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운전병. C는 1년 간의 베트남 복무를 끝내고 대한민국으로 복귀했다. 떠날 때는 일병이었는데 돌아올 때는 상병이었고 짬밥 순서대로 하면 나름 고참 대열에 합류할 수준이었다.
그러나, C의 군생활은 절대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대한민국 군대는 최악의 분위기였다. 정상적으로는 전역했어야 하는 말년병장 고참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던 것이다.
이 말년병장들이 전역 못한 이유는 '김신조 사건' 때문이었다.
영화 실미도 앞부분에서 5분 가량 김신조 사건을 다룬다. 김신조 포함한 30여 명의 북한 특수부대원들이 박정희 목을 따러 대한민국으로 잠입했던 사건. 투항한 김신조를 제외하고 나머지 전원을 사살하였다고 한다.
우리 후세대 사람들에게는 그냥 과거의 기록일 뿐이지만, 이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헬오브지옥 열리는 상황이었다. 가뜩이나 36개월 복무로 힘들었는데 전역까지 보류되면 뭐... 분위기 좋을 수가 없겠지.
전역 보류당한 말년병장들은 악에 받쳐 있었다. 병사들 간 구타행위가 당연시되던 60년대 분위기에서 말년병장 대여섯 명이 바글거리고 있으면 당연히(!) 구타 폭행이 끊이지 않는다. 거기에 '해외 다녀온 운전병'이 추가되면 결과는 뻔하다.
C는 많이 맞았다고 했다. "베트남 가서 미군 돈까스 처먹다 돌아온 놈"으로 찍혀 거의 매일 맞았다고 했다. C의 성격상 정말 참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버텼다. 대한민국 군대 조직에서 개인이 성깔 부리는 건 의미없는 반항일 뿐이라는 걸 잘 알았기에 일단 버텼다.
몇 달 동안 힘들긴 했지만 그 힘든 시간도 결국은 지나가기 마련이다. 김신조 사건으로 전역 보류되었던 말년병장들이 대거 사라졌고 C는 제대로 된 고참 반열에 올랐다.
다만, 그렇다고 C가 곧바로 대접받았던 건 아니다. "베트남에서 돈까스 처먹던 놈"이라는 낙인은 그대로 남았고 C아래 상병들은 여러 명이었으니까.
5명의 상병들이 뭉쳐 다니며 1명뿐인 해외파병용사를 무시하는 상황. 영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렇긴 한데, C는 이걸 뒤집을 만한 깡다구가 있었다. 안동 뒷골목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답게 C는 반격을 준비했다.
운전병으로서 후임 일병을 데리고 운행을 한 날. C는 부대 막사로 돌아왔다. 저녁을 못 먹은 상태였다.
모든 운전병들이 그러하듯이, 배식을 못 받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운전병이 그 배식을 받아 둬야 한다. 이건 계급과 무관하게 운전병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늦게 귀가한 두 병사에게는 배식이 없었다. 똘똘 뭉쳐 다니는 5명의 상병들이 "베트남에서 돈까스 처먹던 놈"을 엿먹이려고 배식을 안 받은 것이다. 함께 다녀온 일병도 피해 입었고.
C는 눈빛이 매우 날카로운 사람이다. 그 눈빛으로 5명의 상병들을 노려보면서 C가 짧게 말했다.
"배식 어디 갔어?"
한 상병이 관물함에 기대 앉은 채 대답했다.
"처먹고 싶으면 니가 받아 먹든가."
이 때 C는 이미 상황 판단을 끝냈다. 상병 5명 모두 앉거나 누운 상태였고 C본인은 서 있었으며 가까운 곳에 '야전삽'을 비롯한 무기가 있다는 상황 말이다.
싸움에 익숙한 C는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도록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면서 느긋하게 받아쳤다.
"니가 받아 먹어? 그래 알았다."
C는 전투화를 신은 채 잠자는 곳으로 올라가 관물함으로 접근했다. 5명의 상병 모두 C의 행동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C가 야전삽을 들고 빠르게 휘두르기 전까지는.
빠아악!
"어허억!"
