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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런던 일기 08화

맥주의 유산

The George

by 일영

영국의 ‘파인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술의 단위 중 하나다. 그만큼 영국 문화 속에 술, 그리고 ‘펍’이라는 공간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인기 있는 펍은 평일 오후에도 문 밖까지 사람들이 짐을 어깨에 멘 채 술잔을 기울이며 북적거린다.


처음 펍에 가게 된 날은 펜싱 동아리 활동을 마친 밤이었다. 펍을 가본 적이 없다고 하자, 만난 지 며칠 되지 않은 부원들이 나를 이끌고 갔다. 도착하자마자 눈에 들어온 표지판을 읽으며, 이곳이 런던의 마지막 ‘갤러리 인(Galleried Inn)’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철도가 발전하기 전, 말이 주 교통수단이던 시절에 인들은 사람과 말이 쉬어갈 수 있도록 숙식을 제공하던 곳이었다. 윗층의 여러 개의 방과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이 그 옛날의 흔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동아리 부원들은 이미 취할 생각이었는지 샷을 연거푸 들이키고 있었다. 평일인데도 이렇게 사람이 붐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옆 사람의 말도 잘 들리지 않아 귀를 가까이 대야만 했다. 찰스 디킨스가 여러 번 방문해 그의 소설 작은 도릿에도 등장하는 이곳에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 왠지 경이롭게 느껴졌다. 비록 그의 소설에 대해 깊이 알지는 못하지만, 반쯤 남겨둔 위대한 유산이 생각나며 그 시대의 흔적을 느꼈다.


그 후로도 종종 펍을 찾게 되었다. 그때마다 펍이 단순히 술을 마시는 곳이 아닌, 사람과 시대를 연결하는 공간임을 느꼈다. 삐걱거리는 바닥 소리를 들을 때마다 수백 년 전 이곳을 드나들던 사람들이 떠올랐고,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교류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따뜻하게 다가왔다. 온갖 소음 속에서도 누군가는 케이크 초를 불며 사랑하는 이와 기념일을 축하하고, 또 다른 이는 맥주 향을 맡으며 순간을 즐기고, 어떤 이는 진지한 얼굴로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이 모든 순간이 펍이라는 공간 안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묶여 있는 듯했다.


이제는 내 삶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 찰스 디킨스가 이곳에서 사람들을 관찰했듯, 나 또한 누군가의 흔적이 남은 이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시간을 함께하며 런던과 한층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런던이라는 거대한 패치속, 내 자리도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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