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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서스 Jan 15. 2024

[프롤로그] 아버지 장례식에서 눈물 흘린 소시오패스

소시오패스(Sociopath).


공감능력, 양심, 윤리의식, 동정심 등이 매우 떨어져 타인의 감정을 무시하고 자기 이익에 맞게 타인을 이용하는 성향.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을 소시오패스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알고 있다.


소시오패스들이 모두 범죄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싸이코패스 수준으로 감정 자체가 결여된 게 아니라 둔감한 정도인 게 소시오패스들이므로, 교육을 통해 윤리의식이나 준법의식이나 사회적 상식 등등을 '학습'하면 얼추 일반인 흉내를 내면서 잘 살 수 있다고 한다. 나 또한 그러하다.


대다수 소시오패스들은 후천적인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유전적으로 타고나는 요소들이 후천적인 환경으로 발현되면서 소시오패스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어느 정도 사회적 학습이 된 후에 소시오패스 성향이 드러난 타입인 것 같다.



나는 나 자신을 소시오패스라고 생각한다. 약 4% 확률, 그러니까 25명 중에 1명이 소시오패스인데 나 또한 그 중에 포함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공감능력이 떨어졌다. 다른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힘들어하고 눈물 흘릴 때 '왜 저러지?'라는 반응을 보일 때가 많았다. 상당히 이기적이기도 했고.


다만, 1980년대 유교탈레반 시절에 효도르 이단옆차기 수준의 효도 사상을 주입받으면서 '가족이 사망했을 때에는 슬퍼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던 것 같다. 


내가 그 사고방식에 따라 '슬퍼하는 연기'를 시작했던 건 대략 국민학교(초등학교 아니고 국민학교) 4학년 때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던 날. 나는 슬퍼하는 연기를 했었다. 솔직히 말해서 전혀 슬프지 않았는데 우는 척 했었고 감정을 못 이겨 휘청거리는 척 했었다. 그러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행동했었다.


당시에 헬조선이라는 말은 없었고 유교탈레반이라는 말도 없었지만, `80년대의 지옥불반도는 오랜 내부갑질을 거치며 자체적으로 확립한 윤리기준에 지배당하고 있었다. 부모가 죽도록 하는 게 인생 최대의 불효이므로 장례 치르는 동안 계속 곡소리 내야 하는 게 예의(?)였다. 옆집에 대한 배려 따윈 없었다.


3일 동안 곡소리가 이어졌었다. 남자 상주들과 그 아내들의 '아이고 아이고' 소리가 온 사방을 뒤흔들었다. 찾아온 손님들도 '어이 어이' 소리로 화답(和答)했다. 탈진하기 직전까지 울어야만 효도하는 자식들인 것 같았다.


나도 우는 척 했다. 할아버지가 귀여워했다던 손자 중 1인으로서 남들 슬퍼하는 만큼 슬퍼하는 척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대충 어설프게 연기를 했었다.



몇 년 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는 딱히 연기를 안 해도 됐었던 것 같다. 유교탈레반의 나라는 빠르게 바뀌는 중이었고, (당시 나는 몰랐지만) 상속에 있어서의 남녀불평등을 갈아엎는 민법개정안이 준비 중이었다. 곡소리 가득한 장례문화도 조금씩 바뀌어 가고 있었다.


"부모가 죽도록 하는 게 인생 최대의 불효다!" 라는 희대의 헛소리도 사라져 가는 분위기였다. '세상의 모든 생물들이 다 죽을 운명인데 그 죽을 운명대로 죽는 게 왜 불효인가? 세상 모든 필멸자의 자손들이 필연적으로 불효의 원죄를 짊어져야 하는 뻘짓거리를 왜 해야 하는가?' 라는 합리적인 의문이 헬조선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바꾸었다.


어릴 때부터 소시오패스의 씨앗을 품고 있었던 나로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안 슬픈데 억지로 슬픈 척 해야 하는 감정소모를 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장례식이라는 게 유쾌할 수는 없으니 굳은 표정 짓는 건 어렵지 않았고, 그냥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자리만 지키면 되었으니까.



그러고 나서 대략 30년 넘는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나는 한국나이 오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헬조선 방식으로 변형된 유교탈레반의 원흉(!)이 된 공자는 나이 오십을 지천명(知天命)이라고 불렀었다. 하늘이 내려 준 운명을 깨달았다는 나이 오십. 반백살이 가까워진 시점에서 나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받게 되었다.


아버지와 나는 그리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냥 데면데면한 수준을 넘어 약 7년 가량 서로 연락을 끊고 지냈었다. 내가 소시오패스인 것 못지않게 아버지 또한 편집광 증상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이미 망가져 버린 자식의 인생을 놓고 미신으로 정신승리하고 있었으니까.


장례식장으로 내려가 맏상주 역할을 수행하면서, 나는 나 자신이 눈물 흘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소시오패스로 굳어져 버린 반백살 가까운 인생에서 아버지를 지워 버렸다고 생각했었다. 대한민국 남자 평균수명을 넘어섰고 언제 떠나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에 큰 고통 없이 돌아가셨으니 더더욱 슬퍼할 일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랬는데...


나도 울었다. 울겠다고 연기를 한 건 아니었는데 눈물이 나왔다. 괜히 눈물 참으려다가 역류해서 콧물 흘리긴 했지만 눈물이 나긴 났다.


나는 소시오패스였는데. 다른 사람들의 감정과 슬픔 따윈 다 짓밟아 버리고 오로지 나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왔는데.

