각종 에피소드를 추가하여 이후 C의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복선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본 편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일단 이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소시오패스 아들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함'이므로, 아들인 나 입장에서 듣지 않았던 이야기까지 상상해서 추가할 필요는 없다.
내가 들은 사실만 정리하겠다. 추후 이걸 소재로 별도의 소설을 쓰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 때 상상력을 추가하기로 하고, 일단은 사실만 정리하겠다.)
사람의 가치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청소년기 시절, C는 깡패들의 눈길을 피해 뒷골목 노점상을 했다. 맞기도 많이 맞았겠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때리기도 했을 것이다. 경찰의 보호 따위는 기대할 수 없는 곳에서 자기 자신을 지켜내려고 무단히 노력했을 것이다.
나 D가 얼추 이 시절의 C와 비슷한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동네 불량학생 중딩들에게 처맞고 삥 뜯긴 적이 있었다. 태권도 7년 배웠지만 아무 소용 없었다. 상대가 칼 들고 있을 거라는 게 무섭기도 했고, 예나 지금이나 겁대가리 상실한 중딩들은 무슨 짓을 할 지 모른다. 그냥 돈 주고 오는 게 제일 낫긴 하다.
그렇게 맞고 왔는데... 아버지 C가 권유한 건 '자전거 체인'이었다. 페달 돌리는 동력을 뒷바퀴로 전달하기 위해 쇳조각을 잘 연결해 놓은 체인(Chain). 아버지는 중학생 아들에게 그거 하나 갖고 다니라고 조언(?)을 했었다.
"체인으로 손목 훑어뿌면 칼이고 뭐고 없다. 칼도 여기 걸리면 뿌러진다. 이걸로 얼굴 훑으면 천하에 버티는 놈 없다."
태권도장 오래 다니긴 했지만 대회 나가면 무조건 1라운드 광탈하는 아들. 몸으로 하는 일은 거의 밑바닥에서 빌빌거렸던 아들. 그 아들에게 '자전거 체인 휘두르기'를 가르치겠다는 아버지.
실제로 아버지 C가 자전거 체인으로 사람 훑고 다녔는지는 모른다. 저 손목훑기+얼굴훑기 콤보(!)가 실전 경험에서 우러나온 얘기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거기까지는 얘기 들은 적이 없다.
그런 얘길 들었었다. 그러했었다.
처음에는 작고 왜소하고 무기력했겠지만 C는 계속 자라났다. 못 먹고 살았으니 키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지만 워낙 깡다구가 좋고 몸이 날렵했던 터라, 어느 정도 자라고 난 후에는 안동 뒷골목에서도 그렇게 맞고 다니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조폭이나 깡패가 되진 않았었다. 당시 안동 뒷골목에서 가장 유명했다는 깡패가 '오쟁이'였는데 그 무리에 소속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신 C는 권투를 배우고 싶어했었다. 요즘은 권투(拳鬪)라는 한자어보다 복싱(Boxing)이라는 영어단어를 더 많이 쓰는데, 아무튼 C는 복싱 체육관 창문에 서서 복싱기술을 지켜보고 혼자 연습하곤 했다고 한다.
C가 복싱 제대로 배웠으면 동양챔피언 정도까지는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0대 중후반까지 몸이 무척 가벼워서 따로 관리 안 해도 플라이급이었고, 정식 복서가 되어 제대로 살 빼면 미니멈급까지 내려갈 수도 있었다. 그 정도로 저체급이 되면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해서 순위권에 들 가능성이 있긴 했다.
다만, 복싱 체육관도 공짜로 복싱 배울 수는 없었다. 타이슨 수준으로 어마무시한 재능을 선보였다면 누군가 밀어 줄 사람이 나타났을지도 모르지만 C에게는 그만큼의 재능은 없었던 것 같다. 결국 돈이 없어서 복싱을 배우지 못했다.
C는 계속 일을 했다. 그러면서 조금씩 성장했고, 어느새 청년이 되었다.
18~19세가 된 C는 어느 대형 청과물점에서 일했었던 것 같다. 5kg들이 사과박스를 사람 키보다 더 높이 쌓아올리는데 그걸 머리 위로 집어던져서 정확하게 정위치에 놓는 재주를 선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이 시절의 C를 영화 인물에 비유한다면... 영화 타짜에 나오는 '고니'와 비슷했을 것 같다. 물론 고니처럼 재야의 도박고수를 만나 도박의 길로 접어든 건 아니고 성격이나 행동이 비슷했다는 얘기다.
타짜의 고니는 공고 나와서 공장에서 일하던 일반인이었는데, 어느 날 사기도박에 휘말려 모은 돈을 모두 날려버린 후 제대로 빡친다. 칼 하나 들고 조폭들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와서 자기 돈 내놓으라고 난리치는 깡다구를 갖췄고, 그것과 별도로 머리도 상당히 좋다.
C는 50년대에 국민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안동 뒷골목에서 장사를 시작했던 청소년이었다. 그 험악한 곳에서 자기 한 몸 지킬 정도의 싸움실력과 깡다구를 갖췄고, 최종 학력과 무관하게 머리도 상당히 좋았다.
다만... 여기서도 특별한 반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니는 평경장을 만나 뒷세계의 최고가 되었지만 C는 그런 재야고수를 만나지 못했다.
그저 빚에 시달릴 뿐.
굶어죽지 않으려고 영양군 홍거리 마을을 떠나 안동으로 이사온 C의 일가족. 그들은 빚을 많이 졌다. 50년대 말 ~ 60년대 초 시절의 대한민국 물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기준으로 전셋방 구하는 돈보다 더 많은 빚을 졌다고 들었다.
대지의 왕룽이나 타짜의 고니처럼 이 빚을 한 방에 털어버리고 벼락부자가 되는 길은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살아가며 계속 빚이 늘어날 뿐이었다.
이걸 만회하려면 뭔가가 필요하긴 했다. 늘어나는 빚을 정리하려면 뭔가 하긴 해야 했다.
그러던 와중에 C는 국가의 부름을 받게 된다.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니고 '군대 영장'이 나온 것이다.
요즘은 국졸~중졸이면 군대 면제 받지만 60년대에는 그런 거 없었나 보다. C는 군대로 끌려가야 했다.
그리고, C는 군대에서 두 가지 중대한 일을 겪게 된다. 하나는 운전병 보직. 다른 하나는 월남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