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히 자위自慰스러운 해방감을 적었다.
지구 위의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끊임없이 회전하며 여기저기 굴절된다.
물론 우리 눈에 보여야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미시적인 감각으로는 결코 느끼지 못할 뿐인 것들.
그 대표격인 외우주가 우리를 두르고 있는 지금 우리의 몸은 그와 반대되는 조그만 영혼이 또다시 두르고 있다.
난 현시대에 들어서고 영혼이라는 게 실존한다고 생각하는 자들보다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더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땅 위의 구성요소는 발전하는 인간 앞에서 조금씩 전복되어가고 사람들의 뇌가 함양하는 지식들의 총량은 그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천천히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 영혼이라는 비확정된 개념을 나날이 흩어놓는다.
우리의 인지력을 아득히 뛰어넘은 무수한 전기신호의 조합들로 하여금 생물이 이리도 다채로운 사고와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영혼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해 왔던 것이다. 영혼이란 마치 무지한 예술 또는 무지의 한계를 유명무실히 드러내는 단어이다. 그러나 나는 그게 좋다.
세계가 점점 명확해지는 국면에서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우리가 훗날 말도 안 되게 발전하여 우주의 지평선 너머에 존재하는 법칙까지 전부 꿰뚫는다고 해도 단 하나. 정복되지 않는 불가침의 영역인 죽음의 풍경은 끝내 보지 못할 것이라는 미래가 너무도 선명히 보인다.
그렇기에 그 후의 모습도 생각하고 싶어진 것이다. 내 개인적인 희망은 영혼이라는 개념을 들먹이지 않고서야 명확하게 형태를 잡지 못한다. 단순 뉴런의 전극에 의한 무의식의 집합체인 우리는 뇌가 썩는 즉시. 한순간에 세계에서 부정당할게 뻔하지 않은가.
썩고 불타서 없어지는 것이다. 죽자마자 통째로 이 존재가 있었다는 어제가 마치 꿈처럼 녹아 사라진다. 그러니 결국 사람에게 있어 영혼이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죽음은 끝없는 무음무식識에 가까울 것이다.
이처럼 보이는 대로 설명하면 앞뒤가 절묘히 맞아떨어지고 논리적으로 설명과 해석이 가능하기에 무심코 믿어버리게 되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의 작은 뇌가 땋은 지구만의, 인간만의 상식적 인지라는 한계는 아닐까.
결국 이론이라는 것도 미개발 영역을 정의하기 위한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역에서만큼은 선명한 물증이란 어디에도 없다.
다행이다.
살아가는 날은 눈을 감은 이후의 시간과 비교하면 감히 백분율로 따지지도 못할 정도로 작은 일부이다.
그런데도 우린 그 너머를 관측하지 못하는 것이다. 모두에게 도래한 이 현실이 내겐 참 아쉽다.
어찌저찌 죽음을 극복하는 특이점이 온다고 쳐보자. 자신을 복제하던, 우리의 몸이 더 이상 소모되지 않게 하는 기술을 발명하건. 결국 그렇게 극복 아닌 회피를 행할수록 우리는 3차원 너머의 절경을 보지 못하게 되는 가능성에 더 가까워질 뿐이다. 영겁의 기간 동안 이어질 감옥과도 같은 행성에 자신을 가두는 불멸이란 아마 사람이 품는 헛된 야심 중에서도 단언컨대 생물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바람이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 말했던 것처럼 지구 위의 모든 것들은 어떻게든 순환하는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물론 사람도, 그 의식도 포함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재활용되지도 않는 것처럼 보이는 한시적인 혼魂들이 너무나도 아깝지 않은가?
내가 아무리 이런 식으로 여겨봤자 한낱 사람이 짜놓은 가치중시적인 기준일 뿐이고
지금도 태양은 우주의 공허로 빛의 재보를 조금도 아끼는 법 없이 낭창하게도 뿌려댄다. 대단한 녀석 같으니.
이 앞에서 인간은 작아진다. 그 인류조차 70억의 분할이다. 이토록 비정한 우주의 외곽면에서 개인의 의지는 어디로 흡수되고 뱉어지게 되는 걸까?
내가 남긴 자손, 글, 사상과 같은 것들이 나의 이후에 남는다 하여도 결국 찰나의 잔영처럼 여겨질 뿐. 과연 이게 생명이 탄생하는 의미의 전부일까? 그럼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생명은 왜 기적이라 불리는 거지?
어쩌면 너무나 작고도 불확실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몸속에 담겨있을지도 모르는 영혼의 활주로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이란 생각보다도 보이고 느껴지는 것만을 믿는 경향이 있으니까 세상의 구동방식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3차원에는 무한이란 없다. 세상에 죽은 사람이 이미 산 사람의 숫자를 넘어섰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뱉어내어 자멸로 치닿을 정도로 생명의 체계는 허술하고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것이든 한계란 있고. 그렇기에 멸종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멸종은 또 다른 거름이 되기에 분명 죽는다는 것은 무언가로 끊임없이 뱉어내질 중간과정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말로가 설령 거기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푸른 행성 위에 기약 없이 귀속될 운명으로 확정되어있진 않을 것이다. 무조건 그럴 것이다.
recycle? newborn? 어찌 됐든...
우리는 죽으면 우주로 뻗어나가는 것은 아닐까? 우주의 끝에도, 중심에도 결국 엇비슷한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이 우주 안에서라면 우리는 또다시 빛나게 될 삶을 얻게 되진 않을까? 반대로 암흑같이 새까맣고 절망적인 운명이 기다린다고 해도 그건 그것대로 새로운 여정일 것이다.
이런 식의 공상을 거듭하면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해지기에 이른다. 죽음은 바닥이 없는 절벽이 아닌 활주로라고 믿고 싶어 진다. 이런 식의 생각을 그득 품으면 이윽고 이런 뻘글도 쓰게 되는 것이다. 소중한 나의 뻘글.
다른 사람들은 또 어떤 자기만의 생각을 담고 있을지 궁금해지게 되니 오늘의 밤의 끝자락에서 쉬이 잠들지 못하게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