군용 야전삽은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타격무기다. 삽날 부분으로 찍으면 사람 두개골을 쪼갤 수도 있다. 물론 C는 그렇게까지 하진 않았고 넓은 부분으로 얼굴을 노려 휘둘렀지만, 그래도 앉은 상태에서 야전삽에 처맞으면 어억 소리 날 수 밖에 없다.
처맞은 상병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다른 4명이 급히 일어나려 했지만 이미 C는 야전삽을 들었고 4명은 비무장 상태다.
C가 야전삽을 펼쳐들면서 날카롭게 외쳤다.
"일어서는 새끼 골통 뽀갠다! 다 내려가서 대가리 박아!"
실전경험이 전혀 없었다고 하지만 어쨌든 목숨 버릴 각오를 하고 베트남전에 다녀온 파병용사. 그런 사람이 야전삽 삽날 펼쳐들고 골통 뽀갠다고 윽박지르면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다. C의 매서운 눈빛이 그 협박질을 더 강하게 만들었다.
처음에 맞은 상병 포함해서 5명이 동시에 들고 일어나면 제압 가능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 중 1명 이상은 진짜 야전삽 삽날에 찍힌다. 1/5 확률로 머리통 찍힐 것이냐, 아니면 상대방 말대로 내려가서 대가리 박을 것이냐. 선택할 시간이다.
상병들은 모두 쫄았다. 그들 모두 주춤주춤 일어나 내무반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들 대가리 박았다.
C는 일병 이하 졸병들에게 손짓을 했다.
"가서 쇠파이프 빼 와라."
밥 굶은 일병이 군용차량 정비용으로 쓰는 쇠파이프를 빼 왔다. 그걸 건네받은 C는 대가리 박은 상병 5명을 제대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빠악! 빠박!
허리나 머리를 때리는 건 아니고 허벅지와 엉덩이 중심으로 구타. 사랑의 매 따위는 아니고 그냥 미워서 때리는 거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운전병 C는 자기 말에 개기던 5명의 후임들을 아작내 버렸다.
"니들이 나한테 개기는 건 그냥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후임들 밥을 안 챙겨 놔? 니들이 그러고도 군인이냐!"
"잘못했습니다 병장님."
"같은 일 또 벌어지면 니들 중 한 놈은 내 손에 죽는다. 죽이고 영창 갈 거야. 개기고 싶으면 개겨라."
"아닙니다 병장님."
C는 5대1 승부를 뒤집었다. 일병 이하 졸병들을 감싸는 모습까지 보였으므로 명분도 충분했다.
그 뒤로 상병 5명은 절대 개기지 않았다고 한다. C는 편안하게 말년병장까지 생활한 후 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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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군대에서의 마지막 활약(!)은 조금 멋있긴 했지만, 전역하고 사회인이 된 C의 생활은 그리 낭만적이지 않았다. 아직 본격적으로 산업화를 시작하지 않은 60년대 말의 대한민국은 여전히 힘들고 어려운 곳이었다.
군대에서 운전기술을 배웠다고는 해도 그걸로 제대로 돈 벌기는 어려웠나 보다. 일단 이 시대에는 자동차 자체가 많지 않았고, 트럭 운전을 할 수 있는 운전수들이 산업역군으로 맹활약할 수 있는 시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
C는 일단 노가다부터 했다고 한다. 인간의 노동력 가치가 한없이 낮아 하루종일 노가다를 해도 국수 두 그릇 먹으면 끝나는 시대였다고 하더라.
다행히 노가다 생활을 금방 끝낼 수는 있었다. 이 때만 해도 운전면허는 나름 전문자격증 취급을 받을 때였으니까.
C는 취직을 했다. 부산 ㅇㅇ병원 병원장의 개인 승용차 운전기사였다.
개인 운전기사 시절에 대해 C는 그리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아마 좋은 기억이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월급 주는 사람의 갑질'은 21세기로 넘어온 이후에도 끝없이 벌어진다. 60년대 후반 ~ 70년대 초반 대한민국이면 더 심했을 것이다. 개인 정원사, 운전기사, 가정 내 파출부 등등에게 인권이 보장될 리 없었다.
