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혀 도움이 안 되는 노력>
예전 내가 고3 때 있었던 일이다. 대략 90년대 중반이다.
20세기 말의 대한민국은 여러 가치관이 혼재되어 있었다. X세대의 자유분방함과 유교탈레반의 고리타분함이 섞였고, 유럽식 합리주의와 식민국가의 미신이 뒤섞였으며, 불교와 기독교와 천주교와 남녀호랑교를 잡탕으로 믿는 사람이 온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런 나라에서 내 어머니도 미신을 꽤 많이 믿었다. 아마 주위에 갈 수 있는 종교단체는 다 한 번씩 돌아다녔을 거다. 유일신을 믿는 종교를 다신교 식으로 돌아가면서 쇼핑했고 은근 헌금도 많이 낸 걸로 알고 있다.
여기에 더해 자식이 고3. 더 믿어야 한다. 종교의 힘으로 자식을 공부 잘 하게 만들어야 한다. 90년대 중반까지는 헬조선 사람들 중 그런 미신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았다.
마침 석가탄신일이 되었다. 불교계에서는 연중 최고 행사이고 헌금 잔뜩 땡겨야 하는 시즌이다. 한 해 벌이 다 땡겨먹어야지.
나는 학교 자율학습 왔다가 저녁에 집으로 복귀했다. 당시만 해도 외식은 거의 안 할 때였고 나도 그랬다. 집밥 먹으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가 안 온다. 저녁을 지나 밤 9시가 되어도 안 온다.
결국 어머니가 왔을 때. 나는 가방에 담겨 있던 배내옷 부적을 꺼내 바닥에 내동댕이쳐 버렸다. 완전 빡쳤었다.
"절에 가서 기도할 시간에 고3 수험생 밥 해 주는 게 낫지! 이딴 부적 다 태워라!"
뭐 어머니 입장에서는 섭섭하셨을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
자식 잘 되라고 온갖 정성 다 기울여서 하루종일 절하고 생활비 아껴서 모은 돈으로 헌금도 잔뜩 했는데 그 정성을 무시하니 섭섭하셨을 거다. 그랬을 거다.
자, 그런데 말입니다.
그 정성이 무슨 소용인데? 고3 자식 저녁 굶기면서 황동 도금한 부처 불상에 절하는데 뭐 어쩌라고?
정성이라는 건 그 정성 받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어야 의미 있는 것이다. 부처 불상 앞에서 백날 부처핸쎂 하고 돈 갖다바치고 108배 하고 간절하게 기도해 봐야 막상 공부하는 수험생이 밥 굶으면 그 날 공부 망치는 거다. 그 뒤로 몇날며칠 여파가 이어지는 거고.
그딴 정성 기울일 바엔 그냥 쿨하게 중국집에서 배달 시키는 게 더 낫다. 일단 끼니는 해결될 것이고 수험생도 짜증 덜 날 거잖아.
그 뒤로 대략 30년이 지났다. 대한민국은 상당히 합리적인 나라가 되었다. 이제 제삿상 차린답시고 친척끼리 모여 악플배틀 벌이는 집구석보다, 제사 따위 귀신씨나락 까먹는 짓거리 무시하고 해외여행 다니는 집구석이 더 많아졌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도 미신숭배 사상은 많이 남아 있다. 몇 년 전에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도 회삿돈 수 억 횡령해서 무당에게 갖다바치고 굿 하다가 결국 감옥 간 미친년이 있었고.
회삿돈으로 굿 하는 건 너무 많이 나간 것이지만, 우리 현실에서도 '의미없는 정성'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다. 정성 기울이는 사람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겠지만 그걸 받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마이너스인 경우가 종종 있다.
의미없거나 마이너스인 정성보다는 오히려 무관심이 낫다. 무관심한 상태에서는 서로 스트레스를 안 받거나 / 덜 받으니까 막상 일이 터졌을 때에는 더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다.
의미없는 정성 기울이던 사람이 스트레스 때문에 결국 다 놓아버린 상황이라면 진짜 일이 터졌을 때 제대로 대응을 못 한다. 하루종일 교회 성당 절 종교쇼핑하면서 기도하던 부모는 고3 수험생 자식이 가출하는 상황에 대응을 못 하고, 제사 지낸답시고 며느리 다그치던 시어머니는 아들이 이혼남 될 상황에 대응을 못 한다.
주위 사람들, 특히 소중한 사람들에게 정성을 기울이고 싶은가? 그럼 먼저 받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고 나서 행동하자. 받는 사람이 무당 종교 다 싫어하는데 혼자서만 지레짐작으로 108배 하고 헌금 쏟아붓는 병림픽은 제발 자제하자.
그렇다 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