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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테서스 Jan 17. 2024

X구멍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우선 내 아버지의 가명(假名)을 정하자. 실명 공개할 이유는 없으니까.


대략 이름의 이니셜을 따서 C로 하겠다. 이후에 등장할 나 자신은 D로 부를 예정이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그냥 보통명사 내지 익명으로 표시하겠다.


내 아버지 C. 내 기억에 그는 1943년생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 주민등록상 나이는 그것보다 몇 살 어리지만 출생년도는 1943년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일제가 패망했을 당시에는 만 3세 정도였으니 별 기억이 없었을 것이고, 625 전쟁 때에도 별다른 영향은 없었던 것 같다. C가 태어난 곳은 진짜 산골짜기 of 산골짜기 깡촌이어서 공산군이든 국군이든 서로 점령할 필요가 없었던 곳이었으니까.



강원도와 경상도를 구별하기 어려운 산골짜기. 21세기로 넘어오면서 대한민국 내에서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지역으로 선두권을 다투는 곳. 일제시대 초반까지만 해도 산에서 호랑이가 내려와 사람 물어가고 머리통만 따로 남겨 놨다는 전설의 레전드가 전해져 내려오는 곳.


'영양군 홍거리'가 아버지 C의 출생지였다고 한다. 나도 어릴 때 가 봤었는데 진짜 산을 몇 개 넘었는지 모를 정도였다. 아스팔트 도로가 생긴 이후에도 몇 시간이고 운전해서 도착하는 곳이었고, 도로 없던 시절에 걸어서 가려면 진짜 호랑이한테 물려 갈 것 같았다.


C는 그 곳에서 태어났고 자라났다.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소가 풀 뜯어먹도록 관리해 주고 개 목줄에 쇠못 박아서 개싸움 시키면서 순박한 산골소년으로 잘 자라났...을 리 없겠지?


C가 자라난 고향에는 '보릿고개'가 있었다.



이 글을 쓰는 나 D도 보릿고개를 겪어본 적은 없다. 70년대에 태어나 대부분의 어린시절을 쌍팔년도 대머리국가폭력배 아래에서 자라났던 사람들은 밥 굶는 서러움 같은 건 모른다.


대충 짐작만 할 뿐이다. 쌀도 없고 보리도 없고 감자도 없고 고구마도 없고 자칫하면 소 잡아먹은 뒤 폭망해야 하는 서러움, 그 고통을 간접적으로나마 짚어 볼 뿐이다.


어린 시절의 C는 보릿고개에 시달렸다. 625 전쟁이 진행중이거나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서구식 비료를 이용한 농법이 보급되지 않은 시절에 영양군 홍거리 마을은 심각한 식량부족 상태였다.


보릿고개를 이겨내기 위해 사람들은 소나무 속껍질을 뜯어냈다고 한다. 사투리로는 '송구'라고 하고 표준어로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소나무 속껍질을 뜯어내 잘게 빻아 먹으면 일단 굶주림은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21세기로 넘어오면 웰빙(Well-being) 차원에서 솔잎 먹는 사람들이 있다. 전세계를 통틀어 대한민국에서만 판매된다는 희대의 괴음료 '솔의 눈'도 있다. 솔잎과 그 추출물은 건강식 취급받는다.


그런데, 이 웰빙 솔잎 제품도 많이 먹으면 크리티컬한 치명타에 시달린다. 변비(便祕)라는 치명타.



평소에 밥 먹다가 가끔 웰빙 자연식으로 솔잎 먹어도 변비 걸리는데, 아예 밥을 못 먹고 소나무 속껍질만 먹으면... 변비가 더 심해진다고 한다. 매우매우 심해져서 아주 그냥 막혀버릴 정도가 된다고 한다.


나도 나중에 들은 얘긴데,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하다"는 말이 이 소나무 속껍질 때문에 생겼다고 한다. 보릿고개 면하려고 송구 벗겨 먹다가 심각한 변비에 걸린 사람들이 억지로 억지로 응가하다가 똥구멍이 찢어져 피 철철 흘렸다고 한다.