C는 여러 가지 잡일을 했을 것이다. 운전기사 일 말고도 가정 내 잡역부 비슷하게 이것저것 일을 떠안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월급은 쥐꼬리만큼 받았을 것이고.
그래도 당장은 대안이 없었다. 운전기술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 기술을 살릴 만한 일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병원장의 개인 승용차 기사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오래 가지 못했다. 병원이 망해버렸으니까.
'자가용'이 그 자체로 부자의 상징이던 시절. 자가용뿐만 아니라 별도 운전기사를 둘 만큼 잘 나가던 부자 병원장.
그 병원장이 왜 망했는지는 모른다. C가 얘기를 해 주지 않았고, 아마 C도 잘 몰랐을 것 같다. 어느날 벼락처럼 병원이 망해 버렸고 병원장은 연락두절로 사라져 버렸다.
병원에 근무하던 사람들 모두 벙쪘다. 간호사, 사무장, 운전기사 모두 월급을 못 받고 망연자실해 있었다고 한다. 딱히 대안도 없는데 병원에 모여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고 한다.
21세기에도 그러하듯이, 조직 하나가 망해버리면 그 조직의 말단직원들이 가장 힘들어진다. 윗선들은 모아 놓은 돈으로 버틸 수 있고 다른 조직으로 옮기는 것도 상대적으로 잘 하는 편이지만 말단직원들은 그렇지 못하다.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쉽게 움직일 수 없고 모아 놓은 돈도 부족하다.
C를 비롯한 병원 직원들도 그러했다. 모여 있어 봐야 답이 안 나오는 걸 알지만 달리 할 게 없어서 병원에 모였다. 그러면서 시간만 날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 공원이라도 가 보자."
"공원?"
"이러고 있으면 뭐 하나. 바람이라도 쐬고 와야지. 돈 가진 거 다 모아 봐."
매우 충동적인 제안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밥값으로 생활비가 빠져나가는데 그 돈으로 공원 간다니. 더 빨리 망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사람이 한계에 몰리면 미래를 생각하지 않게 된다. 당장 가진 돈 아껴서 며칠 더 버티느니 차라리 오늘 하루 즐겁게 쓰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병원에 모인 사람들이 그런 상태였던 것 같다. C를 포함한 전원이 그렇게 '오늘 하루만이라도 바람쐬고 놀자'라고 생각을 했고 다들 동의했다고 한다.
C는 공원으로 갔다. 내일 밥을 굶더라도 오늘 하루 놀기 위해 공원에 갔다.
돈 없고 빽 없고 직업 없고 월급 떼인 20대 청춘. 가난하고 가난하고 또 가난했던 젊은 날.
그래도 젊었다. 젊기 때문에 버텨냈고 젊기 때문에 희망이 있었다.
영화나 소설이라면 여기서 운명처럼 누군가를 만나 연애 시작했을 수도 있지만... 현실은 그렇게까지 낭만적이진 않다. C는 부산공원에서 운명적인 연애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그런 일은 없었다.
대신 C에게는 다른 좋은 일이 있었다. 그 날 우연히 고향사람을 만났고, 서로 안부를 묻다가 '운전기술'에 대해 얘기를 한 것이다.
"뭐 하고 사노?"
"군대에서 운전기술 하나 배웠는데 그것도 병원 망해서 놀고 있심더."
"운전 배웠다고? 트럭 몰 줄 아나?"
"군대 3년 내내 트럭 몰았심더."
"아 딱 좋네. 이래 좋은 사람 있으면 바로 추천해야재."
"추천요? 어딜요?"
가난한 실직자 생활 끝에 바람쐬러 나갔던 부산공원. 거기서 C는 새로운 일자리를 추천받았다. 한참 중화학 공업을 일으키려던 정부시책에 부응해 급성장하고 있던 물류회사에 추천받았다.
C의 고향사람이 추천한 회사. 지금은 같은 이름을 등록하려 해도 상호등록하는 게 불가능한 회사. 대한민국 육상물류 부문에서 압도적인 1위로 군림했던 회사.
[대한통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