그 이익이라는 게 "회사가 잘 되면 내가 조금 빨리 진급하고 연봉을 더 받는다"는 정도로 1년에 몇백만원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걸 위해 다른 사람의 남은 재산 전부에 압류딱지 붙이는 일을 맡아 왔는데.



장례식장에서 준비한 입관식이라는 게 살짝 무서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아무리 소시오패스라고 해도 내면 어딘가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으니, 그 공포가 투영되어 눈물 흘린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나 또한 아이를 키우고 그 아이들을 아끼다 보니 울컥했던 것일 수도 있다. 비록 사회생활에서는 소시오패스라고 해도 모든 인간들을 발톱의 때처럼 여기며 살아가진 않았고, 내 아버지가 그 자식들에게 그러했듯이 나 또한 내 자식들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으로 자상한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했었으니까.



그렇게 눈물을 흘리고 난 뒤. 갑자기 생각났다. 30년 가까이 잊고 있었던 옛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편집증적 집착과 치매 직전 섬망증상을 보이던 말년의 아버지가 아닌 '젊은 날의 아버지'. 키 작고 왜소하지만 어린 자식들에게는 늘 거인이었던 아버지.'아빠'라고 부르며 반말 쓰면 더 좋아하던 아버지.


그 젊은 날의 기억이 불현듯 내게 다가왔다. 영정사진 너머로 그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중학생 아니면 고등학생이었던 시절. 아버지는 말했었다.


[나중에 내 살아온 인생 쭉 써서 책으로 낼 거다.] 라고.


물론 아버지는 본인 말을 지키지 못했다. 아마 본인 스스로도 기억을 못했을 거다. 쌍팔년도 유교탈레반의 나라에서 사회생활 해 온 남자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술에 쩌들어 살았었고 1년에 책 1권도 못 읽었으니 '책을 쓴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의 아들이 갖고 있던 작은 소원도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헬조선의 모든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유명대학 유명학과 다니던 아들이 생뚱맞게 중얼거렸던 소원도 아득히 기억 너머로 묻어버렸을 것이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내 소원은... [글을 쓰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장례식 날 입관을 마치고서 기억해 냈다.


30년 전 아버지는 본인 인생을 책으로 쓰고 싶어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설프게나마 웹소설을 쓰며 제2의 인생을 기획하고 있는 늦깍이 작가 지망생이라는 것을.


아버지가 꿈꿨던 권력형 공무원의 삶 따위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렸지만 나 자신의 꿈을 위해 뒤늦게나마 한 걸음씩 내딛고 있다는 것을.


30년 전의 아버지가 갖고 있었던 소원. 그 몇 년 후 아들이 꿈꿨던 작은 소원이었지만 아버지는 듣자마자 대충 얼버무렸던 소원.


결국 그 두 가지 소원은 같은 것이었다. "본인의 삶을 조금이나마 덜어내어 글자로 바꾸고 그 글자가 본인의 죽음 이후에도 누군가에게 읽히길 바란다"는 소원만큼은 동일했다.



글쓰기란 불멸(不滅)을 향한 인간의 열망이 투영된 작업이다. (유교탈레반 효도르 이단옆차기 신봉자들의 불효 개드립 빼고 객관적인 사실만 보면) 필연적으로 멸(滅)하는 게 우리 인간들이지만, 우리 인간들이 글로 남긴 생각과 상상력과 행적은 몇백년의 시간을 넘어 계속 남는다.


게다가, 지금 우리 시대에는 '인터넷'이라는 좋은 매체가 있다. 100년 200년이 지난 후에도 누군가는 글을 읽어 줄 수 있도록 가상의 공간에 글을 남겨 둘 수 있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꿈. 그 꿈을 내가 대신 써 줄 수 있다. 팔순을 채우지 못하고 떠나간 인생의 흔적을 100년 후에도 남도록 해 줄 수 있다.



뭐, 사부곡(思父曲) 같은 건 아니다. 앞에서 꽤 길게 강조했듯이 나는 기본적으로 소시오패스 성향이 강한 인간이고 말년의 아버지와 연락 끊고 살았었다. 효도르 이단옆차기 유교탈레반 지옥불반도의 효도사상 따위에 심취해 아버지를 그리워할 일은 없다. 단언컨대 내 인생에서 그런 일은 없다.


또한, 내가 정리한다고 해서 아버지의 모든 행적을 다 반영할 수도 없다.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세히 듣지 못했으니 공백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자서전 수준으로 상세하게 인생역정을 정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저 내가 알고 있던 것들을 정리해 두고 싶을 뿐이다.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뼈가 시리도록 고생하다가 어느날 로또맞은 듯 머리좋은 자식을 얻어 잠시 꿈을 꾸었던 한 남자의 인생, 그 역정을 정리해 두고 싶을 뿐이다.


언젠가는 소설 테마로 변형될 수도 있는 이야기. 그 이야기를 요약해 두고 싶을 뿐이다.


어쩌면 가장 헬조선스러운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내가 비판적인 입장에서 서술하는 쌍팔년도 대한민국에 딱 맞는 컨셉일 수도 있겠다.



언젠가 소설적 기법을 추가하여 전개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냥 담담하게 연대기 형식으로 서술하려 한다. 공개할지 말지는 다 쓴 후에 생각해 보기로 하고.


생각보다 서설이 길어졌다. 내가 아는 아버지의 인생을 써 보겠다. 그의 편집광적 증상이 시작된 원인이자 부모자식 간 불화의 시작이기도 했던 내 인생 얘기도 살짝 추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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