그나마 어른들은 복근이 강해서 똥구멍 찢어지는 한이 있어도 일단 배변은 했던 것 같다. 반면 아이들은...


C와 그의 형제들은 독자적으로 변비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들의 약한 복근으로는 X구멍을 막아 버린 단단한 덩어리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해결책은... '젓가락으로 쑤셔서 쪼개는 것'이었다.



7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상상하기 어렵다. 젓가락으로 똥꼬 후벼파서 단단한 덩어리를 쪼개는 작업이 어떤 느낌인지 상상할 수가 없다. 그걸 시전(!)하는 부모 마음도, 시전당하는 아이들 마음도 알 수가 없다.


우리가 듣기에는 무척이나 비인간적이고 괴로운 일이지만, 태어날 때부터 이런 삶을 반복해 온 사람들에게는 그냥 일상이었을 것이다. 원래 그렇게 살아야 했고 또 그렇게 살아가야 했을 것이다.


C가 살았던 어린시절에는 그냥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X구멍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C에게는 나이 터울이 좀 나는 남동생이 있었다. 중간에 여동생이 한 명 있었는데 일찍 죽었다고 한다.


C는 그 남동생을 잘 챙겨 줬다. 이후 C는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곧바로 생업에 뛰어들었는데 남동생은 고등학교까지 나왔다는 걸로 볼 때, 남동생이 꽤 똑똑하긴 했었던 것 같다.


어느날 그 남동생이 자기 형 C에게 말했다.


"C야. C야. 내 귀에서 뭐가 자꾸 짜르르 짜르르 울린다."


C는 남동생의 귀를 들여다 봤다. 거기에는 어린아이의 귓구멍을 완전히 막아 버릴 만큼 거대한 귀지가 있었다고 한다.


50년대의 헬조선. 보릿고개에 사람들이 굶어죽었고 전 국민의 80% 이상이 기생충에 시달렸으며 위생 따윈 아무도 신경 안 쓰던 세계 최빈국. 그런 나라의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C의 남동생.


어릴 때 C의 남동생은 말귀를 잘 못 알아들었다고 한다. 귀지가 너무 커져 거의 귓구멍이 막힐 상황이었으면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병원 의사 보는 건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었던 시골마을에서 한 번 귓구멍 막히면 그대로 농자(聾者. 귀머거리) 되는 상황. 그렇게 인식체계가 제한되면서 지능 발달이 극도로 늦어지게 될 상황.


천만다행으로 C는 손재주가 좋았다. 집에서 쓰던 귀후비개(귀이개)를 가지고서 남동생의 거대한 귀지를 파내 줬다고 한다. 자칫 귀지 떨어뜨렸으면 남동생이 귀머거리 됐을 것이고 한평생 원망 들었겠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 남동생은 음악적 재능이 있었고 이야기 풀어내는 재주도 뛰어났다. 독학으로 기타연주를 익혀 노래 없이 연주하는 기타음악을 즐겼고, 삼국지를 비롯한 동양고전을 좋아했으며, 한문도 잘 썼다. 물론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이미 나이가 많이 들어 다 옛 추억으로 넘어가 버렸지만.



여담인데, 이 막내 남동생은 어릴 때 꽤 순진했었던 것 같다. 한 분야에서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가끔 다른 분야에서 너무 융통성 없게 행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어릴 때 그런 성향을 보였던 것 같다.


하루는 할머니(필자 기준으로는 할머니. C와 그 동생 기준으로는 어머니)가 어디 다녀오면서 막내에게 별 생각 없이 명령(?)을 내렸다.


"ㅇㅇ야 집 잘 보고 있어라."


"네."


아침에 일찍 나간 할머니가 저녁 늦게 돌아왔을 때. 막내가 멍하니 선 채 하염없이 집을 바라보며 엉엉 울고 있었다.


"ㅇㅇ야 니 와 우노?"


"목이 너무 아프다."


"목이 와 아프노?"


"집 보고 있으라 해서 계속 집 봤는데 목이 너무 아프다."


"하이고, ㅇㅇ야. 집 보라고 진짜로 집만 보면 어쩌란 말이고?"


