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가 무엇이 됐던 자신을 감추는 사람은 뒷맛이 개운치 못하다.
가끔 주위를 둘러보면 의도된 가면을 쓰고 있는 자들이 종종 보인다.
가면을 쓴 캐릭터가 됐든, 인터넷의 특수성을 들이밀어가상의 가면을 쓰든, 페르소나를 뒤집어쓰고 있든 우리 주변 어디에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람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나는 어찌 됐든 간에 그런 이들을 멀리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품고야 만다.
때로 그런 이들을 지그시 보다 보면 근처에도 다가가기 싫어지는 꺼림칙함이 몰려오는 때가 있는 것이다.
대체 이런 근본 없는 감정은 어디에서 샘솟는 것일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사람에게 있어 얼굴이란 그 존재의 모든 것을 담은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얼굴 이외의 몸을 구성하는 파츠만을 보고
누가 누구인지 바로 특정해 낼 정도가 되지 않는 사람의 인지력이란
역시나 그리 대단치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타인의 존재성을 실루엣 바로 다음으로 얼굴에서부터 느낀다.
얼굴이란 사람에게 있어 그 정도로 핵심적인 기관인 것이다.
그것을 다른 얼굴. 즉 가면으로 가려버린다?
그러한 행동의 구심점이란 간단하다.
어떤 이유든 간에 그들은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떳떳하지 못함에도 가면을 쓰는 이유를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면 그나마 자랑스럽지 못한 이유를 가진 것보다야 조금 더 낫다지만
악하든, 하찮든, 대단찮든 결국 가면을 쓰게 된 진짜배기 심정이란 사람의 오만가지 감정과 자신의 삶의 잔흔을 한층 가려냄으로써 이득을 얻고자 하고 불가피한 손해를 틀어막으려 한다는 뒷심은 일종의 신앙처럼 절대적인 이기심으로 점철되어 있을 것이다.
가면을 쓴 자라면 히어로든 악당이든 하나같이 비겁자.라고 싸잡고 싶어 진다.
말은 이렇게 해도 현실엔 올곧은 히어로도 순수한 악당도 없으니 가상세계에선 그럴듯하게 보일만한 사정을 쥐어짜내서 붙여주기 마련이니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객체들을 단순히 욕보이려는 것은 아니긴 하다.
역시
자신의 얼굴을 내세우지 못할 사정 따윈 그런 예비된 가상에만 존재한다.
우리의 세상은 다르다. 현실이란 그렇게 인위적으로 드라마틱하지 않으니까.
사람에게 주어지는 능력이란 게 개체마다 상이하게 갈리지도 않을뿐더러, 갈린다면 결국 경험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니 평등한 현실은 비정하기에 아름다운 가상처럼 쓰기 좋게 짜 맞춰지는 법이란 없다.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다. 가면을 쓸 때면 나는 가면으로써 이득을 취하려 하는 것인가. 아니면 가면을 쓴 멋쟁이이자 겁쟁이로서 머물려하는 것인가.
가면과 함께할 때면 크게 이 두 가지 상황밖에 주어지지 않으니 말이니 지금부터 항상 의식하려 했지만
마주 보니 역시나 쉽지 않다. 한숨만 푹푹 나올 뿐이다.
앞선 글의 내용처럼 가면의 비겁성에 대해 쉽사리 정의하면서도 정작 나는 일말의 여지도 없이 가벼운 익명성조차 보장받으려 하는 비겁자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이 QHD화질로 다가왔다.
문득 어릴 적의 영웅. 로버트 씨가 떠올랐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mcu의 토니 스타크가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을 수 있는 이유란 단지 그의 화려함 뿐만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그는 아이언맨이기 이전. 지천에 널린 방탕아이자 온실의 화초였다. 그랬던 그를 어디에나 깔린 패배자가 아닌 자신만의 정의를 관철하는 영웅의 길로 진정으로 거듭나게 한 용기란 가면을 벗어내고자 하는 그 다짐의 한마디렸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고자 하는 당당함이 그토록 단순한 한마디에 진중하게 묻어 나왔기에 그 당당한 자기소개로 자신의 엿같은 모습에 사형을 선고하고자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언젠가는 그런 용기를 품고 싶다. 나아가 품은 것만으로 끝을 보고 싶지 않다.
나는 나라고. 여기에 있다고. 그러니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당당하게 행동하고 자신 있게 몰매를 맞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