집 보라는 명령을 너무 착실히 수행하는 바람에 하루종일 집만 바라보다가 목이 굳어져 버린 막내 남동생. 어쩌면 귀가 막혀버려 남은 평생 음악적 재능 같은 건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살았을 수도 있는 남동생.


C는 그런 동생을 꽤 잘 챙겨 줬던 것 같다. 나이들었을 때에는 서로 싸우고 한동안 안 보기도 했지만 그래도 자식들 키우며 살 때에는 상당히 사이좋은 형제였던 것 같다.


어쩌면 그런 형제 간 우애(友愛)는 생존본능의 연장선이었는지도 모른다. 너무 배고프고 힘들었던 어린시절에 그나마 핏줄 통하는 사람들끼리 서로 도와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절박함이 형제 간 우애로 드러났던 것인지도 모른다.



힘든 시절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보릿고개라는 건 3~4월 경에 찾아오는 것이고 보리를 수확하고 나면 조금 나아지게 된다. C의 가족들은 굶을 때 굶고 먹을 때 먹으면서 살아갔다.


그 와중에 C는 운동 쪽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50년대에도 전국체전 같은 게 있었는데, 달리기를 엄청 잘해서 다니던 국민학교 대표로 군 대회에 나가 3등을 했었다고 한다. 조금 더 잘 먹고 잘 자랐으면 더 좋은 성적을 거두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달리기 말고 다른 운동도 잘 했었다고 한다. 몸이 가벼운 데 비해 근력이 좋고 엄청 민첩해서, 제대로 배웠으면 기계체조 같은 쪽으로 성공했을 수도 있다.


(나중에 C가 50대 나이였을 때에도 평행봉 위에서 360도 회전하면서 운동할 정도였다. 뒷산에 등산 나온 동네사람들이 그걸 보고 깜짝 놀라곤 했었다. 몸꽝이었던 아들 D는 따라해 볼 엄두도 못 냈었고.)


그렇다고 공부 쪽에 담을 쌓은 것도 아니었다. C는 상당히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최종 학력은 국졸이었지만 학력과 무관하게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들을 금방 배웠고 잘 처리해 나갔었다. 이후 다시 얘기할 편집광적 집착이 있기 전까지는 상당히 합리적인 사람이기도 했다.


다만, 운동도 공부도 그 재능을 완전히 다 발현하기는 어려웠다. 학교를 제대로 다 다닐 수가 없었으니까.


1년 내내 굶는 건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근근히 먹고 사는 수준이고 보릿고개가 오면 송구 씹으면서 똥꼬 막혀야 하는 생활. 이렇게 살면서 학교 다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 C는 학교를 자주 빠져야 했다. 학교 나갈 시간에 소 돌보고 풀 베어 오면서 집안에 도움을 줘야 했다.


C는 국민학교 6년 과정 중 1년 가량을 완전히 빠졌었고, 나머지 5년도 중간에 계속 빠졌었다고 한다. 수업 안 들은 부분은 당연히 알 수가 없었다. 이러면 학교 성적이 좋을 수가 없었겠지.


(* C의 형들 중에는 중학교까지 나온 사람들이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C의 남동생은 고등학교까지 나왔고. 왜 이런 차이가 생겼는지는 얘기를 못 들었으니 알 수가 없다. 50년대에는 시대적으로 자식 중 한두 명에게 몰빵하는 게 당연시되던 시절이었으니 자연스레 그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다.)



어찌어찌하여 간신히 국민학교 졸업을 한 뒤. C의 인생에 중대한 변화가 찾아오게 된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영양군 홍거리 마을을 떠나 '크고 웅장한 도시'로 이사 가게 된 것이다.


크고 웅장한 도시. 21세기로 넘어오면 그냥 지방 소비도시 중 하나일 뿐이지만 50년대에 경북 산골짜기 사람들 기준으로 보면 별천지나 다름없었던 대형 도시. 5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계속 인구 50만을 유지했던 도시.


'안동'이었다. C의 가족들은 안동으로 이사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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